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키워드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연재소설|녹도아리랑 ㊻] 끝내 부르지 못한 노래 -끝

  • 김광희 기자
  • 입력 2026.10.13 01:43
  • 댓글 0
  • 글자크기설정

  •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47-1 65%.png

 

산에 남은 이름, 세상으로 이어진 삶

 

2022년 6월 하순, 수연은 방송에서 칠현의 후손들이 정선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선조의 자취를 찾아오는 자리였다.

고려가 무너지고 일곱 선비가 정선에 들어왔다고 전해지는 해로부터 육백삼십 년이 흘렀다. 수연이 찾아본 안내문에는 남면 칠현사(七賢祠)에서 제례를 지내고, 이튿날에는 아리랑의 자취가 남은 곳들을 돌아본다고 적혀 있었다.

수연은 안내를 끝까지 읽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칠현 후손들이 정선에 온대요.”

어머니는 장소를 묻고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수화기 너머로 달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가자.”

먼 길을 다녀오면 무릎이 붓던 때였다. 차에서 내려 많이 걷지 않도록 알아보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걸을 수 있을 때 가야지.”

 

출발 전날 수연은 상자를 열었다.

외할머니의 공책은 얇은 종이에 싸여 있었고, 원복의 장부를 찍은 사진들은 촬영 순서대로 봉투에 들어 있었다.

그 밑에는 쓰다 만 원고가 놓여 있었다. 맨 위를 덮은 종이는 다른 장보다 누렇게 바래 있었고, 모서리는 상자 안쪽을 따라 조금 말려 있었다.

덮개를 들추자 무진이 젖은 옷을 입고 문턱을 넘는 장면이 나왔다.

부엌에서는 순덕이 돌아보고 있었다.

그 아래 몇 줄이 비어 있었다. 수연은 다음 장을 넘기지 않고 그 빈 곳에 손을 얹었다. 스물여덟 해가 지났는데도 무진은 아직 문턱에 서 있었고, 순덕은 아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봉투 귀퉁이에는 처음 정선에 다녀온 해가 적혀 있었다.

1994년.

 

수연은 숫자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때의 어머니는 지금의 자신보다 젊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수연의 옷깃을 바로잡아 주고, 비탈에서는 먼저 손을 내밀던 나이였다.

외삼촌이 그만두라고 했던 목소리도 잊지 않았다.

이씨로 살아온 사람들의 이름을 무슨 권리로 바꾸려 하느냐고, 전해 오는 말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고 물었다. 수연은 펼쳐 놓은 종이만 내려다보았다. 외삼촌이 돌아간 뒤에도 상자 앞에 앉아 있다가, 아무것도 고치지 못한 채 원고를 덮었다.

이번에는 원고를 두고 공책 사본과 장부 사진만 챙겼다.

안내문에 적힌 제례 날짜를 봉투 뒤에 옮겨 적고, 녹도에서 찍은 어머니의 사진도 넣었다.

사진 속 어머니는 외투 깃을 세운 채 강 쪽을 보고 있었다. 가방을 붙든 손가락이 지금보다 굵었고 손등에는 깊은 주름이 없었다. 수연은 사진을 봉투에 밀어 넣다가 멈췄다. 얼굴이 가려진 뒤에도 그 손만은 조금 더 들여다보았다.

 

배냇저고리는 꺼내지 않았다.

펼칠 때마다 약해진 솔기가 조금씩 벌어져 이제는 사진으로 보는 편이 나았다. 상자 뚜껑을 닫으려는데 소매 끝이 몸판 밑으로 접혀 있었다. 수연은 천 아래로 손을 넣어 받친 뒤 소매를 펴 주었다. 손바닥에 닿는 무게가 거의 없었다. 손을 빼자 작은 옷은 천천히 내려앉았다.

옷깃 아래에 남은 주름은 펴지지 않았다.

수연은 손끝을 가까이 가져갔다가 거두었다. 소매가 다시 접히지 않았는지 살핀 뒤에야 뚜껑을 덮었다.

 

정선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아침 안개가 남아 있었다.

밤비에 젖은 산허리가 굽이를 돌 때마다 나타났다가 가려졌다.

골짜기 아래에서는 강물과 안개의 빛깔이 비슷해 물이 흐르는 자리만 희미하게 움직였다.

옥수수 잎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바람에 떨어졌고, 감자밭 가장자리에는 빗물이 지나간 가느다란 홈들이 나 있었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풀과 젖은 흙 냄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채 바깥을 보고 있었다.

 

“춥지 않으세요?”

“조금 더 열어 둬.”

산그늘을 벗어나자 어머니의 손등에 잠깐 볕이 들었다.

“옛날에도 여기 들어올 때 비가 왔지.”

“그때는 가을이었어요.”

“그래. 신발이 젖어서 숙소에서 말렸지.”

수연은 웃으며 창문을 조금 올렸다.

그날 밤 두 사람은 신발 안에 신문지를 넣어 두었다.

다음 날 아침 수연이 앞코를 눌러 보니 종이까지 축축했다. 어머니는 괜찮다며 신발을 신고 무진의 집으로 올라갔다. 비탈에서 수연이 미끄러졌을 때에는 돌아서서 팔을 내주었다.

 

남면에 도착할 무렵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로 나온 햇빛이 처마의 물기를 밝히다가 다시 흐려졌다. 나무 아래에는 아직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고, 볕이 닿는 흙에서는 눅눅한 냄새가 올라왔다.

어머니가 차에서 내리자 수연은 팔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잡았다.

칠현사 주변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멀리서 온 차들이 차례로 멈췄고, 젊은 사람이 뒷좌석의 노인을 부축해 내렸다. 누군가는 차에 두고 온 안경을 가지러 돌아갔으며, 누군가는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상대의 두 손을 잡았다.

 

이름을 묻는 말 뒤로 어느 문중인지, 어느 어른에게 선조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확인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족보를 복사해 온 사람도 있었고, 휴대전화에 담긴 집안 어른의 사진을 보여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낯선 지명을 몇 번 맞춰 부르다가 같은 마을을 말한다는 것을 깨닫자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어머니가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조상은 아는데 서로는 모르는 사람들이네.”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인 사람들은 곧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농사를 짓는다는 사람이 있었고, 가게를 자식에게 맡겼다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휴가를 냈다는 사람은 내일 돌아가면 밀린 일을 해야 한다며 웃었다.

 

수연은 어머니의 겉옷 단추를 잠가 주다가 안내판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변귀수(邊貴壽).

변한필(邊翰弼)이 오래 붙들고 살았다는 이름이었다. 공책에는 그가 족보를 닦았다는 말과 아들 석주가 끌려가던 날 사랑방 문을 열지 못했다는 말이 함께 남아 있었다.

수연이 사본을 꺼내자 투명한 덮개 위로 햇빛이 번졌다.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 변씨 후손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자 그가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남자를 불러 주었다.

 

남자는 다가와 어느 집안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저희 집안이 변씨 집안, 특히 변한필이라는 분과 인연이 있었다고 전해져요. 칠현의 후손들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인연이었는지 궁금해서 와 봤습니다.”

그는 수연이 내민 사본을 받아 변한필과 변석주의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변무진(邊武鎭)에서는 손을 멈췄으나 아는 이름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이 이름들은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외할머니가 남긴 공책에 있었어요. 집안에서 전해 들으신 이야기를 적어 놓으셨는데, 저희가 아는 이름도 있고 처음 보는 이름도 있어서요.”

남자는 앞뒤의 글을 더 읽다가 한결의 이름을 짚었다.

 

“이분은 성이 이씨군요.”

“네. 이원복 어른의 아들입니다. 저희 어머니의 친할아버지세요.”

수연은 어떤 인연으로 우리집안에서 무진의 생가를 한결 할아버지가 매입해 무진의 동생인 순임에게 넘겼고, 지금도 그의 후손들이 돌본다고 전해진다는 말을 덧붙였다.

남자는 집이 있는 곳을 물은 뒤 사본의 귀퉁이에 지명을 적었다.

“변한필이라는 분과 어떤 사이였는지는 적혀 있습니까?”

“그 대목을 더 알아보고 싶어요. 공책에 남은 이름들이 문중 기록에도 있는지 확인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어머니가 수연 곁으로 조금 다가섰다.

“저희도 자세히 아는 건 없어요. 엄마가 남긴 걸 보고 궁금해져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남자는 종이를 다시 살피며 문중 자료를 찾아봐야겠다고 했다. 수연은 연락처를 받아 봉투 뒤에 적었고, 어머니는 돌려받은 사본의 처진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칠현사 65%.png

 

사당 앞에서 사람들을 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제례를 맡은 사람이 후손들에게 앞으로 나와 서 달라고 하자 남자는 옷깃을 여미고 두 사람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는 인사를 건넸다.

수연은 사본을 봉투에 넣고 가방을 닫았다. 어머니와 함께 의자 곁에 서서 사람들이 자리를 맞추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늦게 도착한 사람이 줄 끝으로 들어갔고, 누군가 옆자리를 조금 내주었다.

 

수연은 어머니의 발밑에 놓인 작은 돌을 신발 끝으로 밀어냈다.

밤비에 젖었던 흙은 볕이 드는 곳부터 마르고 있었다. 향 연기는 잠깐 위로 오르다가 바람을 따라 제상 옆으로 흘렀고, 옷자락이 가지런해지는 동안 사람들의 목소리도 잦아들었다.

칠현의 충절을 기리는 말이 들렸다. 고려가 무너진 뒤에도 새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일곱 선비. 수연은 고개를 숙인 후손들의 등을 보았다. 양복 어깨가 넓은 사람과 등이 굽은 사람, 머리가 희어진 사람과 아직 검은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변귀수의 이름이 불리자 어머니가 수연의 팔을 조금 세게 잡았다. 수연은 그 손을 덮었고, 앞에 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자 두 사람도 뒤에서 함께 고개를 숙였다.

가방 속 공책에는 무진이 집을 떠났을 때 스물여섯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동백과 원복이 거두어 산으로 옮긴 몸에는 머리가 없었다. 동백은 무진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한 채 묻어야 했다. 이름을 부르면 돌아보던 얼굴,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한 얼굴이었다.

묻기 전에 흙을 닦아 줄 수도, 눈을 감겨 줄 수도 없었다. 수연의 팔 안쪽에서 어머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수연은 어머니의 손가락 사이를 감쌌고, 어머니는 앞사람들이 몸을 일으킨 뒤에도 잠깐 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처마 끝에 남아 있던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돌 위에서 부서졌다.

 

제례가 끝나자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사람들이 다시 모였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후손들은 사당 앞 계단으로 올라와 달라고 하자 수연은 어머니 쪽으로 돌아섰다.

“엄마, 이제 앉으세요. 오래 서 계셨어요.”

어머니는 계단 쪽을 한 번 보고 수연의 팔을 잡았다. 수연은 의자까지 걸음을 맞추어 갔고, 어머니가 무릎을 굽혀 앉는 동안 팔을 받쳐 주었다.

“여기서는 다 보이네.”

수연은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 물을 따랐다. 어머니는 두 손으로 컵을 감싼 채 계단 위를 바라보았다.

 

한 노인이 줄을 맞추다 비틀거리자 곁의 사람이 팔을 잡았다. 앞을 보라는 말이 들렸지만 그는 노인의 발이 제대로 놓였는지 살핀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사람들이 어깨를 붙였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 손을 들어 숫자를 셌다.

수연은 어머니 곁에 앉았다.

“스물여섯 살 무진이도 충절을 지킨 사람이었을까.”

어머니의 물음에 수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임금님을 위해 갔다는 말은 공책에 없었지?”

“배고픈 사람들 이야기가 더 많았어요.”

어머니는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계단 위의 사람들을 다시 보았다.

“그럼 그 사람들한테 마음을 다한 거겠네.”

 

사진 촬영을 마친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왔다. 한 사람은 휴대전화를 받으며 내일 아침에는 돌아가겠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벗어 두었던 겉옷을 찾아 어깨에 걸쳤다.

어머니가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변귀수 옹이며 칠현들은 벼슬을 버리고 이 산속으로 들어오셨는데, 후손들은 다시 도시로 나가 살았구나.”

수연은 아까 들었던 가게와 직장, 하루 비워 두고 온 일터를 떠올렸다.

“저도 내일 돌아가면 다시 출근해야죠.”

“그래. 그분들은 산에 남으셨지만, 우리는 돌아가 살아야지.”

어머니는 빈 컵을 수연에게 건넸다. 컵 바닥에 남은 물이 햇빛 속에서 잠깐 흔들렸다.

 

잠시 뒤 재성이 행사장을 찾아왔다.

정선에 온다는 연락을 받고 시간을 맞춰 나온 것이었다. 머리는 거의 희어졌고, 예전보다 말 사이의 숨이 길어져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보자 가까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

“누님,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야. 우리도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어.”

재성은 수연에게도 인사를 건넨 뒤 가방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때 자료는 잘 가지고 있니?”

 

수연이 원복의 장부 사진을 꺼내 보여 주자 재성은 봉투에 적힌 촬영 날짜부터 살폈다.

“이것도 벌써 이렇게 됐구나.”

“원본은 괜찮아요?”

“집안에서 가지고 있어. 자주 펴 보지는 못하고.”

그는 한결의 신발값과 약값이 떨어져 적힌 페이지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쓰고 사진을 조금 멀리했다가 당기는 동안, 수연은 봉투를 펼쳐 든 채 기다렸다.

 

재성은 사진을 봉투에 넣어 돌려주었다.

스물여덟 해 전 철물점의 난로 앞에서 나누었던 말은 꺼내지 않았다. 수연은 그가 장부 모서리에 놓아 주었던 천에 싼 쇳덩이를 떠올리며 봉투를 받아 넣었다.

세 사람은 식사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어머니가 의자를 당기는 동안 재성이 가방을 받아 빈 의자 위에 놓았고, 수연은 제 가방을 발치에 내려놓았다.

맞은편 사람이 어느 집안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수연은 어머니를 한 번 보고 대답했다.

“저희 집안이 변한필이라는 분과 인연이 있었다고 해서요. 어떤 인연이었는지 궁금해서 와 봤습니다.”

맞은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수연은 의자를 식탁 가까이 당겼다. 원복과 한결의 이름은 꺼내지 않았고, 어머니도 더 보태지 않았다.

 

재성이 어머니 앞의 국그릇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

“누님, 큰집 조카들은 잘 있지요?”

“잘 있어. 원복 어른 제사는 걔들이 모시고 있고.”

“지난번 문중 제사에도 왔어요. 상 차릴 때부터 거들고 끝까지 있다 갔고요.”

어머니는 국그릇을 당기다가 재성을 보았다.

“그래? 와서 그 얘기는 안 하던데.”

“끝나고 한결 큰할아버지 얘기도 했어요. 다음에는 누님도 모시고 오겠다고 하던데요.”

“오빠 있을 때는 나도 따라갔는데, 요새는 애들만 보내게 되네.”

 

재성은 물잔을 채운 뒤 수연 쪽에도 주전자를 기울였다. 수연은 잔을 두 손으로 받았다. 어머니는 식탁 모서리에 놓인 가방을 빈 의자 안쪽으로 조금 밀어 넣었다.

“네가 여기 있으니까 오면 만날 사람이 있네.”

어머니가 말하자 재성은 가볍게 웃으며 숟가락을 집었다.

“누님도 가끔 와요. 이렇게 큰 행사 있을 때만 오지 말고.”

“그러려고 해도 잘 안 되네.”

“오늘은 왔잖아요. 국 식겠어요. 어서 드세요.”

 

어머니가 숟가락을 들자 수연도 밥그릇을 당겼다.

아침부터 무엇을 설명할지 생각하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밥이었다. 국의 김이 얼굴 가까이 올라와 수연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한 숟가락을 넘겼다.

식탁 끝에서 반찬이 건너왔다. 처음 만난 사람들의 손을 거쳐 어머니 앞까지 온 접시를 수연이 받아 놓았다. 어머니는 먹을 만큼 덜고 다시 옆 사람에게 건넸다가, 수연의 밥그릇을 보더니 덜어 놓은 반찬 한 점을 딸의 밥 위에 얹어 주었다.

 

식사를 마친 뒤 수연은 아까 이야기를 나누었던 남자를 찾아갔다. 그는 돌아갈 채비를 하다가 두 사람을 보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변씨 문중 족보를 볼 수 있을까요? 아까 보여 드린 이름들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변한필이라는 분부터 찾아보면 되겠습니까?”

“네. 변석주와 변무진이라는 이름도 함께 적혀 있어요. 그분들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알면 저희 집안과의 인연도 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머니는 봉투의 벌어진 입구를 눌러 주며 말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한번 보고 싶습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부탁드릴게요.”

남자는 문중에서 족보를 가진 사람을 알아보고, 이름이 있는 부분을 찾으면 복사해서 보내 주겠다고 했다. 수연은 봉투 뒤에 적힌 연락처를 보여 주었고, 어머니도 곁에서 함께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는 길에 수연은 걸음을 늦췄다.

“엄마, 더 말씀드릴 걸 그랬을까요?”

어머니는 곧 대답하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수연이 든 봉투로 눈길을 옮겼다.

“족보부터 한번 보자.”

수연은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어머니가 팔을 잡자 두 사람은 나란히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어디선가 정선아리랑이 들려왔다.

사람들의 말소리 사이로 길게 늘어진 가락이 건너오자 어머니가 고개를 돌렸다.

수연은 노랫말을 받아 적으려고 수첩을 꺼냈다. 첫 줄을 쓰는 동안 곁에서 어머니의 입술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은 드문드문 빠졌지만 가락은 놓치지 않았다. 외할머니가 밥을 짓거나 빨래를 개면서 흥얼거렸다던 노래였다. 어머니는 소리를 내다가 이내 입술만 달싹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 대목에서 입술이 멎었다.

 

“~잊었네.”

 

어머니는 웃었지만 귀는 여전히 노래가 들리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수연도 다음 소절을 알지 못해 펜을 든 채 기다렸다.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그 가락을 이어 불렀다. 어머니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수연은 받아 적으려던 말을 잠깐 놓치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나오지 않던 말이 이번에는 작은 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떠날 시간이 되어 수연은 수첩을 덮고 가방을 챙겼다. 어머니는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사당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기울어진 햇빛이 계단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오늘 오길 잘했어.”

수연은 팔을 내밀었다. 어머니가 그 팔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발을 나란히 놓고 허리를 펼 때까지 수연은 곁에서 받쳐 주었다. 어머니의 입술에는 아직 가락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해가 기울기 전에 두 사람은 아우라지에 들렀다.

낮 동안 걷힌 구름이 산 위로 다시 모이고 있었다.

강둑에는 그늘이 먼저 내려왔고, 햇빛이 남은 물 위에서만 잔빛이 움직였다.

비에 눌렸던 풀들이 바람을 따라 몸을 세웠다. 그 사이로 들어오는 냉기에 어머니가 옷깃을 여몄다.

멀리 걷지 않고 강이 보이는 곳에 앉았다. 수연이 겉옷을 무릎에 덮어 주자 어머니는 공책 사본을 달라고 했다.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펼쳐 무진과 원복, 그 아래의 한결을 차례로 보았다.

다음 장에는 동백이 아이를 낳고 길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동백 할머니는 한 장을 넘겨야 나오는구나.”

수연은 종이를 받아 첫 장을 다시 보았다.

남자들의 이름을 따라 정리한 줄에는 동백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길렀다는 이야기를 뒤에 길게 옮겨 두었으면서 처음 읽을 자리에는 이름조차 넣지 않았다.

수연은 봉투에서 빈 종이를 꺼냈다.

 

변무진. 이원복. 동백.

 

세 이름을 나란히 적었다.

동백의 이름 뒤에는 한동안 펜을 대고 있었다. 공책에서도 장부에서도 성은 찾지 못했다.

수연은 빈칸을 그대로 두고 그 아래에 한결과 정명, 정숙을 썼다. 끝에는 오늘 정선에 다시 온 날짜를 남겼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이름을 손끝으로 짚었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같이 왔을 텐데.”

수연은 종이를 받지 않았다. 어머니가 조금 더 보게 두었다. 얇은 종이 아래로 겉옷의 주름이 비쳤고, 바람이 불 때마다 모서리가 들렸다.

 

46-2 65%.png

 

나루에 매인 배 한 척이 물살에 흔들렸다.

밀려 나갈 때마다 밧줄이 팽팽해졌고 기슭으로 돌아오면 느슨하게 늘어졌다. 배 안에는 밤비가 조금 고여 있었다. 젖은 잎 한 장이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건 누가 물을 퍼내야겠네.”

수연은 배를 보다가 종이 위의 한결이라는 이름으로 눈을 옮겼다. 늙은 아버지를 업어 집으로 돌아온 날에도 한결은 이씨였다.

 

어머니는 이름들을 차례로 짚었다.

“이씨로 살았어도 이 사람들을 잊어야 하는 건 아니네.”

“네.”

배가 기슭 쪽으로 밀려와 가볍게 부딪혔다.

어머니의 무릎에서 종이가 미끄러지려 하자 수연이 잡아 주었다. 어머니는 구겨진 가장자리를 펴고 이름들을 다시 보았다.

차로 돌아가는 길에는 작은 돌들이 발밑에서 밀렸다.

어머니가 먼저 팔을 내주었고 수연이 잡았다. 예전 녹도의 비탈에서 자신을 붙들던 팔보다 가늘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어머니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차에 도착한 뒤에도 수연은 팔을 바로 놓지 않고 문을 열어 자리에 앉을 때까지 받쳐 주었다.

 

그날 밤 서울의 어머니 집에 돌아온 수연은 낮에 적은 이름들을 책상 위에 놓았다.

변무진. 이원복. 동백.

가방에서는 원복의 장부와 배냇저고리를 찍은 사진, 무진의 생가 사진이 차례로 나왔다. 생가의 방문 앞에는 순임의 후손이 서 있었다.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손에 창호를 붙이던 붓을 들고 있었다.

수연은 사진들을 봉투에 넣었다. 세 이름을 적은 종이는 접지 않고 공책 위에 놓았다. 열린 창문으로 버스가 멈추는 소리가 들어왔다. 문이 닫힌 뒤에도 엔진 소리가 한동안 머물다가 골목 어귀에서 멀어졌다.

 

어머니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양말을 벗고 있었다.

오래 차를 탄 탓에 발목이 부어 양말 자국이 깊었다. 한쪽을 벗고 다른 쪽으로 손을 뻗다가 잠시 허리를 폈다.

수연이 앞에 쪼그려 앉아 남은 양말을 벗겨 주었다.

 

“많이 아프세요?”

“자고 나면 괜찮아.”

베개를 다리 밑에 받쳐 주자 어머니가 천천히 몸을 눕혔다. 수연은 이불을 끌어 올려 발끝까지 덮고, 어머니 곁의 빈자리를 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같이 잘게요.”

어머니는 딸을 잠깐 바라보다가 베개를 옆으로 옮겼다.

접혀 있던 이불도 손으로 펴 주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누운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수연이 몸을 돌리자 이불이 당겨졌다. 어머니는 제 쪽의 끝을 조금 풀어 주었다.

 

불을 끄고도 커튼 틈으로 맞은편 건물의 불빛이 들어왔다.

냉장고가 낮게 울었고, 위층에서는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수연은 어머니가 불편하지 않은지 물으려다가 고개만 돌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이마와 코끝이 희미하게 보였다.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있었다.

수연은 그 얼굴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먼 도로에서 차들이 지나갔다. 정선의 물소리를 듣고 온 귀에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쓸고 가는 소리가 길게 남았다.

한동안 말이 없던 어머니가 아리랑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숨을 내쉬는 소리와 다르지 않았다. 가락이 몇 굽이를 지난 뒤에야 노랫말이 붙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수연은 다시 어머니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낮에 사당 곁에서 끊겼던 가락이 두 사람의 베개 사이로 이어졌다.

어머니는 한동안 말없이 가락만 흥얼거리다가 느린 목소리로 불렀다.

 

강 건너 불빛은 밤마다 켜지는데

우리 님 빈 배에는 이슬만 내리네.

 

끝 음이 가늘게 떨리다가 멎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어머니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커튼 틈의 불빛이 손등의 주름에 걸려 있었다.

수연은 아우라지의 배를 떠올렸다. 바닥에 고인 빗물과 그 물에 붙어 있던 잎, 배가 멀어질 때마다 팽팽해지던 밧줄이었다. 강둑에 앉았던 어머니의 무릎에서는 세 이름을 적은 종이가 자꾸 들렸다.

어머니가 다음 말을 찾는 동안 수연도 가락을 흥얼거렸다. 몇 번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 숨을 따라 나왔다.

 

돌아오지 못한 님 이름을 불러 놓고

젖은 노 거두어서 아이 밥을 짓네.

 

다 부르고 나서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머니에게 들릴 만큼 제대로 불렀는지 알 수 없었다.

이불이 작게 움직였다. 잠시 뒤 어머니가 그 말을 되풀이했다.

 

젖은 노 거두어서……

아이 밥을 짓네.

 

한 번 더 부르던 어머니가 다음 가락에 말을 보탰다.

 

밥 먹어라 아가야

식기 전에 먹어라.

 

수연은 입을 열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밖에서 놀다가 돌아오면 부엌에서 들리던 말이었다. 손을 씻고 들어가는 동안 어머니는 밥을 퍼 놓았다. 늦게 돌아온 날에는 솥에서 덜어 둔 밥그릇 위에 다른 그릇을 엎어 덮어 두었다. 수연이 뚜껑을 들면 그 안쪽에 맺힌 물방울이 밥 위로 떨어졌다.

수연은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의 손등을 찾고, 손가락 아래로 제 손을 넣었다. 피부는 얇아졌고 마디는 굵었다. 낮에 사당 뒤에서 붙들었던 손이었다.

“왜 그래?”

“그냥요.”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엄지로 딸의 손등을 천천히 쓸어 주었다. 수연은 눈을 감은 채 그 손을 잡고 있었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열쇠가 부딪히고, 현관문이 닫혔다. 냉장고의 낮은 울음도 어느 순간 멎었다.

수연은 숨을 고른 뒤 노래를 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어머니도 함께 불렀다.

박자가 조금 달랐고, 긴 음을 붙드는 숨의 길이도 같지 않았다. 수연은 어머니의 소리가 따라올 때까지 끝 음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가 숨을 쉬면 수연이 이어 부르고, 수연이 말을 놓치면 어머니가 먼저 다음 가락으로 넘어갔다.

책상 위에서 종이 귀퉁이가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낮에 적은 이름들은 어둠 속에서 읽히지 않았다.

노래가 그친 뒤 어머니가 물었다.

“그 노랫말은 어디서 들었니?”

“지금 붙였어요.”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수연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기다렸다.

“정선에서 부를 걸 그랬네.”

“여기서 불러도 되죠.”

어머니는 베개 위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뒤 다시 가락을 꺼냈다.

 

“젖은 노 거두어서…….”

 

다음 말이 나오지 않자 수연이 작게 받았다.

 

“아이 밥을 짓네.”

 

어머니는 그 소절을 끝까지 따라 불렀다. 이번에는 끝말을 조금 더 오래 붙들었다.

열린 창문으로 서늘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두 사람의 노래는 그 바람 사이로 나가 서울의 골목에 잠깐 머물렀다.

어머니의 손에서 힘이 조금씩 풀렸다. 수연은 손을 빼지 않았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흥얼거린 말은 노랫가락보다 작았다.

 

“밥 먹어라, 아가야.”

 

수연은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네, 엄마.”

 

-----------------------------------------------------

 

『녹도아리랑』을 마치며 — 이름 아래에 사람이 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도 한동안 원고를 닫지 못했습니다.

무진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동백은 젖은 노를 거두어 아이의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원복은 다시 등짐을 졌으며, 순덕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자리를 오래 지켰습니다. 연재는 여기서 마치지만, 그 사람들이 살아낸 하루는 쉽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녹도아리랑』을 쓰며 자주 멈춘 곳은 기록의 짧은 문장 앞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붙잡았다는 말, 벌을 내렸다는 말, 몇 사람이 죽었다는 말. 그 몇 줄을 읽고 나면 잡혀간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집이 궁금했습니다. 저녁밥은 누가 지었을까. 대문 밖으로 나간 아이는 누구의 손을 잡고 돌아왔을까. 죽은 사람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른 이는 누구였을까.

 

이 소설은 그 물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정선의 산과 강에 전해 오는 이름들을 따라가며, 저는 그 이름을 지키던 사람들의 끼니와 일터를 생각했습니다. 칠현의 절개를 이야기하던 집에도 먹을 보리가 필요했고, 금점과 산판에서는 일한 사람들이 품삯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무진이 품었던 뜻도 그 삶 가까이에 놓고 싶었습니다. 일한 만큼 받고, 억울한 일을 밝히고, 다친 사람을 버려두지 않는 일.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 그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바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쓰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을 따라가는 일은 더 오래 걸렸습니다.

동백은 슬퍼하는 동안에도 아이를 먹여야 했고, 원복은 어린 한결에게 신발을 사 주어야 했습니다. 족보에서 이어지지 않은 이름이 누군가의 품과 등에서 다음 세대로 건너갔습니다. 마지막에 모녀가 함께 부르는 노래까지 쓰고 나서야, 그 사람들을 조금은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 기록과 전승을 바탕으로 상상해 쓴 소설입니다.

인물의 대화와 내면, 기록의 빈 곳을 잇는 여러 장면은 창작입니다. 확인한 사실과 소설로 그려 낸 삶 사이를 살피려 애썼지만,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부족함은 쓰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마흔여섯 편을 함께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정선의 산길과 나루, 어두운 갱도와 형장, 남겨진 사람들의 방까지 함께 걸어 주셨습니다. 긴 연재를 마치고 돌아보니, 이야기를 끝까지 써 낸 기쁨만큼 그 길을 함께 와 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 큽니다.

 

무진과 동백, 원복과 순덕이 저마다 살아 있던 얼굴로 잠시라도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머물렀다면, 이 연재를 쓴 보람은 충분합니다.

원고를 덮으며 저는 마지막 노랫말을 다시 읽습니다.

 

“젖은 노 거두어서 아이 밥을 짓네.”

 

그 밥을 먹고 자란 아이가 누군가를 업고, 그 뒤의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팔을 받쳐 주며 오늘까지 왔습니다. 『녹도아리랑』을 마치는 지금,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그렇게 서로를 데리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

 

부록|정선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동학운동사

 

정선(旌善)은 동학농민혁명의 전투와 희생만으로 기억할 지역이 아니다. 탄압으로 흩어진 교도들이 몸을 숨기고, 최시형(崔時亨)이 교단을 다시 세우며 가르침을 전한 재건의 거점이었다. 남면 문곡리의 무은담(霧隱潭)과 갈래산 적조암(寂照庵)은 그 역사를 보여준다.

갑오년(甲午年·1894년)에는 정선과 인접 고을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관아를 점령하였으며, 여량(餘糧)과 녹도에서는 진압과 희생이 이어졌다. 정선은 동학의 재건과 확산, 농민항쟁과 그 이후의 탄압을 함께 살펴보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1. 주요 연표

 

※ 월일은 별도 표시가 없는 한 음력이다. 지명은 당시 명칭을 기본으로 하되 현재 지역명을 함께 사용하였다. 당시 행정구역은 오늘날과 달라, 현재 정선·평창·홍천에 속하는 일부 지역이 강릉의 관할에 포함되어 있었다.

 

1860년

경주(慶州)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하였다.

 

1863년

8월 경상도 해월(海月) 최시형이 최제우에게 도통을 계승하여 동학 제2대 교주가 되었다.

 

1864년

최시형은 관헌의 추적을 피해 태백산(太白山) 일대 등 각지를 옮겨 다니며 교도들을 결속하고 교단 재건을 추진하였다.

 

1868년

최시형의 포교 활동이 양양(襄陽) 등 강원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산간 마을들이 피신과 포교의 거점이 되었다.

 

1871년

이필제(李弼濟)의 영해 봉기 이후 탄압이 강화되었다. 최시형은 영월·정선·인제 등 강원도와 충청도 산간 지역에서 교단의 기반을 다시 마련하였다.

 

1872년

최시형과 동학 지도자들이 정선 남면 문곡리(文谷里) 무은담에 있는 유시헌(劉時憲)의 집을 동학 포교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무은담은 피신과 비밀 포교, 교단 재건의 주요 장소가 되었다.

 

1872∼1873년

정선 갈래산 적조암에 최시형과 교도들이 수련하였다. 유시헌의 집을 중심으로 식량 등이 조달되었다. 입산 연도는 관련 기록에 차이가 있다.

 

1880년 인제

최시형이 경전 인쇄소를 설치하고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였다.

 

1888년

인제의 인제접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다시 간행하였다.

 

1892∼1893년

삼례·서울·보은에서 동학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강원도 교도들도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고부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지방관의 수탈에 맞서는 개혁 운동과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쟁으로 확대되었다.

 

1894년 여름∼가을

원주·영월·평창·정선지역 동학의 접 조직과 농민군의 활동이 확대되었다. 관군 문서에도 이들 지역에서 동학 세력이 성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894년 9월 4일

강릉·정선·평창·영월 등지의 농민군이 강릉 읍내에 진입하여 관아를 점령하였다. 농민군은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1894년 9월 7일

민보군의 기습 공격으로 농민군이 강릉에서 물러났다.

 

1894년 9월 18일

동학교단최시형이 기포를 지시하였다. 강원도에서는 이에 앞서 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894년 10월 하순

정선 읍내에 정선·영월·평창의 농민군이 제천·청주 지역 농민군과 연합하여 정선 관아를 습격·점령하였다. 군수는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임영토비소록』에는 이 과정에서 이방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4년 가을

관아 점령 전후 정선 읍내 『동비토론』에는 정선 읍내에 농민군 3천여 명이 모였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는 당시 정선이 강원 남부와 인접 지역 농민군의 주요 집결지였음을 보여준다.

 

1894년 10월 21∼22일

홍천(洪川) 장야촌·풍암리에서 홍천 농민군이 관군·포군과 전투를 벌였다.

 

1894년 10월 하순∼11월

강릉에서 출동한 진압군이 평창 봉평·홍천 내면에서 온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산간 지역에서 저항하였으나 여러 방향에서 들어온 진압군에 밀렸다. 1894년 11월 3일평창 대화 일대에 일본군이 도착해 관군과 합세하였다.

 

1894년 11월 5일

평창 후평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패한 농민군 일부는 정선 등지로 이동하였다.

 

1894년 11월 6일

진압군이 정선으로 들어와 정선 읍내·여량에 산재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여량의 접소와 지도자들의 집이 불탔으며, 체포와 추격이 이어졌다.

 

1894년 11월

정선 녹도. 정선으로 물러난 농민군이 일본군과 감영군의 공격을 받았다. 녹도는 농민군의 전투와 처형이 전해지는 장소다. 정확한 전투일과 전체 희생자 수는 단정하기 어렵다.

 

1894년 11월 22일

강릉 『임영토비소록』에 따르면 차기석(車箕錫)·박학조(朴學祚)가 처형되었으며, 여량 농민군 지도자 이중집(李仲集) 등도 살해되었다.

 

1894년 11월 25일

정선·강릉 관할 지역. 여량 농민군 지도자 지왈길(池曰吉)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동비토론』의 다음 날 보고에 처형 사실과 날짜가 남아 있다.

 

1894년 겨울∼1895년 초

정선 및 인접 지역 지도자와 잔여 농민군에 대한 수색·체포가 계속되었다. 유시헌의 가족들도 탄압을 겪었다. 아들 유택하는 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된 뒤 탈출하였으며, 『동학난중기』를 남겼다.

 

1895년 1월 7일

일본군이 해를 넘겨서도 정선에 주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관문이 작성되었다. 주둔군을 위해 쌀과 반찬을 보내고 진영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7년

동학교단 최시형이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1898년

최시형이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처형되었다.

 

※기록을 읽을 때 유의할 점

 

정선에 집결한 3천여 명은 관군의 정탐 보고에 나타나는 추산 인원이다.

이를 녹도 한 곳에 모인 병력이나 전사자 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또한 관아 점령 당시의 폭력에 관한 기록은 진압 측에서 작성한 사료라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지왈길의 처형일은 사료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 연표는 처형 다음 날 작성된 『동비토론』의 보고에 따라 음력 11월 25일로 표기하였다. 양력으로는 1894년 12월 21일이다.

 

2. 정선 동학운동의 주요 유적지

 

▲무은담(霧隱潭) — 교단 재건과 비밀 포교의 거점

정선군 남면 문곡리에 있던 유시헌의 집터이다. 유시헌은 본래 유인상으로 불렸으며, 최시형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교단 재건을 도왔다. 무은담은 지도자들이 잠시 몸을 숨긴 장소를 넘어 교도들이 모이고 수련과 포교를 이어간 거점이었다. 현재의 집터는 정선이 동학의 재건 과정에서 맡았던 역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갈래산 적조암(寂照庵) — 탄압 속에서 가르침을 이어간 수련터

갈래산의 적조암은 최시형과 동학 지도자들이 수련한 곳이다. 이필제의 봉기 이후 교단이 심한 탄압을 받던 시기, 이들은 산중에서 기도와 수련을 이어가며 재건의 기반을 다졌다. 무은담에서 식량을 조달했다는 기록은 산중의 수련이 지역 교도들의 도움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입산 연도와 세부 일정에는 기록상의 차이가 있으므로, 특정 날짜를 확정하기보다 1870년대 초 동학 재건의 수련터로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다.

 

▲싸내 — 수운의 유족을 품었던 피신처

정선군 화암면(畵岩面) 화암리의 싸내는 최제우의 부인 박씨가 피신하여 말년을 보낸 곳으로 전한다. 지도자의 죽음 뒤에도 남은 가족을 돌보았던 교도들의 삶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무은담과 적조암이 교단 재건의 역사를 전한다면, 싸내는 탄압 속에서 유족의 생계를 보살피고 서로 의지했던 역사를 전한다.

 

▲여량(餘糧) — 지왈길·이중집과 농민군의 활동 지역

여량은 지왈길과 이중집 등이 이끄는 농민군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다. 1894년 진압 과정에서 접소와 지도자들의 집이 불탔고, 체포와 처형이 이어졌다. 여량의 동학 역사는 한 건물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접소 터, 인접 지역으로 이어지는 활동 경로를 함께 살펴야 하는 역사이다.

 

▲녹도 — 전투와 집단 희생이 전해지는 장소

정선 읍내 조양강(朝陽江) 주변의 옛 녹도는 동학농민군의 전투와 처형이 전해지는 곳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이곳을 ‘정선 애산리 녹도 동학농민군 전적지’로 소개한다.

후평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정선에서 다시 공격받았으며, 녹도 둔치의 소나무숲에서 포로들이 처형되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다만 당시 섬의 범위와 교전·처형 지점을 현재의 지형에 정확하게 대응시키는 데에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정선 관아 터 — 농민군이 지방 권력에 맞섰던 현장

1894년 10월 하순 농민군이 습격·점령한 정선 관아는 정선 항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장소이다. 농민군의 집결과 관아 점령은 정선의 동학운동이 은신과 포교의 단계를 넘어 지방 통치 질서에 직접 맞서는 항쟁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관공서 위치를 당시 관아의 정확한 경계와 동일하게 보지는 않아야 한다.

 

3. 주요 참고자료

 

자료 저자·성격 참고할 내용

 

『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오횡묵(吳宖默)의 정선군수 재임 기록

1887년 3월부터 1888년 8월까지의 지방 행정, 광산 개발, 세금과 민폐, 재해와 진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1894년 항쟁의 직접 기록이 아니라, 그 이전 정선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이해하는 자료이다.

정선문화원의 『국역 정선총쇄록』.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유시헌의 아들 유택하(劉澤夏)의 기록

농민혁명 참여와 체포·탈출, 탄압 속에서 겪은 고초를 전하는 자료이다. 정선 동학 지도자와 가족의 경험을 살펴보는 데 중요하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동비토론(東匪討論)』

강원도 농민군 진압 관련 공문서 모음. 정선 농민군 3천여 명의 집결, 후평 전투, 농민군 추격, 지왈길의 처형, 일본군 주둔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진압 측의 시각과 표현을 고려하여 읽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

강릉의 농민군 진압 경과를 서술한 기록이다.

강릉 관아 점령과 퇴각, 정선 관아 점령, 여량 공격, 이중집 등의 처형을 살펴볼 수 있다. 사건의 날짜와 평가는 다른 사료와 대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원기서(道源記書)』 및 동학·천도교 교단사 자료 초기 동학과 교단 재건에 관한 기록최시형의 활동, 교도들의 피신과 수련, 무은담 등 포교 거점의 역사를 살펴보는 자료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유적지·참여자 자료유적 조사 및 참여자 관련 자료

무은담·녹도 등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 유택하를 비롯한 참여자의 행적을 확인하는 데 참고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소설 속 창작 인물과 대화, 세부 전투 장면은 이 연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유적지는 현존 건축물뿐 아니라 집터·활동 지역·전적지·전승 장소를 함께 가리킨다.

ⓒ 정선신문 & jsweek.net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전체댓글 0

추천뉴스

  • 강원랜드 한가위 전통시장 찾아 지역상권 활성화 나서
  • 추석 연휴에도 정선 관광시설 문 활짝
  • 정선군 목재문화체험장 인기
  • “농어촌 기본소득 바람·사전투표 압승…최승준 징검다리 4선 견인”
  • 최승준 민주당 후보 정선군수 당선 확정
  • 공연 보면 케이블카 반값… 정선형 ‘문화관광 패키지’ 뜬다
  • 최승준 정선군수 후보, 막판 표심 공략 총력…“129 민간구급차 지원 추진”
  • 차 한 잔의 행복 - 달팽이 뿔 위 에서 의 싸움
  • 정선군 예미농공단지 공공폐수처리시설 2단계 증설
  • 강원랜드, 태백진로박람회서 청소년 도박예방 캠페인 전개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연재소설|녹도아리랑 ㊻] 끝내 부르지 못한 노래 -끝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