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연재를 시작하며
갑오년(甲午年·1894년) 가을, 정선에 동학농민군(東學農民軍) 3천여 명이 모였다.
당시 강릉부사 이회원(李會源)이 강원감영과 주변 관아 등과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동비토론(東匪討論)』의 정탐 보고에 남아 있는 기록이다. 정선·영월·평창의 농민군은 제천·청주 등지의 농민군과 연합해 정선 관아를 점령했다. 잘못된 정사를 바로잡고 백성이 살아갈 길을 찾으려는 항쟁이었다.
왜 산골 정선에 수천 명이 집결했을까.
그 배경을 살피려면 갑오년에서 20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72년, 동학의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崔時亨)은 정선 남면 문곡리 무은담(霧隱潭)의 유시헌(劉時憲) 집으로 피신했다. 무은담은 이후 비밀 포교의 거점이 됐다. 같은 해 겨울에는 영월·정선·단양 지역 교도들이 갈래산 적조암(寂照庵)에 모여 수련하며 결속을 다졌다.
탄압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다시 만나 가르침을 지키고 교단을 재건한 것이다. 이러한 결속은 훗날 농민군이 집결하는 배경이 됐다.
2026년은 무은담에서 교단 재건과 포교 활동이 이어진 1872년 무렵으로부터 154년이 되는 해다. 녹도아리랑은 그 역사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눈을 돌린다.
항쟁에 나선 사람들에게는 돌아가야 할 집이 있었다.
봄에 심으려고 남겨 둔 씨앗과 아직 어린 자식, 저녁이면 문밖을 살피는 가족이 있었다.
그들이 무엇을 견디다가 끝내 집을 나섰는지, 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가르침이 굶주린 살림 속에서 어떤 뜻이 되었는지를 묻고 싶었다. 녹도아리랑은 그 물음에서 시작한 역사소설이다.
기록에 남은 숫자 속에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과, 돌아오지 않는 이를 기다린 가족들의 삶을 만나고자 한다.
제1부 ― 목 없는 섬
갑오년 겨울, 녹도에는 머리 없는 사람들이 누워 있었다.
몸은 자갈밭에 버려져 있었고, 머리는 소나무숲 사이 장대 끝에 매달려 있었다.
얼굴들은 강 건너 정선읍을 향하고 있었다. 읍으로 들어오는 사람도, 장터로 가는 사람도 고개를 들면 그 얼굴들을 보아야 했다.
얼어붙은 머리에 흰 서리가 내려앉았다.
머리카락이 희게 세었고, 감기지 않은 눈에는 눈가루가 고여 있었다.
바람이 불면 얼굴들이 옆으로 기울었다가 새끼줄에 붙들려 다시 마을 쪽으로 돌아왔다. 밤새 그 눈을 덮어줄 손은 오지 않았다.
자갈밭에는 눈이 쌓였다.
어깨와 가슴, 등 뒤로 묶인 손목이 잠기고 헤진 저고리와 터진 살이 가려지자, 한때 그들은 모두 잠든 사람처럼 보였다.
새벽녘, 조양강을 건너온 바람이 갈대의 마른 허리를 꺾었다.
얼어붙은 잎들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시신 위의 눈도 밀려났다. 잘린 목이 드러나고, 들린 옷자락 아래 총탄이 뚫고 지나간 살이 드러났다.
바람이 잦아들자 옷은 몸 위로 내려앉았으나 걷힌 눈은 돌아오지 않았다.
강은 아직 다 얼지 않았다.
가장자리에는 얇은 얼음이 붙었고, 가운데로는 검은 물살이 흘렀다. 살얼음 조각들이 섬 끝에 부딪쳐 깨지고, 물가에 걸린 옷자락 아래로 찬물이 들었다 빠져나갔다. 그때마다 천만 조금씩 움직였다.
피는 자갈 사이로 스며들어 검붉게 얼었고, 소나무의 드러난 뿌리까지 물들였다.
젖은 흙냄새와 피비린내에 화약 냄새가 섞여 시신들 위를 낮게 맴돌았다.
녹도(綠島)는 푸른 섬이라는 뜻이었다.
조양강 한가운데 길게 누운 작은 섬이었다. 여름이면 소나무들이 물 위에 짙은 그늘을 드리워, 멀리서 보면 흰 물살 위에 푸른 배 한 척이 떠 있는 듯했다.
그해 겨울에도 솔잎은 푸르렀다.
소나무 아래에는 짚신 한 짝이 발이 빠져나간 모양 그대로 얼어 있었다. 곁에는 엽전 두 닢과 금이 간 은비녀, 마른 콩 몇 알이 흩어져 있었다. 바람에 콩 한 알이 자갈 사이를 구르다 묶인 손 곁에서 멎었다. 손가락을 펼 수 있었다면 집을 수 있는 거리였다.
아침이 되자 강 건너 정선읍의 지붕들 사이로 밥 짓는 연기가 올라왔다. 한 집에서 피어난 연기 곁으로 다른 집의 연기가 솟았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와 마당의 눈을 쓸어내는 소리가 희미하게 건너왔다.
장대의 얼굴들은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볕이 닿은 눈썹에서 서리가 녹았고, 물방울 하나가 뺨을 따라 내려와 턱 아래에서 다시 얼었다.
자갈밭에서는 아무도 몸을 돌리지 않았다.
그날 낮에도 섬으로 건너오는 사람은 없었다.
산그늘이 강을 덮고 마을의 불빛마저 하나둘 꺼진 뒤에야 갈대 아래로 배 한 척이 다가왔다.
머리들이 장대 끝에 내걸린 지 사흘째 되던 밤이었다.
배에는 동백(冬柏)과 이원복(李元福)이 타고 있었다.
동백은 아우라지에 올동박이 유난히 많이 열린 해에 태어나 그 이름을 얻었다.
원복은 무진보다 세 살 많은 보부상이었다. 큰물에 휩쓸렸을 때 무진에게 목숨을 빚졌고, 무진이 붙잡히던 날에는 그를 구하지 못했다.
장날마다 등짐을 싣고 건너던 강을, 그날 밤에는 무진을 찾으러 건너왔다.
배가 얼음 가장자리를 밀고 들어가자 얇은 판이 부서져 뱃전 아래로 잠겼다.
원복은 노를 거두고 초소를 살폈다. 멀리 횃불 하나가 움직였다. 동백도 몸을 낮췄다. 불빛이 돌아선 뒤에야 그는 삿대로 바닥을 짚어 배를 기슭에 붙였다.
동백은 배에서 내리다 물에 발을 적셨다.
찬물이 짚신을 뚫고 발가락 사이를 채웠다. 뱃전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으나 소리는 내지 않았다.
물에서 발을 빼 자갈밭에 디디자 젖은 버선이 달라붙고 치맛자락이 종아리를 차갑게 감았다.
원복은 배를 소나무 그늘에 묶고 매듭을 당겨 확인했다.
“해 뜨기 전에 돌아가야 하네.”
동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몸은 이미 자갈밭 쪽으로 가고 있었다.
주검들 사이에서는 어디를 디뎌도 손과 발이 있었다.
두 팔을 벌린 사람 곁에 다른 사람이 엎드려 있었고, 서로의 다리를 깔고 포개진 몸들도 있었다. 자갈 사이에 언 피가 짚신 밑에서 바스러졌다.
동백은 걸음을 멈추고 강 건너를 보았다. 횃불은 초소 가까이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발을 옆으로 옮겨 눈 쌓인 자갈을 밟았다.
포승줄은 얼어붙은 손목의 살을 파고들었다.
손등은 퉁퉁 부어 자줏빛을 띠었고, 굽은 손가락 사이에는 눈이 끼어 있었다. 한 사람은 옆 사람의 소매를 움켜쥐고 있었다. 쓰러지는 이를 붙든 것인지, 제 몸이 넘어가지 않으려고 매달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또 다른 사람은 땅을 한 움큼 쥐고 있었다. 깨진 손톱 밑에 흙과 자갈이 박혀 있었다.
동백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손가락을 펴주려 했으나 얼어붙은 마디는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으로 감싸고 입김을 불었다. 흰 숨이 손등을 스치고 흩어졌다. 몇 번을 더 불어도 손은 펴지지 않았고, 그 손을 감싼 동백의 손가락부터 굳어갔다.
그녀는 쥔 흙을 빼내지 못한 채 소매를 당겨 덮어주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가 무릎으로 눌렀던 눈 위에 가루눈을 흩뿌렸다.
소나무숲에서는 장대들이 삐걱거렸다.
동백은 소리가 나는 쪽을 보지 않았다. 장대에 매달린 얼굴 하나가 무진의 것일지 몰랐다.
그래도 먼저 몸을 찾아야 했다.
그가 입던 옷, 노를 잡던 손, 강가의 돌에 정강이를 부딪쳐 남긴 흉터가 이곳 어딘가에 있었다.
그녀는 시신을 하나씩 뒤집었다. 혼자 움직이기 어려운 몸은 원복이 어깨를 받쳐주었다. 피에 굳은 저고리를 살피고, 바짓단을 기운 실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의 굳은살도 만졌다.
그녀가 찾고 있는 사람은 정혼자 변무진(邊武鎭). 스물여섯 살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무진은 강물이 풀리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말했다. 봄이 오면 감자를 심고, 새 나무비녀를 깎고, 혼례를 치르자고 했다.
동백은 그날 무진이 건넨 비녀를 머리에 꽂아보았다. 몇 걸음 걷자 비녀가 흘러내렸다.
무진은 돌아오면 머리에 꼭 맞게 다시 깎아주겠다고 했다.
동백은 또 하나의 몸을 뒤집었다. 무진이 아니었다.
그녀는 안도의 숨을 쉬려다 멈췄다.
다른 누군가의 아들이었다. 그를 기다리는 집에는 아직 아궁이의 불씨가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동백은 바람에 젖혀진 저고리를 여며주고 다음 사람에게로 옮겨갔다.
그다음 몸은 너무 작았다.
열대여섯이나 되었을까.
좁은 어깨에 걸친 저고리가 헐거웠고, 긴 소매가 손등을 덮고 있었다. 동백이 소매를 걷자 굳은살조차 깊이 박이지 않은 손이 나왔다. 손가락 사이에는 작은 버선 한 짝이 끼워져 있었다.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피에 젖고 발에 밟혀 모양은 일그러졌지만, 뒤꿈치에 덧댄 헝겊과 성긴 바느질 자국은 남아 있었다.
집에 두고 온 동생의 것인지, 누군가에게 가져다주려던 것인지 동백은 알 수 없었다.
버선을 꺼내려고 소년의 손가락에 손을 댔다가 그만두었다.
손은 버선을 쥔 채 얼어 있었다. 억지로 펴면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았다.
동백은 자기 손으로 소년의 부은 손등을 감쌌다. 그녀의 손에도 온기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미안해.”
잠시 그렇게 있다가 흘러내린 소매로 버선 쥔 손을 덮어주었다.
강 건너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동백이.”
원복이 다급하게 초소 쪽을 가리켰다. 아까보다 횃불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있었다. 순찰하는 군사가 강가로 나오는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찾아봐요.”
동백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시신을 밟지 않으려고 발을 돌리면 다른 사람의 손이 나왔고, 물러서면 눈 아래 묻힌 다리에 걸렸다.

원복이 앞서 눈을 털어 길을 살폈다.
동백은 한 사람씩 지나갔다. 어느 몸을 보았고 어느 몸을 지나쳤는지 잊어버릴까 두려웠다.
바람이 불어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이 쏟아졌다. 동백은 눈썹에 붙은 눈가루를 털다가 장대 위에서 흔들리는 머리들을 보았다.
곧 고개를 내렸다. 무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녀가 기억하는 무진은 웃을 때 왼쪽 눈가가 먼저 접혔다. 노를 저으며 강물의 깊이를 살필 때면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혼례 이야기를 꺼낸 날에는 정작 동백과 눈을 맞추지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았다.
동백은 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다.
다시 몸 하나를 뒤집었을 때, 눈 아래에서 회색 무명저고리가 나왔다.
왼쪽 소매 안쪽에 검은 실밥 세 땀이 박혀 있었다.
지난가을 동백이 기워준 자리였다. 마지막 땀을 너무 세게 당겨 천이 조금 오그라져 있었다. 무진은 그때 저고리를 입은 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자꾸 강 쪽을 돌아보았다.
동백이 움직이지 말라며 그의 어깨를 한 번 쳤다.
그녀의 손이 소매 위에서 멎었다.
검은 실은 피와 눈에 젖어 있었으나, 오그라진 자리는 그대로였다. 동백이 손톱으로 실밥을 건드렸다. 언 천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숙여 바짓단을 걷었다. 정강이에 비스듬히 팬 흉터가 있었다. 강가의 돌에 부딪쳐 살이 벌어졌던 자리였다.
동백은 바짓단을 내려놓았다.
“무진 씨…….”
입술에서 나온 이름이 바람에 흩어졌다.
동백은 무릎으로 자갈밭을 기어가 저고리의 소매를 다시 쥐었다. 원복이 다가왔으나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지 못했다.
“돌아오신다면서요.”
동백은 무진의 목이 있어야 할 곳을 보지 않으려고 소매의 검은 실만 바라보았다.

자신의 손으로 당긴 세 땀이 거기 남아 있었다.
돌아오면 다시 깎아주겠다던 비녀는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비녀가 헐거운 머리칼 사이에서 흔들렸지만, 동백은 그것을 바로 꽂을 손을 뗄 수 없었다.
강 건너 초소의 횃불이 다시 움직였다.
원복이 배 쪽을 돌아보았다.
동백은 저고리의 소매를 놓지 않은 채 무진 곁에 앉아 있었다.
눈이 두 사람의 어깨에 함께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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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주(註)
이 작품은 1887년부터 1888년까지 정선군수를 지낸 오횡묵(吳宖默)의 『정선총쇄록(旌善叢瑣錄)』, 동학 지도자 유시헌(劉時憲)의 아들 유택하(劉澤夏)가 남긴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 『동비토론(東匪討論)』·『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 등의 사료와 지역 전승을 바탕으로 구성한 역사소설이다. 『정선총쇄록』은 항쟁에 앞선 정선의 사회·경제적 형편을 살피는 자료로 참고하였다.
유시헌·최시형·성두환·유도원·지왈길·유택하는 실존 인물이며, 무은담·적조암·강릉 관아·애산리 녹도는 실제 역사와 연결된 장소다. 변무진·동백·이운백·장익수와 그 가족은 창작 인물이다.
칠현의 후손이 정선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다는 설정, 녹도에 수백 구의 시신이 남겨진 장면, 창작 인물들의 체포·처형과 시신 수습 과정은 사료와 지역 전승을 참고해 상상으로 구성하였다.
정선에 집결한 3천여 명은 당시 보고에 나타나는 추산 인원으로, 녹도의 희생자 수를 뜻하지 않는다.
소설은 기록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봄에 심을 씨앗까지 내주고 죽은 가족의 군포를 대신 내던 사람들이 끝내 집을 나선 까닭을 묻고, 녹도로 향한 이들과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 가족들의 시간을 되살리고자 했다.
녹도는 본래 조양강 가운데 있던 섬이었다.
다리가 놓이고 부지가 확장되면서 육지와 이어졌고, 지금은 그 일대에 정선역과 아라리촌이 들어서 있다. 작품은 오늘의 익숙한 풍경에서 갑오년 겨울로 들어간다. 물가에서는 살얼음이 깨지고, 눈 덮인 자갈밭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누워 있다.
부록|정선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동학운동사
정선(旌善)은 동학농민혁명의 전투와 희생만으로 기억할 지역이 아니다. 탄압으로 흩어진 교도들이 몸을 숨기고, 최시형(崔時亨)이 교단을 다시 세우며 가르침을 전한 재건의 거점이었다. 남면 문곡리의 무은담(霧隱潭)과 갈래산 적조암(寂照庵)은 그 역사를 보여준다.
갑오년(甲午年·1894년)에는 정선과 인접 고을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관아를 점령하였으며, 여량(餘糧)과 녹도에서는 진압과 희생이 이어졌다. 정선은 동학의 재건과 확산, 농민항쟁과 그 이후의 탄압을 함께 살펴보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1. 주요 연표
※ 월일은 별도 표시가 없는 한 음력이다. 지명은 당시 명칭을 기본으로 하되 현재 지역명을 함께 사용하였다. 당시 행정구역은 오늘날과 달라, 현재 정선·평창·홍천에 속하는 일부 지역이 강릉의 관할에 포함되어 있었다.
1860년
경주(慶州)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하였다.
1863년
8월 경상도 해월(海月) 최시형이 최제우에게 도통을 계승하여 동학 제2대 교주가 되었다.
1864년
최시형은 관헌의 추적을 피해 태백산(太白山) 일대 등 각지를 옮겨 다니며 교도들을 결속하고 교단 재건을 추진하였다.
1868년
최시형의 포교 활동이 양양(襄陽) 등 강원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산간 마을들이 피신과 포교의 거점이 되었다.
1871년
이필제(李弼濟)의 영해 봉기 이후 탄압이 강화되었다. 최시형은 영월·정선·인제 등 강원도와 충청도 산간 지역에서 교단의 기반을 다시 마련하였다.
1872년
최시형과 동학 지도자들이 정선 남면 문곡리(文谷里) 무은담에 있는 유시헌(劉時憲)의 집을 동학 포교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무은담은 피신과 비밀 포교, 교단 재건의 주요 장소가 되었다.
1872∼1873년
정선 갈래산 적조암에 최시형과 교도들이 수련하였다. 유시헌의 집을 중심으로 식량 등이 조달되었다. 입산 연도는 관련 기록에 차이가 있다.
1880년 인제
최시형이 경전 인쇄소를 설치하고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였다.
1888년
인제의 인제접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다시 간행하였다.
1892∼1893년
삼례·서울·보은에서 동학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강원도 교도들도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고부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지방관의 수탈에 맞서는 개혁 운동과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쟁으로 확대되었다.
1894년 여름∼가을
원주·영월·평창·정선지역 동학의 접 조직과 농민군의 활동이 확대되었다. 관군 문서에도 이들 지역에서 동학 세력이 성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894년 9월 4일
강릉·정선·평창·영월 등지의 농민군이 강릉 읍내에 진입하여 관아를 점령하였다. 농민군은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1894년 9월 7일
민보군의 기습 공격으로 농민군이 강릉에서 물러났다.
1894년 9월 18일
동학교단최시형이 기포를 지시하였다. 강원도에서는 이에 앞서 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894년 10월 하순
정선 읍내에 정선·영월·평창의 농민군이 제천·청주 지역 농민군과 연합하여 정선 관아를 습격·점령하였다. 군수는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임영토비소록』에는 이 과정에서 이방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4년 가을
관아 점령 전후 정선 읍내 『동비토론』에는 정선 읍내에 농민군 3천여 명이 모였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는 당시 정선이 강원 남부와 인접 지역 농민군의 주요 집결지였음을 보여준다.
1894년 10월 21∼22일
홍천(洪川) 장야촌·풍암리에서 홍천 농민군이 관군·포군과 전투를 벌였다.
1894년 10월 하순∼11월
강릉에서 출동한 진압군이 평창 봉평·홍천 내면에서 온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산간 지역에서 저항하였으나 여러 방향에서 들어온 진압군에 밀렸다. 1894년 11월 3일평창 대화 일대에 일본군이 도착해 관군과 합세하였다.
1894년 11월 5일
평창 후평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패한 농민군 일부는 정선 등지로 이동하였다.
1894년 11월 6일
진압군이 정선으로 들어와 정선 읍내·여량에 산재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여량의 접소와 지도자들의 집이 불탔으며, 체포와 추격이 이어졌다.
1894년 11월
정선 녹도. 정선으로 물러난 농민군이 일본군과 감영군의 공격을 받았다. 녹도는 농민군의 전투와 처형이 전해지는 장소다. 정확한 전투일과 전체 희생자 수는 단정하기 어렵다.
1894년 11월 22일
강릉 『임영토비소록』에 따르면 차기석(車箕錫)·박학조(朴學祚)가 처형되었으며, 여량 농민군 지도자 이중집(李仲集) 등도 살해되었다.
1894년 11월 25일
정선·강릉 관할 지역. 여량 농민군 지도자 지왈길(池曰吉)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동비토론』의 다음 날 보고에 처형 사실과 날짜가 남아 있다.
1894년 겨울∼1895년 초
정선 및 인접 지역 지도자와 잔여 농민군에 대한 수색·체포가 계속되었다. 유시헌의 가족들도 탄압을 겪었다. 아들 유택하는 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된 뒤 탈출하였으며, 『동학난중기』를 남겼다.
1895년 1월 7일
일본군이 해를 넘겨서도 정선에 주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관문이 작성되었다. 주둔군을 위해 쌀과 반찬을 보내고 진영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7년
동학교단최시형이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1898년
최시형이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처형되었다.
기록을 읽을 때 유의할 점
정선에 집결한 3천여 명은 관군의 정탐 보고에 나타나는 추산 인원이다.
이를 녹도 한 곳에 모인 병력이나 전사자 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또한 관아 점령 당시의 폭력에 관한 기록은 진압 측에서 작성한 사료라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지왈길의 처형일은 사료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 연표는 처형 다음 날 작성된 『동비토론』의 보고에 따라 음력 11월 25일로 표기하였다. 양력으로는 1894년 12월 21일이다.
2. 정선 동학운동의 주요 유적지
무은담(霧隱潭) — 교단 재건과 비밀 포교의 거점
정선군 남면 문곡리에 있던 유시헌의 집터이다. 유시헌은 본래 유인상으로 불렸으며, 최시형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교단 재건을 도왔다. 무은담은 지도자들이 잠시 몸을 숨긴 장소를 넘어 교도들이 모이고 수련과 포교를 이어간 거점이었다. 현재의 집터는 정선이 동학의 재건 과정에서 맡았던 역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갈래산 적조암(寂照庵) — 탄압 속에서 가르침을 이어간 수련터
갈래산의 적조암은 최시형과 동학 지도자들이 수련한 곳이다. 이필제의 봉기 이후 교단이 심한 탄압을 받던 시기, 이들은 산중에서 기도와 수련을 이어가며 재건의 기반을 다졌다. 무은담에서 식량을 조달했다는 기록은 산중의 수련이 지역 교도들의 도움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입산 연도와 세부 일정에는 기록상의 차이가 있으므로, 특정 날짜를 확정하기보다 1870년대 초 동학 재건의 수련터로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다.
싸내 — 수운의 유족을 품었던 피신처
정선군 화암면(畵岩面) 화암리의 싸내는 최제우의 부인 박씨가 피신하여 말년을 보낸 곳으로 전한다. 지도자의 죽음 뒤에도 남은 가족을 돌보았던 교도들의 삶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무은담과 적조암이 교단 재건의 역사를 전한다면, 싸내는 탄압 속에서 유족의 생계를 보살피고 서로 의지했던 역사를 전한다.
여량(餘糧) — 지왈길·이중집과 농민군의 활동 지역
여량은 지왈길과 이중집 등이 이끄는 농민군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다. 1894년 진압 과정에서 접소와 지도자들의 집이 불탔고, 체포와 처형이 이어졌다. 여량의 동학 역사는 한 건물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접소 터, 인접 지역으로 이어지는 활동 경로를 함께 살펴야 하는 역사이다.
녹도 — 전투와 집단 희생이 전해지는 장소
정선 읍내 조양강(朝陽江) 주변의 옛 녹도는 동학농민군의 전투와 처형이 전해지는 곳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이곳을 ‘정선 애산리 녹도 동학농민군 전적지’로 소개한다. 후평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정선에서 다시 공격받았으며, 녹도 둔치의 소나무숲에서 포로들이 처형되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다만 당시 섬의 범위와 교전·처형 지점을 현재의 지형에 정확하게 대응시키는 데에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정선 관아 터 — 농민군이 지방 권력에 맞섰던 현장
1894년 10월 하순 농민군이 습격·점령한 정선 관아는 정선 항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장소이다. 농민군의 집결과 관아 점령은 정선의 동학운동이 은신과 포교의 단계를 넘어 지방 통치 질서에 직접 맞서는 항쟁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관공서 위치를 당시 관아의 정확한 경계와 동일하게 보지는 않아야 한다.
3. 주요 참고자료
자료 저자·성격 참고할 내용
『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오횡묵(吳宖默)의 정선군수 재임 기록
1887년 3월부터 1888년 8월까지의 지방 행정, 광산 개발, 세금과 민폐, 재해와 진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1894년 항쟁의 직접 기록이 아니라, 그 이전 정선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이해하는 자료이다.
정선문화원의 『국역 정선총쇄록』.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유시헌의 아들 유택하(劉澤夏)의 기록
농민혁명 참여와 체포·탈출, 탄압 속에서 겪은 고초를 전하는 자료이다. 정선 동학 지도자와 가족의 경험을 살펴보는 데 중요하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동비토론(東匪討論)』
강원도 농민군 진압 관련 공문서 모음. 정선 농민군 3천여 명의 집결, 후평 전투, 농민군 추격, 지왈길의 처형, 일본군 주둔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진압 측의 시각과 표현을 고려하여 읽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
강릉의 농민군 진압 경과를 서술한 기록이다.
강릉 관아 점령과 퇴각, 정선 관아 점령, 여량 공격, 이중집 등의 처형을 살펴볼 수 있다. 사건의 날짜와 평가는 다른 사료와 대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원기서(道源記書)』 및 동학·천도교 교단사 자료 초기 동학과 교단 재건에 관한 기록최시형의 활동, 교도들의 피신과 수련, 무은담 등 포교 거점의 역사를 살펴보는 자료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유적지·참여자 자료유적 조사 및 참여자 관련 자료
무은담·녹도 등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 유택하를 비롯한 참여자의 행적을 확인하는 데 참고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소설 속 창작 인물과 대화, 세부 전투 장면은 이 연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유적지는 현존 건축물뿐 아니라 집터·활동 지역·전적지·전승 장소를 함께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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