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제7부 ―물살이 맺어준 세 사람
아버지를 잃고 다섯 해가 지난 병술년(丙戌年), 열일곱의 무진은 아우라지에서 배를 저었다.
정선의 봄은 산 아래와 산 위에 따로 왔다.
나루의 흙이 풀려 발자국마다 물이 괴어도 산그늘에는 눈이 남았고, 새벽이면 밧줄에 서리가 붙었다.
무진은 굳은 줄을 비벼 풀고 삿대 끝으로 살얼음을 깨뜨렸다. 배 안의 물을 퍼내다 손등에 튀면 손가락 마디부터 아려, 손을 겨드랑이에 끼웠다가 다시 바가지를 들었다.
구절리에서 내려온 송천과 삼척 하장 쪽에서 흘러온 골지천이 여량에서 만났다.
눈 녹은 물이 불어나면 한쪽은 산비탈의 흙을 품고 누렇게 내려왔고 다른 쪽은 골짜기의 그늘을 안은 채 검푸르게 흘렀다. 만난 뒤에도 물빛은 곧 섞이지 않았다.
길게 늘어진 경계가 여울에서 비틀릴 때마다 서로 다른 힘이 배 밑을 밀었다.
무진은 삿대에 걸리는 힘을 살피며 그 경계를 건넜다.
뱃머리가 돌아서기 전에 발을 옮기고 무릎을 굽혔다. 강바닥의 돌을 짚으면 삿대를 깊이 박지 않고 밀어냈다.
손님들은 건너편을 보았으나 그는 배 아래의 물을 보았다.
아버지와 가까이 지냈던 먼 친척에게 빌린 배였다.
널빤지에는 오래된 덧댐 자국이 있었고, 물이 스미는 틈은 송진으로 막았다. 무진은 아침마다 배 밑을 살폈다. 겨울 산판에서 나무를 베거나 금점의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삿대 끝에 강바닥이 닿으면 어느 쪽으로 힘을 주어야 할지 손으로 알 수 있었다.
장날에는 곡식 자루와 소금 꾸러미, 닭을 담은 대바구니가 배를 채웠다.
평일에는 농부와 아낙, 등짐 진 보부상이 올라 마을의 일을 이야기했다. 소작료가 올랐다는 말, 환곡을 갚지 못한 집이 밤새 비었다는 말, 갱도가 무너졌는데 사람을 꺼내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강 한가운데서도 목소리는 낮았다. 뱃머리가 둑에 닿으면 사람들은 말을 멈추고 짐부터 챙겼다. 무진은 누가 묻혔는지 듣지 못한 채 빈 배를 돌리기도 했다.
동백(冬柏)도 같은 나루에서 배를 저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평생 아우라지의 물길을 오간 뱃사공이었다. 어린 딸을 발 사이에 앉히고 삿대 잡는 법을 가르쳤다. 동백은 삿대가 기우는 각도와 뱃머리가 돌아서는 방향을 보며 자랐으나, 장마가 거세던 어느 여름 아버지는 뒤집힌 배를 붙잡으려다 급류에 휩쓸렸다.
동백은 며칠 동안 하류를 찾아다녔다. 물이 줄면 갈대밭을 헤쳤고, 바위틈에 천 조각이 걸려 있으면 신을 벗고 들어갔다. 젖은 천을 펼쳐보고 다시 물에 놓았다. 아버지의 옷은 아니었다.
나루 아래에서 삿대 하나가 발견되었다.
동백은 손때로 반들반들해진 곳을 쥐고 강가에 오래 서 있었다.
물이 빠진 돌에는 진흙이 말라붙었고, 갈대줄기에 엉킨 마른 잎들이 바람에 서로 긁혔다.
처음 손님을 태우려 했을 때는 여자에게 목숨을 맡길 수 없다며 다른 사공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다.
동백은 재촉하지 않고 배 안의 물을 퍼냈다.
물빛이 짙어지면 삿대를 깊이 넣었고, 바위에 부딪혀 되감기는 물결 앞에서는 뱃머리를 미리 돌렸다.
상류에 비가 내렸다는 말을 들으면 나루의 하늘이 맑아도 배를 묶었다.
몇 해가 지나자 그녀의 배를 마다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동백이 삿대를 거두는 날에는 다른 사공들도 강 위쪽을 살폈다.
무진과 동백은 먼저 손님을 본 쪽이 배를 띄우기로 했다.
짐이 많으면 무진의 큰 배가 나섰고, 가벼운 짐을 지고 급히 건널 사람은 동백의 작은 배에 태웠다.
가끔 그녀가 뱃머리를 가로질러 손님을 먼저 태우면 무진은 돌아와서도 투덜거렸다.
“내 배 앞을 막았잖소.”
“물이 내 배를 먼저 밀어준 거예요.”
“물도 사람을 가려 돕는 모양이오.”
“그럼 강에 따져요.”
동백은 등을 돌리고 밧줄을 정리했다.
숙인 어깨가 조금씩 움직였다. 무진은 삿대에 묻은 모래를 씻다가 그녀가 돌아보면 다시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어느 때부터 두 사람은 손님이 없어도 상대의 배를 기다렸다.
동백이 늦으면 무진은 상류를 살폈고, 무진이 보이지 않으면 동백은 멀쩡한 밧줄을 풀었다가 다시 묶었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젖은 짚신 속 발가락이 오그라들어도 먼저 집으로 가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원복은 그 무렵 아우라지를 자주 건너던 젊은 보부상이었다.
무진보다 세 살 위였으며, 패랭이 아래 얼굴은 바람에 그을려 있었다. 봇짐에는 소금과 바늘, 무명실과 놋숟가락, 아이들에게 팔 엿이 들어 있었다.
다른 고을의 소식은 잘 풀어놓았으나 제 고향과 식구 이야기는 웃음으로 넘겼다.
“보부상의 고향은 장이 서는 곳이고, 집은 봇짐 내려놓는 자리지.”
비 오는 날 처마를 빌리면 젖은 봇짐부터 풀었다.
소금 꾸러미를 만져보고 실타래를 벌려놓은 뒤에야 앉을 자리를 찾았다.
여름이 깊어지자 산봉우리가 구름에 잠기는 날이 잦아졌다.
밤새 지붕을 두드리던 비가 아침에 그쳐도 강물은 줄지 않았다. 먼 상류의 비가 뒤늦게 내려와 나루의 돌계단을 한 칸씩 삼켰고, 물에 잠긴 풀잎들이 한쪽으로 누워 떨었다.
그런 날 원복이 강가에 왔다. 무진은 배를 풀지 않은 채 그를 말렸다.
“오늘은 건너지 마시오.”
“건너편에 맡긴 물건을 찾아야 한다. 내일 장에 못 내놓으면 밥을 굶는다.”
“물이 좀 빠질 때까지 기다리시오.”
원복은 강 건너를 보다가 봇짐을 내려놓았다.
한낮이 지나도록 무진은 물가의 돌 하나를 골라 수위를 살폈다.
꼭대기만 보이던 돌의 옆면이 차츰 드러났고, 떠내려오는 굵은 나무도 뜸해졌다. 동백이 빈 배로 나루 가장자리를 돌아보니 삿대가 닿는 얕은 물길은 아침보다 누그러져 있었다.
무진은 건너편 아래쪽에 드러난 모래턱을 가리켰다.
“오늘은 저 아래로 대겠소. 곧장 가로지르지 않고 물을 따라 내려가면 닿을 수 있소.”
“내 배도 뒤에 붙일게요.”
원복은 물건을 가지러 가는 길이어서 봇짐이 크지 않았다.
무진은 그를 배 가운데 낮게 앉혔다. 원복은 바닥에 남은 물을 보고 봇짐을 등에 멘 채 끈을 당겼다.
무진이 뱃머리를 상류로 비스듬히 잡고 배를 밀자 동백도 뒤에서 줄을 풀었다. 처음에는 예상한 대로였다. 배는 얕은 물길을 벗어나 아래쪽 나루를 향해 흘렀고, 삿대를 거두고 노를 당기면 뱃머리가 돌아왔다.
두 물의 경계에 가까워졌을 때 송천 쪽에서 부러진 가지들이 몰려왔다.
앞서 가던 풀더미가 갑자기 빨라지더니 검푸른 물 위로 누런 물이 덮쳤다. 길게 이어지던 경계가 접히고 배 밑에서 옆으로 미는 힘이 솟았다.
무진은 노에 힘을 주었다.
뱃머리가 돌아오다가 다시 밀리는 순간, 가지더미 속에서 절반쯤 잠긴 통나무가 돌아 나왔다.
비껴가려 했으나 물살이 배 뒤를 붙들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널빤지가 갈라졌다.
발등으로 물이 솟자 원복이 몸을 옮겼고, 기운 배가 돌아오지 못했다. 등 뒤의 봇짐이 그를 끌고 넘어갔다. 패랭이가 물 위에서 뒤집히고 한 손이 잠깐 보였다.
무진은 노를 놓고 뛰어들었다.
흙탕물 속에서 옷깃을 붙잡았으나 원복의 몸은 자꾸 아래로 꺾였다. 물을 먹은 봇짐이 두 사람을 끌어내렸다. 발을 뻗어도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봇짐 끈을 끊어요!”
동백이 가지더미를 피해 배를 돌렸다.
무진은 원복을 붙든 채 작은 칼을 뽑았다. 팽팽한 끈에 날을 댔으나 한 번에 잘리지 않았다.
물이 턱을 넘어왔다.
흙탕물을 삼키면서 원복을 가까이 당기고 칼을 다시 밀었다.
끈이 끊어지자 봇짐이 다리를 스치며 가라앉고 원복의 어깨가 솟았다.
무진은 동백이 내민 삿대에 그의 팔을 걸쳐주었다. 원복이 뱃전을 붙잡자 동백은 반대편으로 무릎을 옮기며 그를 끌었다. 배 안으로 굴러든 원복이 물을 토했다.
그녀가 돌아보았을 때 무진은 보이지 않았다.
“무진!”
조금 아래에서 머리가 떠올랐다가 다음 물결에 덮였다. 동백은 배를 흘려 보내며 삿대를 뻗었다. 어깨에 끝이 닿자 무진의 손이 나무를 더듬었다. 한 번 놓쳤다가 붙잡았다.
원복도 엎드린 채 삿대를 당겼다. 무진이 뱃전에 팔을 걸자 그의 손목을 붙들었고, 동백은 그대로 여울 아래의 모래턱으로 배를 몰았다.
발끝에 바닥이 닿은 무진은 기어서 물 밖으로 나왔다.
흙탕물을 토하고도 숨이 돌아오지 않아 모래를 움켜쥐었다. 원복은 옆으로 누워 기침했다. 구름 틈으로 햇빛이 내려왔으나 세 사람의 이가 부딪치는 소리는 멎지 않았다.
원복이 무진의 손을 잡았다. 갈라진 뱃전에 베인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내 목숨은 이제 네 것이다.”
“형님 목숨을 내가 어디에 쓰겠소.”
“필요하면 내놓으마.”
동백이 무진의 뺨을 때렸다.
“당신까지 빠지면 나는 누구부터 건져요?”
무진은 대답하려다 기침했다. 동백은 다시 손을 들었다가 그의 젖은 저고리를 움켜쥐었다.
“다음에는 뛰어들기 전에 나부터 불러요.”
“그럴 틈이 없었소.”
옷깃을 쥔 손이 떨렸다.
무진은 웃음을 거두었다. 동백이 옷자락을 찢어 상처에 감았으나 매듭을 짓는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무진은 다른 손으로 천 끝을 눌러주었다.
깨진 배는 여울 아래에서 건져 널빤지를 덧대고 송진을 발랐다.
무진은 다시 띄운 뒤에도 틈새를 살폈으며, 삯을 받으면 수리에 든 돈과 친척에게 줄 몫부터 덜어놓았다.
그날부터 세 사람은 자주 같은 강가에 앉았다. 동백은 원복이 배에 오르면 봇짐 끈부터 풀게 했고, 원복은 군말 없이 발치에 내려놓았다.
무진은 손님을 기다리며 책을 읽었다. 어느 날 동백이 책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도 글자를 배우겠어요.”
무진은 가지로 모래를 고르고 동백(冬柏)이라고 썼다.
“내 이름은 왜 이렇게 복잡해요?”
“겨울 동 자에 측백 백 자요.”
“나는 꽃 이름인 줄만 알았는데.”
“꽃 이름도 이렇게 쓰오.”
동백은 획을 따라 그었다. 가지 끝이 걸려 글자가 비뚤어지자 손바닥으로 지웠다. 몇 번을 다시 쓰고 나서야 제 이름을 내려다보았다.
“당신 이름도 써봐요.”
무진은 옆에 변무진(邊武鎭)이라고 적었다.
“호반 무 자에 누를 진 자요.”
“무엇을 누르는데요?”
가지 끝이 마지막 획에서 멎었다.
포승줄에 묶였던 아버지의 손이 떠올랐다. 제 손을 내려다보니 굳은살 사이로 아물어가는 상처가 길게 남아 있었다.
동백이 그의 이름을 보며 말했다.
“우선 배부터 잘 붙들어요.”
무진이 웃었다. 그녀는 더 묻지 않고 이름을 따라 썼다.
저녁바람이 내려오자 두 사람은 배를 조금 위로 끌어올렸다. 젖은 모래에 긴 자국이 나고, 물결이 두 이름 앞까지 들어왔다가 물러났다.
“내일 또 써줘요.”
“내일은 당신이 쓰시오.”
동백은 발끝으로 제 이름 아래에 짧은 줄을 그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다시 들어온 물이 물러가는 것을 보았다.
그해 장마는 쉽게 물러가지 않았다.
잠깐 개었던 하늘이 다시 낮아지고 산허리에 걸린 구름이 사흘 동안 비를 쏟았다.
밤이면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 아래로 강물 소리가 밀려와, 누워서도 물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무진은 높은 말뚝으로 배를 옮겨 묶었다.
새벽이 되기 전에 떠내려온 나무와 풀이 밧줄에 걸렸고, 불어난 물이 그것들을 한꺼번에 밀었다. 강가에 달려갔을 때 밧줄은 끊어져 있었다.
배는 아래쪽 바위에 걸려 물살에 밀릴 때마다 갈렸다.
무진은 물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줄을 걸어 끌어냈다. 덧댄 곳 옆으로 선체가 갈라졌고 널빤지 몇 장은 뜯겨나갔다. 남은 판자도 누르면 안쪽으로 꺾였다.
이번에는 틈을 메우는 것으로 되지 않았다.
배를 빌려준 친척은 당장 갚으라고 하지 않았다. 건져놓은 판자를 살펴보다가 한숨을 쉬고 돌아갔다. 무진은 그가 떠난 뒤에도 판자 앞에 서 있었다.
가을걷이를 거들고 땔나무를 해 날랐으나, 품으로 받은 곡식은 집에 가져가면 며칠을 넘기지 못했다.
그 무렵 원복이 몰운 골짜기의 금점 소식을 가져왔다.
“금이 섞인 돌을 캐고 나를 사람을 구한다더라. 먹고 잘 곳도 준다 하고.”
품삯을 들은 무진은 손가락으로 날수를 짚었다. 겨울 내내 일하면 배 값을 갚고 봄에는 나루로 돌아올 수 있을 듯했다.
“그대로 손에 쥐여주는지는 나도 모른다.”
원복이 덧붙이자 무진은 셈을 멈추고 잠시 생각하다가 금점으로 가는 길을 물었다.
다음날 저녁, 순덕은 아들의 손을 잡았다. 여름에 찢어진 자리가 단단하게 아물어 있었다.
“이 손으로 또 돌을 캐겠다고?”
“겨울만 지내고 오겠습니다.”
순덕이 상처 가장자리를 엄지로 쓰는 동안 무진은 손을 빼지 못했다.
며칠 뒤 등짐을 꾸려 나루로 내려갔다. 안개 속에서 삿대를 씻던 동백이 그의 짐을 보았다.
“언제 돌아와요?”
“강이 풀리기 전에 오겠소.”
그녀는 돌아오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고 삿대를 세워놓았다. 무진은 고갯길에서 한 번 돌아보았으나, 안개 속에서 물소리만 올라왔다.
금점에서는 날이 밝기 전에 굴로 들어갔다.
등잔불 아래에서 정을 대고 망치를 내리칠 때마다 돌가루가 얼굴로 튀었다. 천으로 입을 가려도 씹히는 것이 있었다. 천장이 낮아 머리를 부딪친 뒤로는 밖에 나와서도 등이 쉽게 펴지지 않았다.
깨낸 돌은 바구니에 담아 날랐다. 젖은 바닥에서 발을 헛디디면 돌부터 붙들었고, 쏟아진 것을 줍는 동안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등을 밀었다.
저녁에는 손가락이 굳어 밥그릇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입 가까이 들었다.
백도겸을 만난 것도 그런 저녁이었다.
그는 무진의 맞은편에 앉아 이름과 고향을 물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절뚝이며 들어온 광부가 문턱에 주저앉았다. 발등에 돌이 떨어져 낮부터 제대로 걷지 못하던 사람이었다.
백도겸은 먹던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부축했다.
젖은 버선을 조심스럽게 벗긴 뒤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감았다. 광부가 고맙다는 말을 거듭하자 그릇을 앞으로 밀어주었다.
“밥부터 들게. 식기 전에.”
자기 그릇에 남은 밥을 그에게 덜어주고 돌아앉은 뒤에도 백도겸은 무진의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무진은 아버지가 곤장을 맞고 죽은 일과 배를 잃은 일을 마저 이야기했다.
“자네 안에도 한울이 계시네.”
무진은 돌가루가 밴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꼴을 하고도요?”
“그 꼴이 되었다고 자네가 덜 귀해지는 것은 아니네.”
그날 밤 무진은 오래 잠들지 못했다.
물주 앞에서는 다친 사람도 멈춘 품으로 셈해졌다. 백도겸은 그의 버선을 벗길 때 상처에 닿지 않도록 손을 멈추었다. 무진은 그 손과 말을 번갈아 떠올렸다.
그 뒤로 일이 끝나면 백도겸을 찾아갔다. 주문을 배우고 뜻을 물었다. 아버지를 죽인 자도 하늘처럼 대해야 하느냐는 물음에서는 말이 오래 맞섰다. 듣고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남으면 다음 날 다시 물었다.
겨울이 끝나기 전, 무진은 물 한 그릇을 놓고 동학에 들었다. 처음 주문을 외울 때는 목소리가 자꾸 끊겼으나 백도겸은 재촉하지 않았다.
이듬해 정해년(丁亥年), 열여덟이 된 무진은 얼음이 풀릴 무렵 아우라지로 돌아왔다.
얼굴은 야위었고 손톱 가장자리에는 돌가루가 검게 배어 있었다. 말을 하다가도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침을 삼켰다.
품삯에서 죽값과 잠자리 삯, 연장과 등잔 기름값을 제하고 나니 동전 몇 닢이 남았다.
나루에서 그 동전을 만지는데 강 건너에서 동백의 배가 돌아왔다. 바람이 불자 무진은 먼지를 피하듯 턱을 당겼다. 그러나 얼굴에 닿은 것은 강물의 냉기였고, 고개를 들면 막힌 돌벽 대신 산마루가 보였다.
그는 뗏군에게 빌린 낡은 배를 손질했다.
벌어진 틈에 삼껍질을 박고 송진을 발랐다. 작은 솥에서 끓는 송진 냄새가 젖은 나무 냄새에 섞였다.
동백은 가까이 앉아 밧줄을 손봤다. 겨울에도 나루를 떠나지 않고 밧줄을 꼬거나 삿대를 깎았다. 무진의 소식을 묻는 원복에게 번번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대답해야 했다.
“금은 많이 캤어요?”
“금이 든 돌은 많이 캤소.”
“당신 몫은요?”
“물주의 전대에 있겠지.”
동백의 손이 멎었다. 무진이 주걱을 고쳐 쥐자 덧난 상처가 벌어졌다. 검지 손톱은 절반쯤 검게 죽어 있었다.
“다시는 가지 마요.”
“겨울이 오면 무엇으로 먹고살겠소?”
“나무를 하든 밧줄을 꼬든 여기서 해요.”
그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가 덧붙였다.
“돌아올 수 있는 일을 해요.”
무진은 배 옆에 놓인 삿대를 보았다. 오래 쥔 자리가 반들반들했다.
“내가 돌아오지 못할까 걱정했소?”
“아니요.”
대답이 너무 빨랐다.
“빚을 누구에게 받나 생각했어요.”
“내가 당신에게 무슨 빚을 졌소?”
“기다리게 했잖아요.”
동백은 매듭을 내려다보았다.
무진은 더 묻지 않고 송진을 발랐다. 주걱 끝에서 떨어진 한 방울이 봄볕에 호박빛으로 빛났다.
오후에 동백은 달라진 여울을 살피고 돌아와 그에게 손짓했다.
“타요.”
“내 배도 있소.”
“송진도 굳지 않았어요.”
그가 머뭇거리자 삿대로 뱃전을 두드렸다.
“돌 깨는 법만 배우고 배 타는 법은 잊었어요?”
무진은 손님도 짐도 없는 배에 올랐다.
나루를 벗어나 물살이 느려지는 둑 아래에 이르자 동백이 삿대를 거두었다. 배가 넓게 휘돌며 흘렀다.
“왜 멈췄소?”
“잠깐만 있어봐요.”
“아래로 밀리고 있소.”
“알아요.”
그녀는 앞의 모래턱을 살폈다. 무진은 뱃전을 붙잡았다가 손을 풀었다. 돌짐도 봇짐도 없었다. 배가 조금 기울면 동백이 발을 옮겼고, 그 작은 움직임으로 다시 수평이 잡혔다.
산그늘을 벗어나자 햇빛이 어깨에 닿았다. 무진은 저도 모르게 등을 폈다. 낮은 천장에 부딪힐까 움츠릴 필요가 없었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다 기침이 올라왔으나, 동백은 삿대 끝을 물에 담근 채 기다렸다.
그는 햇빛을 받은 바위를 오래 보았다.
굴속에서는 등잔이 흔들릴 때마다 돌벽의 금을 살폈었다. 여기서는 몸을 피할 까닭이 없었다.
동백의 머리카락 몇 올이 뺨으로 흘러내렸다. 손을 내밀려다가 손금에 박힌 돌가루를 보고 거두었다.
“왜요?”
“아니오.”
“할 말이 있으면 해요.”
무진은 잠시 강을 보다가 말했다.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소.”
“누가요?”
“내가.”
동백이 얼굴을 돌렸다. 입가에 작은 웃음이 남았다.
“나도 그래요.”
나루에서는 원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진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장터에서 달려온 참이었다. 그는 뱃머리를 잡고 인사를 건네다가 무진이 기침하자 묻고 싶던 말을 삼켰다.
“배는 잘 고쳤느냐?”
“아직 송진이 굳어야 하오.”
“그럼 오늘은 쉬어라.”
원복은 엿을 꺼내 무진에게 조금 큰 조각을 주고 남은 것을 둘로 갈랐다.
세 사람은 나루에 앉아 천천히 먹었다. 원복이 장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동백은 무진이 기침할 때마다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았다.
금점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
해가 산 뒤로 내려가자 각자의 길로 돌아갔다. 나루에는 두 배가 남아 물결에 가까워졌다가 떨어졌다. 이따금 뱃전이 맞닿는 낮은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렸다.
봄이 깊어지자 모래 위에 두 사람의 이름이 다시 나란히 놓였다. 동백이 잊은 획을 물으면 무진은 가지 끝으로 짚어주었다.
어느 날 그는 백도겸의 이야기를 했다. 사람마다 한울을 모셨으며 가난하고 천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귀하기는 같다는 말이었다.
동백이 가지를 멈췄다.
“그렇게 귀한 사람을 왜 굶겨요?”
무진이 대답하지 못하자 그녀는 상처가 남은 그의 손을 보았다.
“당신 안에도 계신다면서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동백은 더 묻지 않고 그의 이름에서 빠진 획 하나를 채웠다.
그해 가을, 무진은 다시 등짐을 꺼냈다. 배 값은 남아 있었고 곡식독은 겨울을 넘기기에 얕았다.
옷을 접다가 지난봄 입었던 저고리를 집어 들었다. 주머니를 더듬자 손가락에 동전 하나가 걸렸다. 굴속에서 보낸 겨울 끝에 받아 쥔 돈이었다. 무진은 그것을 등잔 아래 놓고 한동안 바라보다가, 접었던 옷을 다시 폈다.
며칠 동안 땔나무를 해 나르고 다른 품자리도 물었다. 해는 짧아졌고, 아침마다 빈 배의 물을 퍼내는 손이 더 시렸다. 그는 끝내 옷을 접어 등짐에 넣었다.
떠나는 날 동백이 짐 끈을 붙들었다.
“여기서 더 해보면 안 돼요?”
무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손 아래로 해진 끈의 올이 삐져나와 있었다.
“강이 얼기 전까지는 벌 수 있겠지. 그 뒤에는…….”
말이 끊겼다. 이번에는 얼마나 남을지 그도 알지 못했다.
동백은 끈을 놓고 구부러진 곳을 폈다.
어깨에 닿는 매듭을 옆으로 옮겨주는 동안 무진의 손이 등짐 아래에서 한 번 쥐어졌다가 풀렸다. 그녀의 손이 떨어진 뒤에도 그는 잠시 서 있었다.
무진이 고갯길로 올라갈 때 동백은 배를 띄우지 않았다. 강 건너에서 누군가 불렀으나, 그가 산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밧줄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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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딸에게 전화했다. “엄마가 기계로 말했어. 요양원에 보내달라고.” 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요?” “안 좋아진 건 오래됐지.” “아빠가 힘들어서 그러는 거예요?” 나는 그 말에 화가 났다. 딸이 나를 탓한 것도 아닌데 찔린 사람이 먼저 상처...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⑥] 기다리던 자리가 두려웠다
재활병원 언어치료사가 의사소통기기를 한번 써보라며 빌려준 것은 그 무렵이었다. 아내는 말을 알아듣고 글자도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입 밖으로 온전히 밀어내지 못했다. 언어치료사는 작은 태블릿을 거치대에 고정하...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⑧] 돌아오는 차에는 아내가 없었다
입소를 사흘 앞둔 날 아이들을 불렀다. 사위도 며느리도 손주들도 데려오지 말고, 이번에는 우리 네 식구만 밥을 먹자고 했다. 딸은 생크림 케이크와 어머니가 좋아하던 포도를 사왔다. 아들은 닭고기와 숯, 식당에서 쓰던 것과 닮은 낡은 석쇠를 가져왔다. 딸은 평상 ...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⑤] 아내를 씻기고 나는 늙어갔다
병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변기까지 가는 데 처음에는 십 분이 걸렸고, 나중에는 삼십 분이 걸렸다. 어느 겨울 새벽, 아내를 화장실로 옮기다 둘이 함께 넘어졌다. 아내의 몸이 내 가슴 위로 무너졌고, 허리를 찌르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③] 아내가 제 몸 안에 갇혔다
아내가 쓰러진 것은 오월의 점심 장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아내가 쉰네 살 되던 해였다.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나는 계산대에 앉아 잔돈을 세고 있었다. 주방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와 접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날마다 듣던 소리였다. 그릇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