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제43부 — 만세를 부르러 떠나는 아들, 다시 기다리는 어머니
1919년 봄, 만세 소식은 장꾼들의 등짐과 함께 정선으로 들어왔다.
먼 장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서울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했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가 앞장섰고, 예수교 사람들과 절에 있는 사람들도 함께했다는 말이 고개를 넘어왔다.
장터에서는 물건을 고르던 사람이 손을 멈추었고, 이야기를 전하던 장꾼은 듣는 이들이 가까이 모여들수록 목소리를 낮추었다.
누군가 길 쪽을 돌아보면 곁의 사람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결은 어느 고을에서 사람들이 일어났는지 물었다.
처음에는 먼 곳의 이름들이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대화와 화암까지 들렸다.
화암에서 온 장꾼이 지게를 벽에 기대며 말했다.
“선언서가 여기까지 들어왔어. 대화리의 최상달이라는 천도교인이 가져왔다더군. 석곡리 최돈상에게 한 장을 건넸대.”
한결은 물을 떠다 주었다.
“무엇이라고 쓰여 있었답니까?”
“조선은 독립한 나라이고, 조선 사람이 제 나라의 주인이라는 말이라네.”
장꾼은 사발을 입에 댔다가 내려놓았다.
“그런데 종이를 건넨 사람이 잡혀갔어.”
한결은 사발을 받던 손을 멈췄다.
“칼을 나눠 준 것도 아니고 종이 한 장을 건넸는데, 그것으로 사람을 가뒀다네.”
장꾼이 떠난 뒤에도 한결은 펼쳐 놓은 물건을 거두지 않았다. 바늘 꾸러미 위로 해가 기울었다. 물건을 싸던 보자기를 펴 놓고도 한동안 매듭을 잡지 못했다. 종이 한 장을 품에 넣고 고개를 넘은 사람도 길에서 만난 이에게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며칠 뒤 도암면 장길에서 알게 된 도인 하나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물건을 정리하는 척하며 마루 끝에 나란히 앉았다.
“횡계에서도 정선사람들이 나서려 합니다. 우리 도인들이 뜻 맞는 사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사내는 실 꾸러미를 들어 매듭을 살폈다.
“함께하시겠습니까?”
“선언서를 전한 사람도 잡아갔다는데 괜찮겠습니까?”
“괜찮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사내가 꾸러미를 내려놓고 한결을 보았다.
“그래도 누가 잡혀갔다고 모두 입을 다물면, 그 종이에 적힌 말은 누가 하겠습니까.”
마당에서는 아내가 빨래를 걷고 있었다.
정명이 문턱을 넘어오려다 주저앉더니 울지 않고 두 손을 다시 짚었다. 한쪽 무릎을 올리려다 발이 미끄러지자 한결이 몸을 일으켰다. 아이의 겨드랑이를 받쳐 마루에 앉힌 뒤 사내를 돌아보았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내는 재촉하지 않았다. 모일 곳과 날을 일러 주고 바늘 몇 꾸러미를 사서 돌아갔다.
그날 한결은 물건을 세다가 몇 번이나 처음부터 다시 셌다.
밤에는 잠든 정명 곁에 앉아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덮어 주었다. 아이는 손등에 닿은 기척에 손가락을 오므렸다. 자신처럼 이 아이도 아버지의 얼굴을 모른 채 자랄 수 있었다.
동백과 원복에게 들었던 무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소장을 내고도 돌아서야 했던 일과 함께 갇힌 사람들을 두고 혼자 물러설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동안 한결은 아버지가 사람들과 함께 나섰다는 말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는 낮에 빨래를 걷던 아내와 문턱을 넘으려던 아이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얼굴을 모르는 아버지 무진에게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둘러본 집이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있는 방과 마당에 남은 일들을 두고, 함께 나설 사람들에게로 발을 옮겨야 했을 것이다. 돌아와야 할 곳이 있으면서도 돌아서지 못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한결은 아이의 손을 이불 안에 넣으며 조금씩 헤아렸다.
낮에 찾아왔던 사내에게 가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그를 만나면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함께 갔던 사람들은 돌아왔는지, 다친 이는 없는지 묻는 동안 자신은 어느 쪽에 서 있어야 할까.
한결은 등잔불을 낮추고도 한동안 아이 곁을 떠나지 못했다.
다음 장에서 그는 도인을 찾아갔다.
“저도 가겠습니다.”
말을 하고 나니 집에 돌아가 해야 할 일이 떠올랐다. 아내에게 장부를 보여 주고, 받지 못한 물건값을 적어 두고, 어머니에게는 어디로 가는지 밝혀야 했다.
태극기를 마련해 펼친 날, 정명은 방 안을 기어 다니다가 천 위로 손을 뻗었다.
한결이 모서리를 들어 올리자 무릎으로 따라와 옷자락을 붙잡았다. 문가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동백이 물었다.
“어디로 가려는 게냐?”
“도암면 횡계로 갑니다. 장길에서 알던 사람들이 함께 만세를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간다고 너도 가야 하니?”
한결은 아이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어머니를 보았다.
“처음에는 저도 장이나 다니려 했습니다. 그런데 선언서 한 장을 건넨 사람도 잡아갔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도 돌아와 물건값만 셌습니다.”
동백이 말없이 기다리자 무릎 위의 천을 접었다.
“이번에는 함께하겠다고 했습니다. 무기는 가져가지 않습니다.”
“빈손이라고 때리지 않겠니.”
한결은 고개를 숙였다.
동백이 정명을 안아 들자 아이는 아버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한결이 내민 손가락을 작은 손이 움켜쥐었다.
“오는 날을 약속할 수 있니?”
한결은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앉아 있다가 대답했다.
“돌아오려고 갑니다. 어머니.”
동백의 눈길을 피하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맞으면 피하고, 누가 넘어지면 같이 나오겠습니다.”
동백은 아이를 고쳐 안았다.
아들의 손가락을 놓친 정명이 울음을 터뜨리자 등을 쓸어 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밤 한결은 받아야 할 돈과 먼저 치러야 할 값을 아내에게 일러 주었다. 다음 장에 가져갈 바늘과 실을 나누어 싸고, 보자기 매듭을 묶은 뒤 한 번씩 더 당겼다. 아내가 물건값을 다시 묻자 장부의 글줄을 짚어 주었다. 손가락이 같은 줄에 오래 머물렀다.
동백은 아들이 마당으로 나간 뒤 접힌 옷을 바라보았다.
무진이 떠나던 날에도 돌아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방에서는 정명이 잠결에 발을 밀어 냈다. 동백은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 주고 아이 곁에 앉았다.
한결은 모이기로 한 날에 맞추어 도암면으로 향했다.
산 아래 양지에서는 봄꽃이 피기 시작했으나 고개로 오를수록 바람이 차가워졌다.
응달의 흙은 밤새 언 채였다. 도랑 가장자리의 얇은 얼음 밑으로 물이 흘렀다.
짚신이 도랑에 걸친 돌을 디딜 때 가장자리에 붙은 얼음이 바스러졌다. 한결은 옷섶을 여미고 등짐끈을 고쳐 잡았다.
집을 벗어난 지 오래인데도 옷자락에는 정명이 잡아당기던 힘이 남은 듯했다.
품 안의 태극기를 누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굽은 산길에는 따라오는 사람 하나가 보일 뿐 집은 보이지 않았다.
전투에 나서던 아버지도 이렇게 뒤를 돌아보았을까.
한결은 잠시 걸음을 늦췄다.
자신은 함께 만세를 부르러 가고 있었으나, 무진은 사람을 죽이는 총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한결이 돌아오겠다고 말했을 때조차 어머니는 오는 날을 물었다.
아버지는 그 물음에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원복에게 여러 번 이야기를 들었어도 떠나던 날의 대답은 알지 못했다.
앞서 가던 사람이 고갯마루에서 멈춰 그를 기다렸다. 한결은 등짐끈을 당겨 어깨에 붙이고 다시 걸었다.
횡계리에 닿아 장길에서 알던 집에 짐을 내려놓고 도인을 찾아 나섰다.
1919년 사월 칠일 오후, 정선군 도암면 횡계리에 주민 백서른 명쯤이 모였다.
산비탈에 밭을 일구던 사람들이 촌락에서 내려왔다.
옷자락에는 마른 흙이 붙어 있었고, 주먹을 쥐었다 펴는 손에는 굳은살이 두꺼웠다.
한결에게 바늘과 실을 사 갔던 사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값을 치르려고 주머니를 몇 번이나 뒤지던 모습으로 기억하던 사람이었다.
주민들은 서로 인사를 마친 뒤에도 떠나지 않았다.
길가에 서 있던 사람이 다가오면 먼저 온 이들이 옆으로 비켰다. 말을 주고받던 소리가 잦아들자 옷자락을 치는 바람과 신발 밑에서 눌리는 흙소리가 들렸다.
“대한 독립 만세!”
앞쪽에서 외침이 터졌다.
한결은 태극기를 꺼냈다.
접힌 천이 손끝에 걸려 한쪽 모서리가 안으로 말렸다. 곁의 사내가 다른 끝을 받아 팔을 벌리자 가운데 접힌 자국이 펴졌다. 바람이 천을 부풀렸다가 두 사람의 가슴 쪽으로 밀었다.
“대한 독립 만세!”
한결의 첫 소리는 목에 걸려 거칠게 나왔다.
두 번째에는 곁의 사내와 숨이 맞았고, 뒤에서 따라붙은 목소리가 등을 밀었다. 바라보기만 하던 주민이 손을 들었다. 앞사람 어깨에 가려 보이지 않던 얼굴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군중은 만세를 부르며 차항(車項) 방면으로 걸었다.
비탈에서 내려오는 길이 좁아지자 어깨가 닿았다.
누군가 돌에 발을 헛디디면 뒤의 사람이 팔꿈치를 받쳤다. 걸음이 늦어진 곳에서는 외침도 잠깐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한결은 태극기를 잡은 사내와 보폭을 맞추었다. 혼자 등짐을 지고 다닐 때보다 길이 좁게 느껴졌지만 앞뒤에서 들리는 발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바람이 태극기를 비틀었다. 한결이 손을 높이 들자 사내도 팔을 올렸다.
천 아래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쳤다가 갈라졌다.
그때 서당 교사와 도로공사 인부가 나섰다.
잠깐 말을 들으라고 했다.
한 사람이 종이를 펼쳐 조선총독의 유고(諭告)를 읽기 시작했다. 바람이 가장자리를 들자 손가락으로 눌러 잡았다.
앞쪽 사람들이 멈추었다. 뒤에서는 아직 만세가 들렸으나 걸음이 막히자 차츰 잦아들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발끝을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한결은 태극기를 든 팔을 내리지 않은 채 듣고 있었다.
낭독자의 목소리가 끊길 때마다 사람들의 기침과 옷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곁의 사내가 천을 잡은 손을 조금 낮췄다. 한결이 놓지 않자 더 내리지는 않았다.
독립을 선언한 종이를 건넨 사람은 잡혀갔다.
지금 길 한가운데서는 총독의 글이 읽히고 있었다. 한결은 낭독자의 손가락 아래 붙들린 종이 끝을 바라보았다.
낭독이 끝나도 곧바로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앞에 선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고, 누군가 돌아가자고 말했다. 곁의 팔을 잡아당기는 손이 보였다. 무리 바깥에서부터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차항으로 향하던 행렬이 풀어졌다.
함께 걷던 주민들이 둘씩 셋씩 돌아섰다. 산에서 내려온 사내는 갈림길에 서서 한 번 더 뒤를 보았다. 한결은 눈을 맞추었으나 건넬 말을 찾지 못했다.
곁의 사내가 태극기 끝을 돌려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오.”
한결은 천을 접었다. 손끝이 굳어 모서리가 맞지 않았다. 다시 펴서 맞추려는데 사내가 가까이 다가왔다.
“군중 가운데서 누가 헌병에게 권총을 쏘았다더군.”
“누가요?”
“나도 전해 들었소. 누군지는 모르겠소.”
한결은 사람들이 흩어진 길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서 있던 곳에서는 앞사람의 어깨와 흔들리는 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접은 태극기를 저고리 안에 넣고 옷섶을 여몄다.
사내도 더 말하지 않았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다가 물었다.
“다음 장에는 오겠소?”
“가야지요.”
먼저 돌아선 사내가 몇 걸음 가다가 뒤를 보았다. 한결은 그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서 있었다.
그 무렵 정선의 동면과 남면, 북면에서는 밤에 산으로 올라가 불을 놓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봉화시위였다.
해가 지기 전부터 마른 솔가지와 잔나무를 모았다.
지게를 진 사내가 비탈 중턱에서 멈추면 뒤따르던 사람이 지게 밑을 받쳤고, 빈손으로 온 이는 길가의 마른 가지를 주웠다.
산마루에 닿자 골짜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밭과 집의 윤곽이 어둠에 잠기는 동안 사람들은 나무를 쌓고 잔가지를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굵은 장작이 구르자 두 사람이 발로 받쳐 세웠다.
한 사내가 몸을 굽혀 불씨를 살렸다. 곁의 사람이 등을 돌려 바람을 막아 주자 마른 껍질 끝이 붉어지더니 가느다란 불꽃이 솔가지를 핥았다. 연기를 들이마신 사내가 기침하며 물러나는 동안 불길은 쌓아 놓은 나무 사이로 번졌다.
젖은 나무에서는 흰 연기가 솟았다. 마른 가지는 작은 소리를 내며 터졌다.
불이 높아질수록 어둠 속의 얼굴이 드러났다. 늦게 올라온 이들은 옷에 묻은 흙을 털 새도 없이 둘레에 섰다.
한 사내가 골짜기 아래 제집이 있는 쪽을 바라보다가 두 손을 들었다.
“대한 독립 만세!”
곁의 사람들이 따라 외쳤다. 산바람이 소리를 흩뜨렸으나 다음 외침에는 앞뒤의 숨이 한데 모였다. 불가 가까이에 선 이의 입이 크게 벌어졌고, 뒤쪽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불꽃이 바람에 옆으로 누웠다가 다시 일어섰다.
불티가 검은 나뭇가지 사이로 흩어지자 사람들이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목이 쉰 사내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 주먹을 쥔 손을 더 높이 뻗었다.
장작이 안쪽으로 무너졌다. 긴 가지로 불더미를 밀어 올리자 붉은 속이 드러나 사람들의 무릎과 신발까지 비추었다. 밤이슬에 젖은 짚신 끝에서 김이 올랐다.
“대한 독립 만세!”
이번에는 뒤쪽에서 시작된 외침을 앞사람들이 받았다. 나무를 나르느라 숨을 고르던 사내와 손바닥의 가시를 뽑던 사람도 함께 입을 벌렸다.
골짜기 아래 어느 집의 문이 열렸다.
문간에 나온 사람이 산 위의 불을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잦아든 틈으로 만세 소리가 내려왔다. 그는 문을 닫지 않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장길을 돌아 한결이 집에 닿았을 때, 동백은 문턱에 서 있었다.
아들의 얼굴과 걸음을 살핀 뒤 등짐 밑을 받쳤다. 끈을 벗겨 짐을 내려놓고 방문을 열자 한결은 발에 묻은 흙을 털었다.
“돌아왔구나.”
“예. 어머니.”
며느리가 정명을 안고 나왔다. 아이는 아버지를 알아보고 몸을 기울였다. 한결은 손을 씻은 뒤 받아 안았다. 정명이 저고리를 움켜쥐자 품 안에 접어 둔 태극기가 가슴에 눌렸다.
“어떻게 됐니?”
“함께 만세를 부르고 차항 쪽으로 걸었습니다. 그런데 총독의 글을 읽어 주더군요. 사람들이 돌아섰습니다.”
아이의 등을 받치며 말을 이었다.
“저도 돌아왔습니다.”
동백은 더 묻지 않았다.
부엌으로 들어가 밥을 담았고, 며느리는 식은 물을 덥히려고 아궁이에 나무를 넣었다. 정명이 얼굴을 만지다가 옷자락을 당겼다. 한결은 그 작은 손을 받아 쥔 채 밥상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해 첫눈이 내린 저녁에도 동백은 무진의 몫으로 밥 한 그릇을 더 놓았다.
정명이 빈자리의 그릇으로 손을 뻗자 한결은 아이를 무릎에 앉혔다. 어머니가 밥을 덜어 식히는 동안 아이의 입가에 붙은 밥알을 떼어 주었다. 횡계리에서 펼쳤던 태극기는 장에 갈 옷 사이에 접혀 있었다.
정명이 열세 살 되던 겨울, 학교에서 집안 어른들의 이름을 적어 오라는 종이를 받았다.
눈은 아침부터 그치지 않았다. 정명은 종이를 책 사이에 끼워 저고리 안에 품었다. 집에 닿자 짚신 앞코에 뭉친 눈이 문턱에 떨어졌다.
“할머니, 아버지는 아직 안 오셨어요?”
“장에 가셨잖니. 저녁에는 오실 거다.”
정명은 젖은 버선을 벗어 따뜻한 쪽에 펴 놓고 숙제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한결, 할아버지 이원복까지 적은 뒤 붓을 든 채 아래쪽의 넓은 칸을 보았다.
“집안에서 훌륭한 일을 한 사람도 써 오랬어요. 다른 애들은 장군도 있고 벼슬한 조상도 있대요.”
동백은 아이 곁에 앉았다.
“우리 이씨 집안은 이름만 적고 나면 쓸 게 없어요.”
그녀는 종이 위의 원복이라는 이름을 보았다.
“할아버지는 여러 장을 다니셨지.”
“장을 다닌 것도 훌륭한 일이에요?”
부엌에서 솥뚜껑이 가볍게 들썩였다. 동백은 일어나 문턱을 넘다가 아이를 돌아보았다. 정명은 붓끝의 먹을 벼루 가장자리에 덜고 있었다. 그녀는 더 말하지 않고 솥으로 갔다.
해가 기울 무렵 한결이 돌아왔다.
등짐 위에는 젖은 눈이 붙어 있었고, 동백이 짐을 받치는 동안 정명이 뒤에서 멜빵을 벗겨 주었다. 아버지는 짐을 내려놓고도 잠시 허리를 펴지 못하다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손을 씻을 때 갈라진 손가락 사이로 물이 스며들자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정명은 아버지가 방에 앉기를 기다렸다가 물었다.
“우리 조상 중에는 이름난 사람이 없습니까?”
한결은 아이 앞에 놓인 숙제를 읽고 밥상이 들어올 자리를 비웠다.
“밥부터 먹자. 먹이 묻겠다.”
식사가 끝난 뒤 한결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하신 일을 적어라. 장을 다니며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오셨다고.”
정명은 그릇 가장자리에 붙은 밥알을 긁었다.
“그렇게 쓰면 애들이 웃을지도 모릅니다.”
한결은 아이를 보다가 그릇을 받아 부엌으로 가져갔다. 돌아와서는 젖은 등짐끈을 아궁이 가까이에 펼쳤다. 접힌 곳을 펴자 안쪽에 덧댄 헝겊이 여러 겹으로 드러났다.
“그건 왜 새것으로 안 바꿔요?”
“아직 쓸 수 있다.”
“너무 많이 기웠잖아요.”
끈을 손바닥으로 눌러 펴던 아버지가 말했다.
“네 할아버지가 기운 데도 남아 있어.”
정명은 가까이 다가왔다. 헝겊마다 빛깔이 달랐고 오래된 바느질은 나중에 덧댄 천 아래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굵은 실이 촘촘하게 지나간 곳은 천보다 단단했다.
아이의 손끝이 그 자리에 멈췄다.
“여기예요?”
“짐을 지면 그쪽이 어깨에 닿는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던 천이 안쪽에 넓게 덧대어 있었다. 정명은 손바닥으로 눌러 보고 돌려주었다. 한결은 끈을 잘 마르도록 펼쳐 놓았다.
“아는 일을 쓰면 된다.”
정명은 원복이 장을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고 적었다. 문장이 끝난 뒤에도 빈칸은 넓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온 정명은 집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마루에 놓인 등짐끈을 집어 들고 물건을 나누어 싸던 아버지 곁에 앉았다. 끈을 건네기 전에 안쪽의 오래된 바느질을 다시 살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 것도 기워 주셨어요?”
“그렇지. 장에서 돌아와 기워 주실 때도 있었어. 나는 곯아떨어지고.”
한결이 끈을 받아 놓자 아이는 바늘 꾸러미와 실을 작은 보자기에 담았다. 무거운 것을 아래에 놓으라는 말을 듣고 이미 싼 것을 다시 풀었다. 매듭 한쪽이 짧아 묶이지 않자 아버지는 물건을 안쪽으로 조금 밀어 주었다. 아이가 천 끝을 맞추는 동안 더 손을 대지 않고 기다렸다.
저녁부터 눈이 내렸다. 동백은 선반에서 작은 나무그릇을 내려 닦고 있었다.
“그 그릇도 할아버지가 만드셨어요?”
동백의 손이 멈췄다.
“더 오래된 것이다.”
“밑이 기울었는데 아버지가 고치면 되잖아요.”
그녀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받쳤다. 오래 닦인 가장자리가 저녁빛에 잠깐 반들거렸다.
“이건 그냥 두려고.”
정명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매듭으로 눈을 돌렸다. 동백은 그릇을 선반 안쪽에 놓았다. 궤 속의 보자기는 꺼내지 않았다.
잠들기 전, 정명은 학교에 가져갔던 종이를 책에서 빼냈다. 원복의 이름 아래에는 장을 다니며 물건을 팔았다는 짧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 그 아래로 아직 넓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
부엌에서는 동백이 불을 살피고 있었고, 마당에서는 한결이 아침에 메고 갈 지게를 처마 안으로 옮겼다. 지게 발이 마루 끝에 닿은 뒤 기침이 한 번 들렸다.
정명은 문 쪽을 바라보다가 벼루에 물을 조금 떨어뜨리고 먹을 갈았다. 붓끝을 고른 뒤 남은 자리에 한 줄을 더 적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등짐끈을 고쳐 주었다.
먹이 마르기를 기다려 종이를 접었다. 밖에서 들어온 한결이 문을 닫자 찬바람이 멎었다. 정명은 종이를 책 사이에 넣고, 문가에 앉은 아버지 쪽으로 이불을 조금 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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