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키워드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연재소설|녹도아리랑 ㊻] 빈 배에 남은 노래 -끝

  • 김광희 기자
  • 입력 2026.10.07 17:52
  • 댓글 0
  • 글자크기설정

  •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47-1 65%.png

 

제46부 — 산으로 들어간 선조, 세상으로 돌아온 후손들의 아리랑

 

돌아오지 못한 이름과, 그 이름을 품고 살아온 사람들

2022년 6월 하순, 수연은 칠현의 후손들이 정선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선조의 자취를 찾아오는 자리였다. 

고려가 무너지고 일곱 선비가 정선에 들어왔다고 전해지는 해로부터 육백삼십 년이 흘렀다. 

안내문에는 남면 칠현사(七賢祠)에서 제례를 지내고, 이튿날에는 아리랑의 자취가 남은 곳들을 돌아본다고 적혀 있었다.

수연은 안내를 끝까지 읽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칠현 후손들이 정선에 온대요.”

어머니는 장소를 묻고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수화기 너머로 달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가자.”

먼 길을 다녀오면 무릎이 붓던 때였다. 차에서 내려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알아보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다가 대답했다.

“걸을 수 있을 때 가야지.”

출발 전날 수연은 상자를 열었다.

외할머니의 공책은 얇은 종이에 싸여 있었고, 원복의 장부를 찍은 사진들은 촬영 순서대로 봉투에 들어 있었다. 그 밑에는 쓰다 만 원고가 놓여 있었다. 맨 위를 덮은 종이는 다른 장보다 누렇게 바래 있었다.

수연은 덮개를 들추었다.

무진이 젖은 옷을 입고 문턱을 넘고, 부엌에서 순덕이 돌아보는 장면이었다. 그 아래로 몇 줄을 비워 둔 채 다음 장이 이어졌다. 스물여덟 해 동안 아무도 그 빈 곳에 글을 보태지 않았다.

봉투 귀퉁이에는 처음 정선에 다녀온 해가 적혀 있었다.

 

1994년.

수연은 그 숫자를 손끝으로 쓸었다. 그때의 어머니는 지금의 자신보다 젊었다.

외삼촌이 그만두라고 했던 목소리도 잊지 않았다. 이씨로 살아온 사람들의 이름을 무슨 권리로 바꾸려 하느냐고, 전해 오는 말을 무엇으로 증명하겠느냐고 물었던 목소리였다.

수연은 원고를 다시 덮고 공책 사본과 장부 사진만 챙겼다. 성을 바꾸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안내문에 적힌 제례 날짜를 봉투 뒤에 옮겨 적고, 녹도에서 찍은 어머니의 사진도 넣었다.

사진 속 어머니는 외투 깃을 세운 채 강 쪽을 보고 있었다. 얼굴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방을 붙든 손이었다. 손가락이 지금보다 굵고 손등이 팽팽했다.

 

배냇저고리는 꺼내지 않았다. 

펼칠 때마다 약해진 솔기가 조금씩 벌어져 이제는 사진으로 보는 편이 나았다.

상자 뚜껑을 닫으려는데 소매 끝이 안쪽으로 접혀 있었다. 수연은 천 밑으로 손을 넣어 받친 뒤 소매를 펴 주었다. 손을 빼고도 한동안 뚜껑을 닫지 못했다. 작은 옷은 빈 몸판을 둥글게 남긴 채 놓여 있었다.

정선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아침 안개가 남아 있었다.

밤비를 머금은 산허리가 잠깐 드러났다가 다시 가려졌다. 골짜기 아래에서는 강과 구름의 빛깔이 비슷해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 한눈에 잡히지 않았다. 옥수수 잎에는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고, 감자밭 가장자리의 흙은 짙게 젖어 있었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풀과 젖은 흙 냄새가 들어왔다.

 

어머니는 두 손을 무릎 위에 놓고 있었다. 춥지 않으냐고 묻자 바람을 조금 더 쐬겠다고 했다.

“옛날에도 여기 들어올 때 비가 왔지.”

“그때는 가을이었어요.”

“그래. 신발이 젖어서 숙소에서 말렸지.”

수연은 웃으며 창문을 조금 올렸다.

어머니가 먼저 떠올린 것은 자료실에서 읽은 문서가 아니라 저녁에 벗어 놓은 신발이었다. 수연도 기억했다. 안에 신문지를 넣어 두고, 다음 날 아침 덜 마른 앞코를 손으로 눌러 보았었다. 어머니는 괜찮다며 그 신발을 신고 무진의 집으로 올라갔다.

 

남면에 도착하자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구름 사이로 나온 햇빛이 처마와 나뭇잎의 물기를 밝히다가 다시 흐려졌다. 

어머니는 얇은 겉옷을 입고 차에서 내렸다. 수연이 팔을 내밀자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잡았다.

칠현사(七賢祠) 주변에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멀리서 온 차들이 차례로 멈췄고, 젊은 사람이 뒷좌석의 노인을 부축해 내렸다. 누군가는 차에 두고 온 안경을 가지러 돌아갔으며, 누군가는 봉투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두 손으로 상대의 손을 잡았다.

 

이름을 묻는 말 뒤로 어느 문중인지, 어느 어른에게 선조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확인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족보의 필요한 부분을 복사해 온 사람도 있었고, 휴대전화에 담긴 집안 어른의 사진을 보여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낯선 지명을 몇 번 맞춰 부르다가 같은 마을을 말한다는 것을 깨닫자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어머니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조상은 아는데 서로는 모르는 사람들이네.”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정선에 왔을 때에도 외할머니와 정명의 이름을 말하면 문이 열리는 집이 있었다. 한결의 출생을 설명하자 말이 끊기는 집도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곧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농사를 짓는다는 사람이 있었고, 가게를 자식에게 맡겼다는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은 하루 휴가를 냈다고 했으며, 다른 사람은 내일 돌아가면 밀린 일을 해야 한다며 웃었다.

선조의 이름을 확인한 뒤에는 어느 길로 왔는지, 몇 시에 떠나야 하는지, 자식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이야기했다.

수연은 어머니의 겉옷 단추를 잠가 주다가 사당 앞에 적힌 이름을 보았다.

변귀수(邊貴壽).

변한필(邊翰弼)이 오래 붙들고 살았다는 이름이었다. 공책에는 그가 족보를 닦았다는 말과 아들 석주가 끌려가던 날 사랑방 문을 열지 못했다는 말이 함께 남아 있었다.

 

수연이 사본을 꺼내자 투명한 덮개에 햇빛이 비쳤다.

한 사람이 다가와 어느 문중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변귀수 옹의 후손이라고 전해지는 집안 이야기를 찾고 있습니다. 계보를 끝까지 확인하지는 못했고요.”

그는 사본을 받아 변한필과 변석주(邊碩柱)의 이름을 천천히 읽었다. 변무진(邊武鎭)에서는 손을 멈췄으나 아는 이름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문중에서 가진 자료를 더 봐야겠습니다.”

수연은 가족에게 전해진 경위를 설명했다. 무진의 생가는 한결이 순임 이모에게 넘겼고, 지금도 순임의 후손들이 돌본다고 했다. 상대가 한결의 성이 다른 까닭을 묻기에 원복이 아버지로 길렀다고 말했다.

 

그는 종이를 다시 펼쳤다.

“그러면 변무진 아래에 한결이라는 아들이 올라 있지는 않겠군요.”

“네. 저희가 확인한 족보에는 한결 할아버지가 이원복의 아들로 남아 있습니다.”

수연은 족보에서 확인한 부분을 옮긴 종이와 가족에게 전해진 이야기를 정리한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무진 아래에는 이어지는 자식의 이름을 적을 수 없었다. 한결은 원복의 집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남자가 두 장을 들여다보는 동안 어머니가 낮게 말했다.

“변씨 쪽에서는 그분 대에서 끝난 것으로 보이겠네요.”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한결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손바닥으로 받쳤다. 오래전 배냇저고리를 펼쳤을 때처럼 모서리가 처지지 않게 들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살아서 저희까지 왔습니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종이를 돌려주며 모서리를 한 번 펴 주었다. 연락처를 주고받는 동안 사당 앞에서 사람들을 모으는 소리가 들렸다.

 

제례가 시작되자 옷자락이 가지런해지고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밤비에 젖었던 흙은 볕이 드는 곳부터 마르고 있었다. 향 연기는 잠깐 위로 오르다가 바람을 따라 제상 옆으로 흘렀다. 늦게 자리를 잡은 사람이 신발 소리를 죽이며 옆으로 섰다.

수연은 어머니와 함께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오래 서 있기 힘든 어머니를 의자로 데려가려 했으나, 어머니는 이름이 불리는 동안만 더 있겠다고 했다.

 

칠현의 충절을 기리는 말이 들렸다.

고려가 무너진 뒤에도 새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일곱 선비. 수연은 고개를 숙인 후손들의 등을 보았다. 양복 어깨가 넓은 사람과 등이 굽은 사람, 머리가 희어진 사람과 아직 검은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변귀수의 이름이 불렸을 때 어머니가 수연의 팔을 조금 세게 잡았다.

수연은 어머니 쪽으로 몸을 붙였다. 가방 속 공책에는 무진이 집을 떠났을 때 스물여섯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동백과 원복이 거두어 산으로 옮긴 몸에는 머리가 없었다. 동백은 무진의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한 채 묻어야 했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돌아보던 얼굴을 끝내 찾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눈을 감겨 줄 수도 없었다.

 

어머니의 손이 팔 안쪽에서 가늘게 떨렸다.

수연은 그 손등을 덮고 손가락 사이를 감쌌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팔을 놓지 않았다. 앞사람이 몸을 일으킨 뒤에야 두 사람도 고개를 들었다.

처마 끝에 남아 있던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돌 위에서 부서졌다.

제례가 끝난 뒤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 무릎을 문질렀다. 수연이 따뜻한 물을 건네자 두 손으로 컵을 감쌌다.

“무진이도 충절을 지킨 사람이었을까.”

수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임금님을 위해 갔다는 말은 공책에 없었지?”

“배고픈 사람들 이야기가 더 많았어요.”

어머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럼 그 사람들한테 마음을 다한 거겠네.”

 

사당 앞에서는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자리를 정하고 있었다. 

한 노인이 줄을 맞추다 비틀거리자 곁의 사람이 팔을 잡았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앞을 보라고 했지만, 그는 노인의 발이 제대로 놓였는지 살핀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그쪽을 보며 말했다.

“변귀수 옹은 산으로 들어오셨는데, 그 뒤의 사람들은 다 밖으로 나가 살았구나.”

수연은 아까 들었던 근황들을 떠올렸다. 밭과 가게, 하루 비워 두고 온 일터가 저마다 있었다.

“저도 그렇고요. 돌아가면 다시 일해야죠.”

어머니는 수연을 돌아보며 웃었다.

“그래. 살아 있는 사람은 제 일을 해야지.”

사진 촬영을 마친 한 사람이 내려오면서 휴대전화를 받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일 아침에 가겠다고 말한 뒤 다시 사람들 사이로 돌아왔다.

 

수연은 어머니가 빈 컵을 건네줄 때까지 수첩을 꺼내지 않았다.

잠시 뒤 재성이 찾아왔다. 정선에 온다는 연락을 받고 시간을 맞춰 나온 것이었다.

머리는 거의 희어졌고, 예전보다 말 사이의 숨이 길어져 있었다. 그는 어머니에게 먼저 인사하고 수연의 가방을 가리켰다.

“자료는 잘 보관하고 있습니까?”

수연이 원복의 장부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재성은 촬영 날짜부터 살피고 웃었다.

“이것도 이제 오래됐군요.”

“원본은 괜찮아요?”

“집안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자주 펴 보지는 못하지요.”

그는 한결의 신발값과 약값이 떨어져 적힌 페이지를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안경을 벗었다가 다시 쓰고, 사진을 봉투에 넣어 돌려주었다.

 

스물여덟 해 전 철물점의 난로 앞에서 나누었던 말은 꺼내지 않았다. 

다른 후손에게 묻지 말라는 당부도 수연은 기억하고 있었다. 재성은 그날 장부를 내주지 않았지만 사진을 찍을 자리는 마련해 주었다.

세 사람은 함께 식사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가 의자를 당기는 동안 재성이 가방을 받아 빈 의자 위에 놓았다.

맞은편 사람이 어느 집안에서 왔느냐고 묻자 수연은 원복과 한결의 이름을 말했다. 가족에게 무진과 동백의 이야기도 전해진다고 덧붙였다.

 

재성은 어머니 앞의 국그릇을 가까이 밀어 주었다.

“한결 어른은 저희 집안에서도 여전히 큰어른으로 모십니다. 문중의 큰 제사 때면 그 어른 후손들도 찾아오고요.”

어머니가 그를 바라보았다. 국그릇에 얹으려던 손이 잠시 멈췄다. 이윽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수연은 숟가락을 들었다. 아침부터 무엇을 설명할지 생각하느라 제대로 먹지 못한 밥이었다. 국의 김이 얼굴 가까이 올라왔고, 한 숟가락을 넘기자 비어 있던 속이 천천히 따뜻해졌다.

식탁 끝에서 반찬이 건너왔다. 처음 만난 사람들의 손을 거쳐 어머니 앞까지 온 접시를 수연이 받아 놓았다. 어머니는 먹을 만큼 덜고 다시 옆 사람에게 건넸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연락처를 주고받은 사람과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그는 문중 자료를 살핀 뒤 소식을 전하겠다고 했다. 수연은 자신이 가진 사본과 전해진 경위를 먼저 보내기로 했다.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 아리랑을 듣고 있었다. 수연이 곁에 앉자 무릎 위의 봉투를 딸 쪽으로 옮겨 주었다.

“아까 무진이 이름을 물었을 때는 네가 대답을 잘하더라.”

“처음 왔을 때보다 아는 게 조금 늘었으니까요.”

“못 찾은 것도 그대로 말했고.”

 

수연은 봉투의 접힌 곳을 폈다.

처음에는 빈 곳이 부끄러웠다. 무진을 찾으러 왔다고 말해 놓고 이름 한 줄 확인하지 못하면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 봉투에는 전해진 경위와 원본을 가진 집, 더 확인해야 할 대목을 함께 적어 두었다.

어머니가 물었다.

“옛날 관아에서는 사람을 잡아오라고 적었지?”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에서는 아버지가 안 돌아왔다고 기억했을 거고.”

어머니는 노래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연은 두 문장을 수첩에 옮겼다. 

문서에서 읽었던 날짜 아래에 어머니의 말을 적었다. 펜을 떼자 부엌에서 밥을 퍼 놓고 기다리던 사람이 떠올랐다.

옆에서 어머니의 입술이 움직였다.

노랫말이 분명하게 붙지는 않았지만 가락은 따라가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밥을 짓거나 빨래를 개면서 흥얼거렸다는 노래였다. 언제 배웠는지 모르는 가락이 어머니의 입술에 남아 있었다.

한 대목에서 소리가 끊기자 어머니가 웃었다.

“잊었네.”

 

수연도 다음 소절을 알지 못했다. 가까운 곳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그 가락을 이어 갔다.

떠날 시간이 되어 수연이 가방을 챙겼다.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사당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오늘 오길 잘했어.”

수연은 어머니가 몸을 바로 세울 때까지 팔을 받쳐 주었다.

해가 기울기 전에 두 사람은 아우라지에 들렀다.

낮 동안 걷힌 구름이 산 위로 다시 모이고 있었다. 강둑에는 그늘이 먼저 내려왔고, 햇빛이 남은 물 위에서만 잔빛이 움직였다. 풀 사이로 불어온 바람에는 물가의 냉기가 섞여 있었다.

 

어머니는 멀리 걷지 않고 강이 보이는 곳에 앉았다. 

수연이 겉옷을 무릎에 덮어 주자 공책 사본을 달라고 했다.

이름이 적힌 페이지를 펼친 어머니는 무진과 원복, 그 아래의 한결을 차례로 보았다. 다음 장에는 동백이 아이를 낳고 길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동백 할머니는 한 장을 넘겨야 나오는구나.”

수연은 종이를 받아 첫 장을 다시 보았다. 남자들의 이름을 따라 정리한 줄에는 동백이 없었다. 아이를 낳고 길렀다는 이야기를 뒤에 길게 옮겨 두었으면서 처음 읽을 자리에는 이름조차 넣지 않았다.

봉투에서 빈 종이를 꺼냈다.

 

47-2 65%.png

 

변무진. 이원복. 동백.

세 이름을 나란히 적었다. 그 아래에 한결과 정명, 정숙을 쓰고 오늘 정선에 다시 온 날짜를 남겼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이름을 손끝으로 짚었다.

“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같이 왔을 텐데.”

수연은 종이를 받지 않았다. 어머니가 조금 더 보게 두었다.

 

나루에 매인 배 한 척이 물살에 흔들렸다. 

밀려 나갈 때마다 밧줄이 팽팽해졌고, 기슭으로 돌아오면 느슨하게 늘어졌다. 배 안에는 물이 조금 고여 있었다. 젖은 잎 한 장이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건 누가 물을 퍼내야겠네.”

수연은 배를 보다가 종이 위의 한결이라는 이름으로 눈을 옮겼다. 늙은 아버지를 업어 집으로 돌아온 날에도 한결은 이씨였다.

어머니는 이름들을 차례로 짚었다.

“이씨로 살았어도 이 사람들을 잊어야 하는 건 아니네.”

“네.”

 

배가 기슭 쪽으로 밀려와 가볍게 부딪혔다. 

수연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미끄러지려는 종이를 잡아 주었다. 어머니는 구겨진 가장자리를 펴고 다시 이름들을 보았다.

차로 돌아가는 길에는 작은 돌들이 발밑에서 밀렸다. 어머니가 먼저 팔을 내주었고 수연이 잡았다. 예전 녹도의 비탈에서 자신을 붙들던 팔보다 가늘어져 있었다.

수연은 어머니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차에 도착한 뒤에도 팔을 바로 놓지 않고, 문을 열어 자리에 앉을 때까지 받쳐 주었다.

 

그날 밤 숙소에서 수연은 낮에 적은 이름들을 책상 위에 놓았다.

원복의 장부와 배냇저고리, 무진의 생가를 찍은 사진도 펼쳤다. 생가의 방문 앞에는 순임의 후손이 서 있었다. 햇빛에 눈을 가늘게 뜨고 한 손에는 창호를 붙이던 붓을 들고 있었다.

수연은 사진을 한 장씩 봉투에 넣었다. 낮에 받은 연락처를 옮겨 적고, 보내기로 한 자료를 따로 모았다. 빈 종이에는 전해진 경위부터 썼다. 외할머니가 누구에게 들었는지, 자신이 어디까지 확인했는지를 차례로 적었다.

 

무진의 이름에 이르러 손이 잠시 멈췄다.

수연은 새 이야기를 보태지 않고 다음 줄에 확인하지 못한 것들을 적었다.

복도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자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가 들어와 창가를 살폈다.

“바람 들어온다. 창문 닫고 자.”

수연은 쓰던 글을 저장하고 노트북을 덮었다. 어머니는 겉옷을 의자에 걸고 침대에 앉아 부은 무릎을 문질렀다. 수연이 베개를 가져다 다리 밑에 받쳐 주자 오늘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차츰 말이 줄었다.

불을 끈 뒤에도 두 사람은 바로 잠들지 못했다.

 

창밖으로 차 한 대가 지나갔다. 

멀리서 들리던 목소리도 잦아들고, 창틀을 스치는 바람만 간간이 들렸다. 수연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낮에 접어 넣은 종이가 가방 안에 있었다. 세 이름을 나란히 적은 종이였다.

어머니가 아리랑 가락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숨소리에 가까웠으나 몇 마디를 지나면서 노랫말이 붙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수연은 어둠 속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어머니는 한동안 가락만 이어 가다가 낮보다 느린 목소리로 불렀다.

 

강 건너 불빛은 밤마다 켜지는데

우리 님 빈 배에는 이슬만 내리네.

 

끝 음이 길게 떨리다가 멎었다.

어머니가 다음 말을 찾는 동안 수연은 낮에 기억해 둔 가락에 제 말을 얹었다.

 

돌아오지 못한 님 이름을 불러 놓고

젖은 노 거두어서 아이 밥을 짓네.

 

다 부르고 나서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머니는 곧바로 잇지 않았다. 침대에서 이불이 작게 움직였고, 잠시 뒤 다음 가락이 들려왔다.

 

산길에 닳은 짚신 문 앞에 벗어 놓고

잠든 아이 이마에 찬 손을 녹이네.

 

수연은 원복의 장부에 적힌 작은 신발값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마지막 말을 지나며 가늘어졌다. 수연이 뒤를 이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어머니도 함께 불렀다. 

박자가 조금 달랐고 긴 음을 붙드는 숨의 길이도 같지 않았다. 수연은 어머니의 소리가 따라올 때까지 끝 음을 놓지 않았다.

노래가 그친 뒤 어머니가 낮게 물었다.

“그 노랫말은 어디서 들었니?”

“지금 붙였어요.”

어머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수연도 더 설명하지 않았다.

조금 뒤 어머니가 수연이 부른 대목을 다시 흥얼거렸다.

“젖은 노 거두어서…….”

다음 말이 나오지 않자 수연이 작게 받았다.

“아이 밥을 짓네.”

 

어머니는 그 소절을 끝까지 따라 부른 뒤에야 숨을 내려놓았다.

 

 -----------------------------------------------------

 

『녹도아리랑』을 마치며 — 이름 아래에 사람이 있었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도 한동안 원고를 닫지 못했습니다. 무진은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동백은 젖은 노를 거두어 아이의 밥을 지어야 했습니다. 원복은 다시 등짐을 졌으며, 순덕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의 자리를 오래 지켰습니다. 연재는 여기서 마치지만, 그 사람들이 살아낸 하루는 쉽게 마음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녹도아리랑』을 쓰며 자주 멈춘 곳은 기록의 짧은 문장 앞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붙잡았다는 말, 벌을 내렸다는 말, 몇 사람이 죽었다는 말. 그 몇 줄을 읽고 나면 잡혀간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집이 궁금했습니다. 저녁밥은 누가 지었을까. 대문 밖으로 나간 아이는 누구의 손을 잡고 돌아왔을까. 죽은 사람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부른 이는 누구였을까.

 

이 소설은 그 물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정선의 산과 강에 전해 오는 이름들을 따라가며, 저는 그 이름을 지키던 사람들의 끼니와 일터를 생각했습니다. 칠현의 절개를 이야기하던 집에도 먹을 보리가 필요했고, 금점과 산판에서는 일한 사람들이 품삯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무진이 품었던 뜻도 그 삶 가까이에 놓고 싶었습니다. 일한 만큼 받고, 억울한 일을 밝히고, 다친 사람을 버려두지 않는 일.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 그에게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바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쓰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남겨진 사람들을 따라가는 일은 더 오래 걸렸습니다. 동백은 슬퍼하는 동안에도 아이를 먹여야 했고, 원복은 어린 한결에게 신발을 사 주어야 했습니다. 족보에서 이어지지 않은 이름이 누군가의 품과 등에서 다음 세대로 건너갔습니다. 마지막에 모녀가 함께 부르는 노래까지 쓰고 나서야, 그 사람들을 조금은 보내 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 작품은 역사적 기록과 전승을 바탕으로 상상해 쓴 소설입니다. 인물의 대화와 내면, 기록의 빈 곳을 잇는 여러 장면은 창작입니다. 확인한 사실과 소설로 그려 낸 삶 사이를 살피려 애썼지만,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 부족함은 쓰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마흔여섯 편을 함께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정선의 산길과 나루, 어두운 갱도와 형장, 남겨진 사람들의 방까지 함께 걸어 주셨습니다. 긴 연재를 마치고 돌아보니, 이야기를 끝까지 써 낸 기쁨만큼 그 길을 함께 와 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이 큽니다.

무진과 동백, 원복과 순덕이 저마다 살아 있던 얼굴로 잠시라도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 머물렀다면, 이 연재를 쓴 보람은 충분합니다.

 

원고를 덮으며 저는 마지막 노랫말을 다시 읽습니다.

 

“젖은 노 거두어서 아이 밥을 짓네.”

 

 

 

그 밥을 먹고 자란 아이가 누군가를 업고, 그 뒤의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의 팔을 받쳐 주며 오늘까지 왔습니다. 『녹도아리랑』을 마치는 지금,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그렇게 서로를 데리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

부록|정선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동학운동사

 

정선(旌善)은 동학농민혁명의 전투와 희생만으로 기억할 지역이 아니다. 탄압으로 흩어진 교도들이 몸을 숨기고, 최시형(崔時亨)이 교단을 다시 세우며 가르침을 전한 재건의 거점이었다. 남면 문곡리의 무은담(霧隱潭)과 갈래산 적조암(寂照庵)은 그 역사를 보여준다.

갑오년(甲午年·1894년)에는 정선과 인접 고을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관아를 점령하였으며, 여량(餘糧)과 녹도에서는 진압과 희생이 이어졌다. 정선은 동학의 재건과 확산, 농민항쟁과 그 이후의 탄압을 함께 살펴보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다.

 

1. 주요 연표

※ 월일은 별도 표시가 없는 한 음력이다. 지명은 당시 명칭을 기본으로 하되 현재 지역명을 함께 사용하였다. 당시 행정구역은 오늘날과 달라, 현재 정선·평창·홍천에 속하는 일부 지역이 강릉의 관할에 포함되어 있었다.


1860년

경주(慶州)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창도하였다.

1863년

8월 경상도 해월(海月) 최시형이 최제우에게 도통을 계승하여 동학 제2대 교주가 되었다.

1864년

최시형은 관헌의 추적을 피해 태백산(太白山) 일대 등 각지를 옮겨 다니며 교도들을 결속하고 교단 재건을 추진하였다.

1868년

최시형의 포교 활동이 양양(襄陽) 등 강원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산간 마을들이 피신과 포교의 거점이 되었다.

1871년

이필제(李弼濟)의 영해 봉기 이후 탄압이 강화되었다. 최시형은 영월·정선·인제 등 강원도와 충청도 산간 지역에서 교단의 기반을 다시 마련하였다.

1872년

최시형과 동학 지도자들이 정선 남면 문곡리(文谷里) 무은담에 있는 유시헌(劉時憲)의 집을 동학 포교의 거점으로 사용했다. 무은담은 피신과 비밀 포교, 교단 재건의 주요 장소가 되었다.

1872∼1873년

정선 갈래산 적조암에 최시형과 교도들이 수련하였다. 유시헌의 집을 중심으로 식량 등이 조달되었다. 입산 연도는 관련 기록에 차이가 있다.

1880년 인제

최시형이 경전 인쇄소를 설치하고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였다.

1888년

인제의 인제접에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龍潭遺詞)』를 다시 간행하였다.

1892∼1893년

삼례·서울·보은에서 동학교도들이 최제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교도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강원도 교도들도 교조신원운동에 참여하였다.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고부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지방관의 수탈에 맞서는 개혁 운동과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쟁으로 확대되었다.

1894년 여름∼가을

원주·영월·평창·정선지역 동학의 접 조직과 농민군의 활동이 확대되었다. 관군 문서에도 이들 지역에서 동학 세력이 성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894년 9월 4일

강릉·정선·평창·영월 등지의 농민군이 강릉 읍내에 진입하여 관아를 점령하였다. 농민군은 삼정의 폐단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할 것을 요구하였다.

1894년 9월 7일

민보군의 기습 공격으로 농민군이 강릉에서 물러났다.

1894년 9월 18일

동학교단최시형이 기포를 지시하였다. 강원도에서는 이에 앞서 지역 농민군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1894년 10월 하순

정선 읍내에 정선·영월·평창의 농민군이 제천·청주 지역 농민군과 연합하여 정선 관아를 습격·점령하였다. 군수는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임영토비소록』에는 이 과정에서 이방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4년 가을

관아 점령 전후 정선 읍내 『동비토론』에는 정선 읍내에 농민군 3천여 명이 모였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는 당시 정선이 강원 남부와 인접 지역 농민군의 주요 집결지였음을 보여준다.

1894년 10월 21∼22일

홍천(洪川) 장야촌·풍암리에서 홍천 농민군이 관군·포군과 전투를 벌였다.

1894년 10월 하순∼11월

강릉에서 출동한 진압군이 평창 봉평·홍천 내면에서 온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산간 지역에서 저항하였으나 여러 방향에서 들어온 진압군에 밀렸다. 1894년 11월 3일평창 대화 일대에 일본군이 도착해 관군과 합세하였다.

1894년 11월 5일

평창 후평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패한 농민군 일부는 정선 등지로 이동하였다.

1894년 11월 6일

진압군이 정선으로 들어와 정선 읍내·여량에 산재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여량의 접소와 지도자들의 집이 불탔으며, 체포와 추격이 이어졌다.

1894년 11월

정선 녹도. 정선으로 물러난 농민군이 일본군과 감영군의 공격을 받았다. 녹도는 농민군의 전투와 처형이 전해지는 장소다. 정확한 전투일과 전체 희생자 수는 단정하기 어렵다.

1894년 11월 22일

강릉 『임영토비소록』에 따르면 차기석(車箕錫)·박학조(朴學祚)가 처형되었으며, 여량 농민군 지도자 이중집(李仲集) 등도 살해되었다.

1894년 11월 25일

정선·강릉 관할 지역. 여량 농민군 지도자 지왈길(池曰吉)이 붙잡혀 처형되었다. 『동비토론』의 다음 날 보고에 처형 사실과 날짜가 남아 있다.

1894년 겨울∼1895년 초

정선 및 인접 지역 지도자와 잔여 농민군에 대한 수색·체포가 계속되었다. 유시헌의 가족들도 탄압을 겪었다. 아들 유택하는 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된 뒤 탈출하였으며, 『동학난중기』를 남겼다.

1895년 1월 7일

일본군이 해를 넘겨서도 정선에 주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관문이 작성되었다. 주둔군을 위해 쌀과 반찬을 보내고 진영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897년

동학교단최시형이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1898년

최시형이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처형되었다.

 

기록을 읽을 때 유의할 점

 

정선에 집결한 3천여 명은 관군의 정탐 보고에 나타나는 추산 인원이다.

이를 녹도 한 곳에 모인 병력이나 전사자 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또한 관아 점령 당시의 폭력에 관한 기록은 진압 측에서 작성한 사료라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지왈길의 처형일은 사료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 연표는 처형 다음 날 작성된 『동비토론』의 보고에 따라 음력 11월 25일로 표기하였다. 양력으로는 1894년 12월 21일이다.

 

2. 정선 동학운동의 주요 유적지

 

무은담(霧隱潭) — 교단 재건과 비밀 포교의 거점

정선군 남면 문곡리에 있던 유시헌의 집터이다. 유시헌은 본래 유인상으로 불렸으며, 최시형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교단 재건을 도왔다. 무은담은 지도자들이 잠시 몸을 숨긴 장소를 넘어 교도들이 모이고 수련과 포교를 이어간 거점이었다. 현재의 집터는 정선이 동학의 재건 과정에서 맡았던 역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갈래산 적조암(寂照庵) — 탄압 속에서 가르침을 이어간 수련터

갈래산의 적조암은 최시형과 동학 지도자들이 수련한 곳이다. 이필제의 봉기 이후 교단이 심한 탄압을 받던 시기, 이들은 산중에서 기도와 수련을 이어가며 재건의 기반을 다졌다. 무은담에서 식량을 조달했다는 기록은 산중의 수련이 지역 교도들의 도움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입산 연도와 세부 일정에는 기록상의 차이가 있으므로, 특정 날짜를 확정하기보다 1870년대 초 동학 재건의 수련터로 소개하는 것이 적절하다.

 

싸내 — 수운의 유족을 품었던 피신처

정선군 화암면(畵岩面) 화암리의 싸내는 최제우의 부인 박씨가 피신하여 말년을 보낸 곳으로 전한다. 지도자의 죽음 뒤에도 남은 가족을 돌보았던 교도들의 삶을 보여주는 장소이다. 무은담과 적조암이 교단 재건의 역사를 전한다면, 싸내는 탄압 속에서 유족의 생계를 보살피고 서로 의지했던 역사를 전한다.

 

여량(餘糧) — 지왈길·이중집과 농민군의 활동 지역

여량은 지왈길과 이중집 등이 이끄는 농민군의 주요 활동 지역이었다. 1894년 진압 과정에서 접소와 지도자들의 집이 불탔고, 체포와 처형이 이어졌다. 여량의 동학 역사는 한 건물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접소 터, 인접 지역으로 이어지는 활동 경로를 함께 살펴야 하는 역사이다.

 

녹도 — 전투와 집단 희생이 전해지는 장소

정선 읍내 조양강(朝陽江) 주변의 옛 녹도는 동학농민군의 전투와 처형이 전해지는 곳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은 이곳을 ‘정선 애산리 녹도 동학농민군 전적지’로 소개한다. 후평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정선에서 다시 공격받았으며, 녹도 둔치의 소나무숲에서 포로들이 처형되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다만 당시 섬의 범위와 교전·처형 지점을 현재의 지형에 정확하게 대응시키는 데에는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정선 관아 터 — 농민군이 지방 권력에 맞섰던 현장

1894년 10월 하순 농민군이 습격·점령한 정선 관아는 정선 항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장소이다. 농민군의 집결과 관아 점령은 정선의 동학운동이 은신과 포교의 단계를 넘어 지방 통치 질서에 직접 맞서는 항쟁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관공서 위치를 당시 관아의 정확한 경계와 동일하게 보지는 않아야 한다.

 

3. 주요 참고자료

자료 저자·성격 참고할 내용

『정선총쇄록(旌善叢鎖錄)』오횡묵(吳宖默)의 정선군수 재임 기록

1887년 3월부터 1888년 8월까지의 지방 행정, 광산 개발, 세금과 민폐, 재해와 진휼 등을 살펴볼 수 있다.

1894년 항쟁의 직접 기록이 아니라, 그 이전 정선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이해하는 자료이다.

정선문화원의 『국역 정선총쇄록』.

 

『동학난중기(東學亂中記)』유시헌의 아들 유택하(劉澤夏)의 기록

농민혁명 참여와 체포·탈출, 탄압 속에서 겪은 고초를 전하는 자료이다. 정선 동학 지도자와 가족의 경험을 살펴보는 데 중요하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

 

『동비토론(東匪討論)』

강원도 농민군 진압 관련 공문서 모음. 정선 농민군 3천여 명의 집결, 후평 전투, 농민군 추격, 지왈길의 처형, 일본군 주둔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진압 측의 시각과 표현을 고려하여 읽어야 한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임영토비소록(臨瀛討匪小錄)』

강릉의 농민군 진압 경과를 서술한 기록이다.

강릉 관아 점령과 퇴각, 정선 관아 점령, 여량 공격, 이중집 등의 처형을 살펴볼 수 있다. 사건의 날짜와 평가는 다른 사료와 대조할 필요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원기서(道源記書)』 및 동학·천도교 교단사 자료 초기 동학과 교단 재건에 관한 기록최시형의 활동, 교도들의 피신과 수련, 무은담 등 포교 거점의 역사를 살펴보는 자료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의 유적지·참여자 자료유적 조사 및 참여자 관련 자료

무은담·녹도 등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 유택하를 비롯한 참여자의 행적을 확인하는 데 참고하였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소설 속 창작 인물과 대화, 세부 전투 장면은 이 연표에 포함하지 않았다. 유적지는 현존 건축물뿐 아니라 집터·활동 지역·전적지·전승 장소를 함께 가리킨다.

 


 

ⓒ 정선신문 & jsweek.net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전체댓글 0

추천뉴스

  • 강원랜드 한가위 전통시장 찾아 지역상권 활성화 나서
  • 추석 연휴에도 정선 관광시설 문 활짝
  • 정선군 목재문화체험장 인기
  • “농어촌 기본소득 바람·사전투표 압승…최승준 징검다리 4선 견인”
  • 최승준 민주당 후보 정선군수 당선 확정
  • 공연 보면 케이블카 반값… 정선형 ‘문화관광 패키지’ 뜬다
  • 최승준 정선군수 후보, 막판 표심 공략 총력…“129 민간구급차 지원 추진”
  • 차 한 잔의 행복 - 달팽이 뿔 위 에서 의 싸움
  • 정선군 예미농공단지 공공폐수처리시설 2단계 증설
  • 강원랜드, 태백진로박람회서 청소년 도박예방 캠페인 전개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연재소설|녹도아리랑 ㊻] 빈 배에 남은 노래 -끝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