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제45부 — 이름을 찾다가 멈춘 사람
1994년 가을, 수연은 외할머니 이정숙의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와 함께 빈집을 정리했다.
마당의 감나무는 잎을 거의 떨구었다.
비에 젖은 몇 장만 가지 끝에 붙어 있었고, 바람이 불면 처마 가까이 기울었다가 힘없이 돌아갔다. 장례 동안 마루를 메웠던 신발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먼지가 얇게 내려앉았다.
어머니는 방문을 열어 놓고도 한동안 들어가지 않았다. 아랫목의 이불과 벽에 걸린 달력, 머리맡의 약봉지가 같은 자리에 있었으나, 방 안에서는 더 이상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수연이 부엌에서 물을 받아 걸레를 빨았다.
찬물에 손을 담그자 손가락 마디가 먼저 저렸다. 외할머니가 쓰던 냄비에는 마른 물자국이 남아 있었고, 찬장 안의 밥그릇들은 엎어진 채 서로의 굽을 받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중 하나를 꺼내 밑바닥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이건 가져가야겠다.”
외할머니는 일흔을 넘긴 뒤부터 사람의 이름을 자주 놓쳤다.
딸을 부르다 오래전에 죽은 오빠 정명의 이름을 대기도 했고, 수연을 알아보지 못하는 날에는 밥은 먹었느냐는 말만 거듭 물었다. 수연은 마지막 몇 해 동안 외할머니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보다 무엇을 먹었는지를 더 자주 알려 드렸다.
그런데 첫눈이 내리면 외할머니는 부엌을 향해 밥 한 그릇을 더 놓으라고 했다.
어머니가 누구 몫이냐고 물었을 때에는 숟가락의 자루를 밥상 안쪽으로 가지런히 돌려놓으며 대답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
가족들은 흐려진 기억이 오래된 제삿날을 잘못 불러낸 것이라고 여겼다.
그 밥을 누구에게 배웠는지, 식은 밥을 치우면서 왜 창밖을 오래 바라보는지까지 물은 사람은 없었다. 눈이 그치고 마당에 발자국이 생기면 외할머니도 더는 그릇을 찾지 않았다.
어머니는 장롱부터 버리자고 했다.
문짝이 뒤틀려 닫히지 않았고, 바닥에는 좀이 파먹은 나뭇가루가 쌓여 있었다.
수연이 아래 서랍을 빼내자 뒤쪽 틈에서 납작한 꾸러미가 따라 나왔다. 손끝으로 끌어당기는 동안 천이 나무에 걸렸으며, 매듭을 풀기도 전에 묵은 먼지가 무릎 위로 쏟아졌다.
꾸러미에는 누렇게 바랜 배냇저고리와 접힌 종이 몇 장, 표지가 떨어진 공책이 들어 있었다. 저고리의 소매는 수연의 손가락 몇 개를 넣으면 다 찰 만큼 작았다. 옆구리에는 빛깔이 다른 천이 덧대어져 있었고, 겨드랑이 아래의 바늘땀은 촘촘하다가 한 곳에서 크게 벌어졌다.
접힌 종이에는 사람의 이름이 세로로 적혀 있었다.
변무진. 이원복. 이한결.
그 아래에 다른 손이 이정명과 이정숙을 덧붙였다.
붓글씨 곁으로 연필 자국이 이어졌고, 그슬린 가장자리에는 얇은 종이를 대어 붙였다. 먼저 쓰인 글씨를 피해 뒤의 사람이 제 몫의 이름을 보탠 종이였다.
“우리 집안에 변씨가 있었어?”
어머니가 종이를 창 쪽으로 기울였다.
“나는 처음 듣는다. 할머니도 그런 말씀은 안 하셨어.”
수연은 공책을 펼쳤다.
앞부분에는 병원에 간 날짜와 약 이름이 적혀 있었고, 몇 장 뒤부터 외할머니의 글씨가 나왔다. 줄을 맞추려다 비뚤어진 문장 사이로 지운 자국이 많았다.
아버지 한결은 원복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 출생을 알았다. 낳은 아버지는 변무진이라고 했다. 동백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아무에게나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저고리를 내려놓았다.
다음 장에는 원복이 장에서 가져왔다는 물건들, 동백이 겨울마다 말려 두었다는 헝겊, 한결이 어릴 때 신었던 짚신의 크기가 적혀 있었다. 그 사이에 무진은 아이가 생긴 줄 모르고 떠났으며, 동백과 원복이 함께 한결을 길렀다는 대목이 끼어 있었다.
두 사람이 낳은 아이들의 이야기도 나왔다.
한결은 동생들을 업어 주었고, 원복이 장에 나간 날에는 어린것들이 잠든 뒤에야 제 자리에 누웠다고 했다.
어머니는 저고리를 다시 무릎에 펼쳤다. 한쪽 소매를 펴고 다른 소매도 같은 길이로 맞추었다.
“한결 할아버지 옷인가 보다.”
공책 끝에는 오빠 정명에게 들은 이야기를 잊기 전에 옮겨 놓는다는 말이 있었다. 몇 장 앞에는 무진의 생가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었다.
아버지는 그 집을 순임 이모에게 넘겼다.
순임 이모는 무진의 누이였다. 뒤에는 그 자손들이 집을 돌보았다.
수연은 그 대목을 두 번 읽었다.
“집이 남아 있나 봐.”
어머니가 얼굴을 들었다.
“무진이 태어난 집?”
“응. 한결 할아버지가 이모에게 넘겼대. 그 뒤로는 이모네 자손들이 돌봤고.”
한 장 위쪽에는 변귀수라는 이름이 있었다.
거칠현에 들어간 선비의 후손이라는 말 아래로 변한필과 석주, 무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먼 선조에게서 그들까지 이르는 이름들이 모두 적혀 있지는 않았다.
수연은 공책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정선에 가봐야겠어.”
“그 사람을 찾으러?”
“무진이라는 이름이 어디에 남아 있는지, 그 집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보고 싶어.”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공책의 낱장을 들었다. 어머니가 손바닥으로 눌러 주었다.
“나도 가자.”
그날 두 사람은 장롱을 버리지 못했다. 빠진 서랍만 다시 밀어 넣었으나 끝까지 들어가지 않아 손가락 두 마디만큼 벌어진 채 남았다.
정선으로 가는 버스는 비에 젖은 고개를 넘었다.
굽이를 돌 때마다 창유리의 물방울이 옆으로 길게 흘렀다. 골짜기의 강은 산에 가렸다가 낮은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수확을 마친 밭에는 잘린 줄기들이 검게 젖어 있었다. 무밭에서는 우의를 입은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버스가 지나간 뒤에도 그 사람의 등이 한동안 수연의 눈에 남았다.
어머니는 꾸러미를 무릎에 놓고 졸았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손이 먼저 움직여 천의 매듭을 붙잡았다. 휴게소에서 산 따뜻한 음료는 반도 마시지 못한 채 식어 있었다.
수연은 공책에서 옮겨 적은 지명들을 살폈다. 아우라지, 남면, 무은담, 싸내, 녹도. 집에서는 한 페이지에 모여 있던 이름들이었으나, 버스는 그 사이를 오래 달렸다. 고개 하나를 넘는 동안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 물을 마셨고 다시 잠들었다.
정선읍에 도착했을 때에는 비가 가늘어졌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처마 밑에서 우산을 폈고, 가게 앞에 내놓았던 상자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신발에 붙은 젖은 낙엽을 떼려 하자 수연이 가방을 내려놓고 대신 떼어 주었다.
정선문화원 자료실에는 난방이 들어오기 전의 냉기가 남아 있었다.
직원이 내준 책을 펼치자 묵은 종이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외투를 벗지 않은 채 수연 곁에 앉아 공책의 모서리를 펴 놓았다.
군사를 보내라는 명령, 누구를 붙잡으라는 전령, 농민군이 어느 길로 이동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수연은 같은 고을의 이름이 달리 적힌 곳을 따로 옮겼고, 뜻이 분명하지 않은 대목에는 표시를 해 두었다.
지왈길과 유시헌의 이름은 관련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무진은 보이지 않았다.
수연은 성을 달리 읽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앞뒤의 이름까지 살폈으나, 공책 속의 사람과 이어 붙일 만한 근거를 얻지 못했다.
“여기에는 없니?”
어머니가 한참 뒤에 물었다.
“오늘 본 자료에서는 못 찾았어.”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수연이 읽어 준 토벌 명령을 손끝으로 따라가다가 집으로 돌아간 사람까지 붙잡으라는 대목에서 멈췄다.
“돌아가서 밭을 갈고 있어도 잡았다는 거구나.”
수연은 문서의 제목과 날짜를 수첩에 적고, 외할머니의 공책을 곁에 펼쳐 내용을 대조했다. 자료에서도 확인되는 이야기는 따로 표시했으나, 무진의 이름이 적힌 대목에서는 펜을 멈췄다. 앞뒤 페이지를 다시 살펴도 그와 관련된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수연이 책장을 넘기는 동안 말없이 기다렸다. 오후의 햇빛이 책상 끝으로 들어와 꾸러미 밖으로 드러난 배냇저고리를 비추었다. 어머니는 작은 소매를 꾸러미 안으로 넣으려다 손끝으로 가만히 펴 놓았다.
“이 옷을 입었던 사람은 살아서 자식도 낳았는데, 그 사람 아버지는 이름 하나 찾기가 이렇게 어렵네.”
수연은 한결이 장에 다니던 대목을 펼쳤다. 원복에게 길을 배우고, 아버지가 늙자 등짐을 대신 졌다는 기록이었다.
무진의 이름이 나오는 몇 줄을 찾느라 그동안 서둘러 넘긴 페이지들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산그늘이 거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두 사람은 김이 서린 식당 유리문을 밀었다. 안에서는 젖은 외투 냄새와 된장 끓는 냄새가 함께 났다.
어머니는 국그릇이 놓이자 가방을 의자 안쪽으로 옮겼다.
“내일은 그 집부터 가자.”
두 사람은 남면사무소에 닿기 두 정거장 앞에서 버스를 내려 골짜기 안으로 한참을 걸었다. 변무진이 살았다는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밤새 내린 비가 고여 있었다. 낙엽 밑의 흙이 물러 발을 디딜 때마다 신발 가장자리로 흙탕물이 배어 나왔다.
골짜기의 안개는 바람에 찢어졌다가 나무 뒤에서 다시 엉겼다. 어머니는 오르막마다 숨을 고르며 꾸러미를 다른 팔로 옮겼다. 길을 알려 준 노인이 갈림길에서 손을 들어 집 쪽을 가리켰다.
“순임 어른 자손들이 돌보는 집 말이지요? 저 위에 있습니다.”
조금 더 올라가자 낮은 담 너머로 지붕이 보였다. 집은 골짜기 물길보다 조금 높은 산비탈 아래에 붙어 있었다. 뒤로는 소나무가 비탈을 덮었고, 앞으로는 작은 밭들이 냇가까지 내려갔다. 밭 가장자리에는 골라낸 돌들이 쌓여 있었으며, 거둔 줄기 사이로 드러난 고랑은 땅속에 박힌 바위를 피해 휘어졌다. 공책에 적힌 보리와 감자, 조와 콩은 없었지만 밭을 일군 자리는 남아 있었다.
대문을 열어 준 사람은 순임의 후손이었다. 가까운 곳에 살며 집을 돌본다고 했다.
이정숙의 이름을 듣자 정명 어른의 누이냐고 되물었고, 어머니가 그렇다고 하자 대문을 더 크게 밀었다.
“미리 알았으면 방을 좀 덥혀 놓았을 텐데요.”
마당에는 솔잎과 낙엽이 젖어 있었다. 산등성이를 넘어온 볕이 담 한쪽에 닿았으나 집 앞까지 내려오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풀었던 옷깃을 여미다가 사랑방 앞뜰에서 멈췄다.
늙은 도수매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공책에는 변귀수가 심은 나무에서 이어졌다고 전하지만 한필도 그 내력을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적혀 있었다. 밑동의 검게 팬 구멍과 처마 쪽으로 뻗다가 아래로 굽은 가지에 관한 기록도 있었다.
눈앞의 나무는 속이 깊이 비어 있었다. 구멍 안에는 젖은 잎이 붙어 있었고, 한쪽으로 두껍게 자란 줄기가 가지를 받치고 있었다. 오래전에 잘라 낸 자리 곁에서 새 가지가 돋아 잎 몇 장을 달고 있었다.
어머니가 꾸러미를 한 팔에 모아 안고 가까이 다가갔다.
갈라진 껍질에 손을 대려다 거친 조각이 들뜬 것을 보고 손끝을 거두었다.
“이 나무구나.”
수연은 처마 쪽으로 굽은 가지 아래를 바라보았다. 석주가 지게를 멘 몸을 옆으로 틀어 지나갔다는 자리였다. 가지 끝은 몇 차례 잘라 낸 듯했으나 굽은 모양은 남아 있었다. 어머니가 먼저 고개를 숙여 지나갔고, 수연도 뒤따라 몸을 낮추었다.
지붕에는 너와가 겹겹이 놓여 있었다. 검게 바랜 널쪽 사이로 새 나무가 옅은 빛을 드러냈다. 그 위를 누른 돌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수연은 처마 가까이 얹힌 돌을 올려다보았다. 장마 전에 지붕에 올라 삭은 너와를 갈았다는 석주도 저만 한 돌을 들어 내리고 다시 얹었을 것이다.
흙기단은 무너진 곳마다 돌을 받쳐 고쳤다.
바깥으로는 빗물이 빠져나갈 얕은 도랑이 나 있었다. 벽도 덧바른 곳마다 빛깔이 달랐다.
처마 깊숙한 곳의 오래된 흙벽에는 갈라진 틈으로 짚오라기가 드러났으며, 기둥과 맞닿은 자리에 손가락으로 눌러 메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한 지붕 아래 사랑방과 식구들의 온돌방, 부엌이 바투 붙어 있었다. 문짝과 창호는 새로 손봤지만 좁은 마루에는 옛 판자가 남아 있었다. 가운데가 닳아 조금 움푹했고, 부엌으로 돌아드는 모서리는 오래 쓸려 둥글어져 있었다.
순임의 후손이 마루의 낙엽을 쓸어 내는 동안 수연은 사랑방 쪽을 바라보았다.
열린 방문 너머, 한필이 글을 읽었다는 방의 창 가까이 도수매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다. 잎 하나가 흔들리자 방 안의 희미한 그림자도 움직였다.
어머니가 꾸러미를 고쳐 안았다.
수연이 먼저 마루에 올라서자 오래된 판자 하나가 발밑에서 낮게 울었다.
어머니는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벽 쪽에 앉았다. 수연도 따라 들어가 공책을 펼쳤다.
“한결 할아버지가 순임 이모에게 집을 넘겼다고 적혀 있어요.”
그는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집을 넘기고도 오셔서 손볼 데를 살폈다고요. 순임 할머니 뒤에는 자식들이 맡았고, 지금은 저희가 번갈아 봅니다.”
“계속 사람이 살았나요?”
“살던 때도 있고 비워 둔 때도 있었지요. 그래도 지붕은 그냥 두면 안 됩니다. 물이 새면 방까지 금방 상하니까.”
그는 지난여름 비가 들이쳐 손본 처마를 가리켰다. 수연은 받아 적다가 펜을 멈췄다. 집을 넘겼다는 공책의 한 줄 뒤에, 비가 샌 곳을 살피고 썩은 나무를 갈아 끼운 날들이 이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방에서 나와 부엌 앞에 섰다.
아궁이 위의 벽과 낮은 들보에는 그을음이 검게 배어 있었고, 처마 끝에서 떨어진 물이 돌 위에 부딪혔다.
“순덕 할머니도 여기서 밥을 지었겠지.”
수연이 다가가자 어머니는 문설주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놓았다.
“아들은 밖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다 말하지 않았을 테고, 어머니는 돌아오면 밥부터 내주었을 것 같아.”
수연은 부엌에서 마루까지 걸어 보았다.
좁은 모서리에서 몸을 틀고 문턱을 넘으며 고개를 숙였다. 뒤따라오는 어머니에게 길을 내주려 한 발 옆으로 물러섰다.
마루에 앉자 건너편 산에서 안개가 벗겨지고 있었다. 바람이 처마의 물방울을 떨어뜨렸고, 젖은 잎들이 마당에서 뒤집혔다. 순임의 후손은 빗자루로 잎을 밀어 냈다.
집을 나온 두 사람은 칠현(七賢)을 모신 사당에 들렀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젖은 흙 냄새 대신 오래된 나무와 향의 냄새가 났다. 어머니는 위패(位牌) 앞에 멈춰 변귀수(邊貴壽)의 이름을 입술로 읽었다.
수연은 공책을 펼쳤다.
일곱 사람이 산으로 들어갔고, 그 뒤의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그 아래에 변한필과 석주, 무진의 이름이 이어졌다. 먼 선조에게서 그들까지 내려오는 계보에는 빈 곳이 많았다. 그러나 그 집에서 살던 사람들의 사정은 남아 있었다. 절개를 지키려 했던 변한필, 홍수 뒤에도 줄지 않은 도지를 두고 관아에 불려간 석주,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려고 소장을 냈던 무진.
어머니는 위패를 보다가 물었다.
“그분의 후손이라는 걸 알아내면, 그 뒤에는 뭘 쓰려고?”
“어떻게 살았는지 쓰고 싶어. 무슨 일을 했고, 무엇 때문에 집을 나갔는지.”
“집에서 기다린 사람도 써야겠다.”
어머니가 문밖의 빛 쪽으로 몸을 돌렸다.
수연은 공책을 덮고 따라 나왔다.
사당 앞 돌계단에는 젖은 잎이 붙어 있었다. 어머니는 발을 옆으로 놓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정선읍에서 철물점을 하는 이재성은 한결의 동생 집안으로 이어지는 후손이었다.
원복과 동백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후손 가운데 정선에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가게 앞에는 삽과 낫이 걸려 있었고, 문턱 아래에는 손님들이 묻혀 온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안쪽의 석유난로가 붉은빛을 내고 있었다.
재성은 먼 친척이 찾아왔다며 의자를 내주었다.
외할머니와 정명의 이름을 되묻더니 기억나는 집안 어른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수연이 공책의 내용을 설명하자 난로 쪽으로 돌려놓았던 몸을 바로 앉혔다.
“한결 어른 아버지가 따로 있었다고요?”
그는 공책을 받아 들고 누가 쓴 글인지,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지를 먼저 물었다.
수연은 아는 만큼 대답했다.
외할머니가 쓴 것은 알지만, 모든 대목의 출처가 분명하지는 않다고 했다.
재성은 한결의 출생을 적은 페이지에서 손을 멈췄다.
“원복 어른이 한결 어른을 맏아들로 키우셨는데,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사정이 있었다는 말이군요.”
“공책에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재성은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반가워서 내주었던 의자와 수연 사이에 그의 무릎이 비스듬히 놓였다.
그는 공책을 내려놓고 가게 안쪽에서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한결의 동생들 쪽 후손이라는 나이 든 남자와 중년 여자가 들어왔다. 남자는 외투를 벗지 않은 채 글부터 읽었다.
“원복 어른은 한결 어른을 당신 아들로 길렀습니다. 그런데 그 사정이 밖으로 나가면 남의 아이를 맡아 키운 사람으로만 남을까 걱정입니다.”
여자는 한결의 출생을 적은 줄을 손끝으로 짚었다.
“그러면 우리 동백 할머니가 재취했다는 거예요? 밖에서 들으면 남의 아이를 데리고 원복 할아버지한테 왔다고 할 것 아니에요.”

어머니가 가방의 손잡이를 놓았다.
“누굴 흉보려고 온 게 아닙니다. 저희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그럴 생각이 없어도 말이 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한테도 우리 할머니가 있어요.”
여자는 손을 거두고 의자 등받이에 등을 붙였다. 남자가 공책을 수연 쪽으로 밀었다.
“두 분이 어떻게 사셨는지는 뒷전이고, 동백 할머니가 누구 아이를 데리고 왔느냐는 말만 돌 수도 있습니다. 그게 걱정입니다.”
수연은 공책의 모서리를 받쳤다.
“그냥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거칠현에 들어간 변귀수 옹의 후손들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요. 무진이라는 사람은 왜 돌아오지 못했고, 동백 할머니와 원복 할아버지는 어떻게 한결 할아버지를 길렀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난로 위 주전자의 뚜껑이 작게 떨렸다. 재성이 불을 낮추었다.
“외할머니가 첫눈 오는 날마다 밥을 한 그릇 더 놓으셨어요. 저희는 누구 밥인지도 몰랐습니다.”
여자는 어머니를 잠시 바라보았으나 뜻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 마음은 알겠지만 우리는 반대합니다. 다른 후손들한테까지 찾아가 묻지는 마세요.”
남자도 같은 뜻이라고 했다. 수연은 공책의 찢어진 모서리를 안쪽으로 넣어 덮었다.
두 사람이 먼저 가게를 나간 뒤에도 재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내주고 돌아와서는 난로 앞의 빈 의자를 옆으로 밀었다.
“집안에 원복 어른 것이라고 전하는 장부가 있습니다. 출생 이야기는 없을 겁니다.”
그는 뒤편에서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족보를 옮겨 적은 종이 밑에 낡은 장부가 있었다. 물건을 들인 값과 받은 돈, 아직 받지 못한 몫이 짧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소금과 포목, 장을 보러 다닌 곳의 이름 사이로 집안에서 쓴 돈이 끼어 있었다.
한결 신. 약값. 쌀.
세 항목은 서로 다른 날짜에 떨어져 있었다. 무진의 이름도, 한결의 출생을 설명하는 문장도 없었다.
어머니는 약값 대목을 오래 보았다.
“아이가 아팠던 모양이네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나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재성은 사진을 찍는 것은 허락했지만 장부를 내주지는 않았다.
수연이 카메라를 꺼내자 책상 위의 물건을 치워 주었다. 어머니가 장부를 눌러 펴려 하자 그는 작은 쇳덩이를 천에 싸 모서리에 놓았다.
촬영을 마친 뒤 재성이 말했다.
“이걸 보여 줬다고 그 이야기에 동의한 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한결 어른은 우리한테도 큰할아버지예요. 그건 같습니다.”
수연은 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재성은 장부의 벌어진 귀퉁이를 쓸어 누른 뒤 상자에 넣었다.
가게 밖에는 저녁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우산을 수연 쪽으로 기울였다.
“우리가 와서 저 사람들 마음만 뒤집어 놓은 것 같네.”
수연은 젖은 보도블록을 내려다보았다.
“그럴 수도 있어.”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는 사진을 몇 장 찍었는지 물었다. 한결의 약값이 적힌 페이지도 빠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수연은 찍은 순서를 수첩에서 찾아 읽어 주었다.
녹도로 가는 날에는 서리가 내렸다.
길가의 풀들이 희게 누웠고, 해가 드는 곳부터 물방울이 맺혔다. 어머니는 젖은 풀을 피하려고 발을 골랐으나 몇 걸음 지나지 않아 신발 앞코가 축축해졌다.
수연은 공책의 지명을 다시 확인했다.
녹도(鹿島).
눈앞에서는 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강을 건너는 다리가 여러 곳에 놓여 있었다.
정선역이 들어선 자리로 길과 철길이 이어졌다. 차들은 멈추지 않고 다리를 건넜으며, 역 쪽에서 나온 사람이 가방을 들고 걸어갔다.
어디에서 물이 갈라져 섬을 둘렀는지, 어느 기슭에서 배를 기다렸는지 짚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다리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가 섬이었다는 거지?”
“응.”
“이제는 어디가 섬이었는지도 모르겠네.”
차가 지나갈 때마다 발밑에서 낮은 떨림이 올라왔다. 수연은 난간에 손을 얹었다가 차가운 쇠의 감촉에 손을 거두었다.
역 가까이에서는 누군가 빗자루로 낙엽을 쓸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모아 놓은 잎 몇 장이 다시 흩어졌고, 그 사람은 빗자루를 세워 기다렸다가 같은 자리를 쓸었다. 어머니는 꾸러미를 품 쪽으로 당겼다.
공책에는 동백과 원복이 무진의 몸을 거두어 산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었다.
함께 묻은 이들 가운데 이름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무덤으로 가는 길은 분명하지 않았고, 훗날 누가 그곳을 다시 찾아갔는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두 사람은 주변을 아는 이에게 옛길을 물었다.
물길이 돌던 방향과 산으로 오르는 길을 들으며 공책을 펼쳤으나, 바뀐 지형과 새로 들어선 시설들 사이에서 그 밤의 길을 되찾기는 어려웠다.
어머니는 산자락을 조금 오르다가 숨이 차 멈췄다. 수연이 팔을 받치자 괜찮다며 손을 뺐으나, 다음 걸음에서는 다시 딸의 팔꿈치를 잡았다.
“집은 남아 있는데 묻힌 자리는 못 찾는구나.”
수연은 낮은 바위에 어머니를 앉혔다.
물병 뚜껑을 열어 건네고 곁에 앉았다. 신발에 붙은 낙엽이 바람에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아래로 강과 다리가 보였다. 더 멀리에서는 역의 지붕과 철길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한결 할아버지도 아버지 무덤을 찾으러 왔을까.”
“그건 적혀 있지 않아.”
어머니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강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두 사람 사이에 펼쳐 둔 공책을 넘겼다.
되짚어 내려와 강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섰다. 다리 쪽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고, 바람이 방향을 바꾸면 역 주변의 인기척도 건너왔다.
수연은 배냇저고리를 가방에 둔 채 이름을 적은 페이지를 펼쳤다. 어머니가 한쪽 모서리를 잡아 주었다.
“변무진.”
목소리가 작아 어머니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불렀다.
“변무진 어른, 저희가 왔습니다.”
수연은 어머니 옆에 섰다. 공책에서 스물여섯이라는 나이를 읽을 때에는 죽은 해를 계산했지만, 여기에서는 그 나이의 사람이 강가에 서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차가운 손을 옷자락에 문지르고, 건너편을 살피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동백의 이름을 불렀다.
이어 원복을 불렀고, 한결의 이름에서는 잠시 목이 막혔다. 수연이 정명과 정숙의 이름을 조용히 이었다.
공책 아래쪽에는 순덕의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는 것, 한결을 품에 안고도 끝내 그 아이의 아버지를 묻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순덕의 이름에 손가락을 얹었다.
수연은 페이지가 들리지 않도록 반대쪽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 사이에서 종이가 작게 떨렸다.
어머니는 한동안 그대로 있다가 공책을 덮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무덤의 자리도 모르는 곳에 표식을 남길 수는 없었다. 수연은 공책이 젖지 않았는지 살핀 뒤 가방 안쪽에 넣었다.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은 다시 걸어서 다리를 건넜다. 어머니는 중간쯤에서 멈춰 강을 보았다. 자동차 한 대가 옆으로 지나갔고, 수연은 어머니의 팔을 잡아 안쪽으로 당겼다.
어머니는 그 손을 놓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기 전날, 두 사람은 무진의 생가에 한 번 더 들렀다.
밤새 비가 오지 않아 마당의 흙은 조금 굳어 있었다. 처마 밑에 모인 낙엽은 가장자리부터 말랐고, 담 너머 밭에서는 거둔 줄기를 태우는 냄새가 났다.
순임의 후손은 마루 앞에서 창호의 들뜬 귀퉁이를 살피고 있었다. 두 사람이 들어서자 손에 묻은 풀을 헝겊에 닦았다. 수연이 녹도에 다녀왔지만 무덤은 찾지 못했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집안 어른들도 그 자리는 정확히 못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문턱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밑창에서 작은 흙덩이가 떨어졌다. 그는 방을 조금 덥혀 놓았다며 문을 열어 주었다.
바닥에는 아직 온기가 고르게 퍼지지 않아 아랫목만 따뜻했다. 어머니는 손바닥을 대 보더니 꾸러미를 무릎에 놓았다.
수연은 곁에 앉아 공책을 펼쳤다.
변귀수의 이름 아래로 변한필과 석주, 무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수연은 그 이름들을 짚어 읽고 공책을 내려놓았다.
창 아래에는 사람이 앉을 만큼 볕이 들었다.
몸을 눕히면 발끝이 닿을 자리에서 문턱까지 몇 걸음 되지 않았다.
문밖으로는 마루가, 그 너머로는 부엌의 어두운 입구가 보였다. 수연은 무릎을 세웠다가 풀고, 손바닥을 방바닥에 댔다. 아랫목에서 올라온 온기가 손끝까지 번졌다.
어머니가 꾸러미의 매듭을 풀었다.
“여기서 한번 펴 보고 싶었어.”
저고리를 꺼내자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천 위에 놓였다. 옆구리를 기운 조각은 몸판보다 조금 두꺼웠고, 바늘땀을 끝낸 작은 매듭이 안쪽에 남아 있었다.
순임의 후손도 문밖에서 들여다보았다.
“한결 어른 옷이라고요?”
“그렇게 전해져요.”
그는 문설주 옆에 섰다. 어머니는 한쪽 소매를 손바닥에 올렸다.
“한결 할아버지가 이모에게 집을 맡겨서,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네.”
수연은 반대쪽을 들었다.
접혀 있던 옷이 벌어지자 몸판 가운데가 둥글게 떴다. 그 안에 누웠을 아이의 어깨 너비가 두 손 사이에 놓였다.
마당에서 바람이 일었다. 마른 잎 하나가 마루 끝까지 밀려왔다가 문턱 아래에 걸렸다. 순임의 후손이 몸을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수연은 저고리를 다시 접었다.
한쪽 소매를 몸판 위에 얹고, 다른 소매를 그 위에 포갰다. 어머니는 접힌 옷 밑으로 손을 넣어 천이 늘어지지 않게 받쳤다.
대문을 나설 때 수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순임의 후손은 방문을 닫으려다 햇빛이 아직 안쪽까지 드는 것을 보고 그대로 두었다. 마루에 올라앉아 들뜬 창호의 귀퉁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한번 눌러 붙인 뒤에도 종이가 조금 일어나자 풀 묻은 붓을 다시 들었다.
어머니가 수연의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이 비탈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집 안에서는 문짝을 고쳐 여닫는 소리가 두 번 났다.
집으로 돌아온 뒤 수연은 책상 위에 자료를 나누어 놓았다. 토벌 기록을 옮긴 수첩과 외할머니의 공책, 현상해 온 장부 사진을 따로 두고, 누구에게 들었는지 분명하지 않은 말에는 물음표를 붙였다. 변귀수에서 무진까지 이어지는 계보는 여전히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빈칸을 메우려고 이름을 끌어다 놓지는 않았다.
수연은 새 원고지 첫 장에 무진의 이름을 썼다.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젖은 옷을 입고 문턱을 넘자 부엌에서 순덕이 고개를 드는 데까지 쓰고, 한 줄을 비워 두었다. 창밖이 어두워진 줄도 모르고 앉아 있었다.
며칠 뒤 저녁,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가 받았다가 수연을 돌아보았다. 수화기를 든 손이 가슴 앞에서 잠시 멈췄다.
“외삼촌이다.”
수연이 귀에 대기도 전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정선까지 가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닌 거냐!”
어머니의 친오빠였다.
외할머니 장례 때 조문객들의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밤늦도록 빈소를 지켰던 사람이었다.
그때 낮게 가라앉아 있던 목소리가 수화기 안에서는 거칠게 갈라졌다.
“집안 어른들한테 전화가 왔다. 네가 한결 할아버지 아버지가 변씨였다고 하고 다닌다며? 이제는 그걸 소설로 쓰겠다고?”
“외할머니 공책에 있어서요. 족보를 바꾸려는 건 아니고…….”
“그럼 그걸 들춰서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 이제 와서 우리 집안이 변씨로 바뀌면 뭐가 달라져? 나는 평생 이씨로 살았고, 네 어머니도 이씨로 살았다. 우리 이 자, 한 자, 결 자 할아버님도 평생 이씨로 살다 가셨어.”
수연은 책상 위에 펼쳐 놓은 공책을 보았다.
이한결이라는 이름 옆에 자신의 글씨로 적은 변무진이 있었다.
“그 할아버님이 당신 출생을 알고도 왜 이씨로 사셨겠냐. 키워 주신 이원복 고조할아버님께 고마웠기 때문이지. 먹이고 입히고 장사 가르쳐서 사람 구실 하게 해 주신 분이야. 그 은혜를 알고 평생 그 성을 지키셨는데, 뒤에 태어난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바꾸겠다는 거냐!”
수연은 수화기를 다른 손으로 옮겼다.
어머니는 식탁에 앉지 못하고 의자 뒤에 서 있었다.
“저도 원복 할아버님 이야기를 쓰려고 했어요. 한결 할아버지를 어떻게 키우셨는지…….”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 우리한테는 그분이 할아버님이야. 한결 할아버님도 마지막까지 그 집 맏아들로 사셨다. 당신이 평생 쓰신 이름을, 돌아가신 뒤에 우리가 고쳐 부르는 게 옳으냐!”
뒤쪽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외삼촌은 잠깐 숨을 골랐으나 다음 말은 더 높아졌다.
“그리고 우리가 변씨 족보를 찾아가면 그 집안에서 얼싸안고 받아 줄 줄 아느냐? 어디 있다 이제 왔느냐고 반겨 줄 것 같아? 우리가 그 집안 핏줄이라는 걸 무슨 수로 증명할 건데?”
“공책에 이름이 남아 있고, 순임 어른 후손들도…….”
“그분들이 들었다는 말과 네 외할머니가 들었다는 말이잖아. 낳은 아버지가 누구라고 적힌 당시 문서가 있느냐? 그 아이가 한결 할아버님이라는 걸 확인할 기록은 있고? 변귀수 어른부터 우리까지 빠진 이름 없이 이어지는 족보라도 찾았느냐?”
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책상 위 사진에는 한결의 신발값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작은 글씨를 읽으려고 사진을 가까이 당겼다가 놓았다. 무진의 이름은 그 장부 어디에도 없었다.
“없습니다.”
외삼촌은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수연은 수화기를 귀에 더 붙였다.
“그러니까 사실상 전해 오는 말뿐이라는 거다. 네 할머니가 거짓말을 하셨다는 게 아니야. 하지만 빠진 대목을 네가 소설로 채우면, 남들은 그것까지 우리 집안에서 있었던 일로 알 것 아니냐.”
수연은 원고지 위에 얹혀 있던 손을 거두었다.
어머니가 다가와 수화기에 손을 댔다. 수연이 건네려 하자 외삼촌이 다시 불렀다.
“수연아, 더는 사람 찾아다니며 묻지 마라. 집안 내력을 퍼뜨리는 일도, 소설 쓰는 일도 당장 그만둬. 네가 무슨 권리로 온 집안을 남들 입에 오르내리게 하느냐. 네 혼자 쓰는 글이라고 네 마음대로 해도 되는 줄 알아!”
어머니가 수화기를 받아 들었다.
“오빠, 애가 성을 바꾸겠다는 건 아니야. 나도 같이 갔어.”
수화기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너까지 왜 그랬어. 우리 할아버님이 무슨 성으로 살다 가셨는지 네가 모르냐!”
어머니는 식탁 모서리에 손을 짚었다. 한동안 듣다가 알겠다는 말을 두 번 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손은 전화기 위에 남아 있었다.
“오늘은 그만하자.”
수연은 방으로 돌아갔다. 쓰다 만 원고에는 무진이 문턱을 넘는 대목이 있었다. 부엌에서 순덕이 돌아보고, 젖은 옷을 벗으라는 말을 건네는 장면이었다. 수연은 다음 문장을 잇지 못한 채 펜을 내려놓았다.
한결의 뒤로 이씨 성을 쓰며 살아온 후손들이 많았다.
충분히 확인하지 못한 출생 이야기를 내놓는 일이 그들이 평생 불러 온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에 상처를 내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수연은 집안 내력을 기록하는 일과 소설을 쓰는 일을 멈췄다. 찾아가 물을 사람들의 주소가 적힌 수첩을 덮었다. 문화원에 다시 묻기로 한 날짜가 지나도록 전화를 걸지 않았다.
어머니가 책상 끝의 배냇저고리를 집어 들었다.
접힌 밖으로 빠져나온 소매를 몸판 위에 얹고, 수연이 내민 천으로 감쌌다. 그 위에 공책을 놓았다. 무진의 이름도, 원복이 한결을 길렀다는 기록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연은 종이 모서리가 눌리지 않도록 매듭을 느슨하게 묶었다. 어머니는 꾸러미를 장롱 안쪽에 넣고 저고리 놓인 자리를 한 번 만진 뒤 문을 닫았다.
수연은 쓰다 만 원고 위로 빈 종이를 덮었다. 그 아래에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무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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