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2부 - 아버지의 등짐을 지고 새로운 길을 배우다
원복은 그해 겨울을 방 안에서 보냈다.
낮에 녹아 처마를 타고 흐르던 물은 밤이면 길게 얼어붙었다.
새벽에 다시 내린 눈은 전날 마당을 건넌 발자국을 덮었다.
한결은 먼 장으로 나가는 일을 줄이고, 길에서 돌아오면 등짐을 내려놓기 전에 방문부터 열었다. 아버지가 잠들어 있으면 문턱에 앉아 숨소리를 듣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깨어 있으면 찬 손을 옷 안에 넣어 데운 뒤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잡았다.
원복은 몸이 조금 나아지면 일어나 앉아 남은 물건을 헤아렸다.
바늘 꾸러미를 옮기고 실타래를 빛깔대로 놓다가 숨이 차면 손을 멈추었으나, 한결이 곁에 앉으면 어느 고을에서는 굵은 실이 잘 팔렸고 어디서는 바늘보다 헝겊을 먼저 찾았는지 이야기했다. 아들은 이미 들은 이야기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아버지가 잊은 고을 이름을 대신 짚어 주었다.
봄이 가까워져도 원복은 길을 나서지 못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마당에 세워 둔 지게를 바라보았고, 한결이 눈을 털어 처마 안으로 옮겨 놓으면 조금 더 바깥에 두어도 된다고 했다. 아들은 지게를 도로 내놓지 않고 방문에서 잘 보이도록 돌려 세웠다.
어느 밤, 한결이 약을 구하러 나간 사이 원복이 동백을 불렀다.
“이제는 말해야겠소.”
젖은 천을 접던 동백의 손이 멈추었다. 원복은 방 한쪽의 궤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가 없어진 뒤에 자네 혼자 그 일을 꺼내게 하고 싶지 않소. 내가 아는 것은 내 입으로 들려주어야지.”
동백은 곁에 앉아 그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의 굳은살은 여전했으나 손가락 사이의 살이 빠져, 오래 쥐어 온 손인데도 제 손 안에서 헐거웠다. 그녀가 손가락을 조금 더 깊이 감자 원복이 엄지로 손등을 천천히 문질렀다.
“한결이가 이제 혼자 장길을 다니오. 제 발로 살아갈 만큼 자랐는데, 무진의 이름을 더 늦게 알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소.”
동백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을 쥐고 있었다. 원복의 숨이 고르게 돌아온 뒤에야 얼굴을 들었다.
“말해요.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이튿날 저녁, 한결이 아버지를 받쳐 앉히고 약그릇을 들었을 때 원복이 그 손에 제 손을 얹었다.
“먼저 할 말이 있다.”
“약부터 드십시오. 식습니다.”
“잠깐 놓아두어라. 네 어머니도 함께 들어야 할 말이다.”
한결은 그릇을 옆에 내려놓았다. 동백이 문을 닫고 원복의 다른 쪽에 앉자 아들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사람이 있다.”
원복은 한결의 손을 잡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네게 생명을 준 아버지다. 이름은 변무진이다.”
한결은 원복의 등을 받치던 손을 그대로 둔 채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나루에서 배를 부렸고, 네 어머니와 함께 살려고 했다.”
아들의 눈길이 동백에게로 옮겨 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무릎 위에 놓은 손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네가 오는 줄도 모르고 떠났어.”
한결은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물그릇을 들어 원복의 입가에 대었다. 아버지가 한 모금 넘기는 것을 기다렸으나, 막상 입을 열자 준비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그러면 아버지는…….”
원복은 그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지 않고 아들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너를 키웠다. 그때는 무진의 아이인 것을 숨겨야 했어. 농민군의 가족까지 붙잡던 때였으니.”
동백이 원복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내가 부탁했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한결은 약그릇으로 눈을 내렸다. 그릇 가장자리에 맺힌 물방울 하나가 흘러내려 바닥에 작은 자국을 남겼다.
“왜 지금까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원복은 아들의 손등에 남은 짐끈 자국을 바라보았다. 처음 나무배를 쥐여 주었을 때는 제 손가락 하나도 제대로 감싸지 못하던 손이 이제 갈라진 살갗과 굳은살로 덮여 있었다.
“어릴 적에는 네가 지고 살기엔 너무 무거운 이야기라 여겼다. 자란 뒤에는 네 어머니와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헤아리다가 때를 놓쳤고.”
원복은 눈을 들어 아들을 보았다.
“늦어서 미안하다. 무진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아는 만큼은 들려주마.”
방 밖에서 언 눈이 처마 아래로 떨어졌다. 한결은 그 소리에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원복의 몸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고 팔을 더 깊이 넣었다.
“누우십시오. 누워서 말씀하셔도 됩니다.”
베개를 고쳐 놓고 천천히 눕힌 뒤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리자 원복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한결은 이불 밖에 놓인 손을 안으로 넣어 주다가 물었다.
“그분은 어디서 죽었습니까?”
“녹도에서.”
동백이 대답하고 한동안 말을 고르다가 덧붙였다.
“붙잡힌 뒤 돌아오지 못했어.”
한결은 이불의 주름을 펴다가 같은 자리를 다시 눌렀다.
“아버지도 아셨습니까?”
“장길에서 알고 나루에서도 만났다. 네 어머니와 함께 몸을 찾아 데려왔어.”
처음 듣는 이름이었으나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 이름 앞에서 오래전부터 함께 앉아 있었던 듯했다. 자신만 이제 문을 열고 들어온 것 같아, 한결은 두 사람의 손이 겹쳐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분은 어쩌다가 붙잡히셨습니까?”
“동학을 하던 사람이었다. 금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나루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지.”
원복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네 어머니를 만나러 오는 날이면 나루로 내려가는 걸음부터 달랐어.”
입가에 머문 웃음이 숨에 밀려 천천히 사라졌다. 한결은 그 말을 더 듣고 싶었으나 아버지의 숨이 짧아져 있어 약그릇을 다시 들었다.
“조금씩 드십시오.”
머리 밑에 손을 넣고 그릇을 기울이자 약이 턱으로 흘렀다. 동백이 건넨 천을 받아 닦아 주었으나 손이 떨려 한 번에 닦이지 않았다. 원복은 아들이 천을 다시 접는 동안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날 밤 한결은 원복 곁에서 잤다. 잠들었다가도 숨소리가 달라지면 몸을 일으켰고, 물을 찾으면 평소처럼 그릇을 받쳐 주었다. 다시 누운 뒤에는 아버지 쪽으로 돌아누워 어둠 속에 드러난 어깨의 윤곽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아도 낮에 들은 이름이 떠올랐으나, 곁에서 숨을 쉬는 사람이 물을 찾으면 몸이 먼저 일어났다.
며칠 뒤, 원복은 날이 밝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한결은 식어 가는 손을 잡고 손바닥을 제 손으로 덮었다.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다가 입김을 불어 넣었으나 온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동백이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야 아들은 고개를 숙이고, 잡은 손 위로 이마를 내렸다.
“아버지.”
동백은 원복의 머리맡으로 옮겨 앉았다. 밤새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한쪽으로 접힌 옷깃을 펴 주었다. 더는 숨에 들썩이지 않는 가슴 위에 손을 얹자 방 안의 찬 기운이 손바닥까지 스며들었다.
잘 가세요.
입술을 열면 아들이 다시 무너질 것 같아 그녀는 속으로 말했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당신 덕분에 한결이를 이렇게 키웠어요.
아이가 열에 들떠 울던 밤, 원복은 물수건을 갈며 동이 틀 때까지 앉아 있었다. 첫 장길에 아들을 데리고 나가던 아침에는 자기 짐보다 아이의 짐끈을 더 오래 만졌다.
한결이 어른이 되어 돌아온 뒤에도 밥을 먹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제 수저를 들었다.
동백은 원복의 옷깃을 다시 한 번 쓸고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잠깐 댔다.
일어났을 때 눈물이 옷깃 안으로 흘러들었으나 닦지 않고, 아들이 붙잡고 있는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장례를 마친 뒤 한결은 원복의 등짐을 풀었다.
다 팔지 못한 바늘과 실이 남아 있었고, 물건을 싸던 헝겊에는 오래 묶인 매듭의 주름이 배어 있었다. 하나씩 꺼내 놓다가 등짐끈 안쪽을 더듬자 여러 빛깔의 천이 손끝에 걸렸다.
해진 곳을 덮고 그 위를 다시 꿰맨 바늘땀이 촘촘했다. 제 어깨가 아프다고 했을 때 원복이 덧대 주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한결은 끈을 펴 무릎 위에 놓고 손바닥으로 눌러 보았다. 가장자리에는 아버지의 어깨를 오래 누른 자리가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었다.
그날 밤 동백은 궤에서 보자기를 꺼냈다. 배냇저고리와 이름을 적은 종이가 들어 있었는데, 작은 옷을 펼치자 오래 접힌 자리가 희게 드러났다.
한결이 소매 안에 손가락을 넣어 보자 동백이 말했다.
“네 아버지가 너를 처음 안았을 때 머리를 받치는 법도 몰랐어. 떨어뜨릴까 봐 앉지도 못하고 서 있더라.”
한결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안은 아버지의 모습은 기억나지 않았으나 늙은 아버지를 업고 언덕을 오르던 길은 선명했다. 등에 얹힌 손과 문턱 앞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돌아와, 그는 작은 소매에서 손가락을 빼고 옷깃을 펴 주었다.
빈 종이를 가져와 어머니에게 글자를 물은 뒤 변무진을 쓰고, 그 아래에 이원복과 이한결을 차례로 적었다. 먹이 마르자 종이를 배냇저고리 밑에 넣고 보자기를 다시 쌌다.
봄이 깊어진 뒤 한결은 남면으로 길을 잡았다.
여량에서 아침 일찍 나선 길이었다. 순덕의 장례를 치르러 원복과 함께 갔을 때도 이 고개를 넘었다. 그날 아버지는 걷다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고, 한결의 걸음이 늦어지면 길가에 서서 기다렸다. 이제는 앞서 가다 멈추는 사람이 없어 그는 제 숨에 맞추어 고갯길을 올랐다.
집 가까이 이르자 장례 날 물동이를 내려놓았던 마당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문짝 하나가 비스듬히 처져 있었고, 마른 풀이 문턱까지 밀려와 있었다. 지붕의 썩은 널 사이로 하늘이 보였으며 처마 밑에는 빗물에 씻겨 내려온 흙이 쌓였다. 사람들이 앉았던 자리와 짚신을 벗어 놓았던 자리를 헤아려 보았으나 빈 마당에서는 어느 쪽인지 가리기 어려웠다.

도수매는 그대로였다.
거친 껍질 사이로 새 가지가 올라와 있었고, 가지 끝에는 꽃이 진 자리를 감싸며 어린잎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결이 손바닥을 대자 볕을 받은 껍질의 온기가 전해졌다.
이웃집 노인이 나와 그를 알아보았다.
“원복이 아들이구나.”
한결은 나무에서 손을 떼고 허리를 숙였다.
“순임 아주머니는 어디 계십니까?”
“시집갔지. 그 뒤로 저 집을 돌볼 사람이 없어.”
열린 방문 안에는 벽에서 떨어진 흙이 구들 가장자리에 쌓여 있었고, 비가 들이친 자리의 바닥은 움푹 꺼져 있었다. 한결은 방 안을 살피다가 노인에게 물었다.
“무진 어른도 여기서 사셨습니까?”
노인은 한결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 방에서 자랐지. 순덕이가 저 문 앞에 앉아 아들 오는 길을 보곤 했어.”
한결은 문턱에 손을 짚고 몸을 숙였다.
문 안쪽에는 사람의 손이 오래 닿아 반들거리는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 자리를 엄지로 쓸다가 손을 거두었다.
여량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 문턱이 생각났다. 비가 들면 방 안의 흙이 더 내려앉을 것이고, 다음 겨울에는 처진 문짝마저 떨어질 것 같았다. 동백에게 집의 형편을 이야기하던 한결은 마지막에 도수매가 살아 있다고 말했다.
밥을 뜨던 동백이 손을 멈추었다.
“새잎이 났니?”
“예. 가지도 새로 뻗었습니다.”
그녀는 한결의 그릇에 밥을 담고 나서야 제 그릇을 당겼다.
다시 장길에 나선 한결은 등짐을 지고 다니면서 동학을 아는 사람을 찾았다.
처음에는 무진이 배웠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였으나, 이야기를 들을수록 묻고 싶은 것이 늘어났다. 장을 마치고 묵는 집에서 도인을 만나면 주문의 뜻을 물었고, 글을 읽는 사람이 있으면 곁에 앉아 알아듣지 못한 대목을 다시 읽어 달라고 청했다.
어느 저녁, 함께 묵던 늙은 도인이 종이에 주문을 적어 주었다. 한결은 손가락으로 글자를 짚으며 따라 읽었다.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 시천주 조화정(侍天主 造化定), 영세불망 만사지(永世不忘 萬事知).”
도인은 그가 한 번 더 읽기를 기다렸다가 뜻을 풀어 주었다.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니 크게 내려 주기를 비는 것이 앞의 말이네. 뒤의 말은 하늘님을 모시고 그 덕에 맞게 마음을 정하여, 평생 잊지 않고 온갖 일의 이치를 알아 간다는 뜻이지.”
한결은 종이 위의 시천주를 짚었다.
“모신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안으로 모신 것을 알고, 사람을 대할 때도 잊지 않는 것이지. 입으로 외운다고 다 되는 일이겠나.”
이튿날 고갯길을 오르며 한결은 주문을 낮게 외웠다. 처음에는 글자의 차례를 놓치지 않으려고 걸음을 늦추었고, 숨이 차면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숲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발밑에서 자갈이 밀리는 소리 사이로 제 목소리가 작게 섞였다.
주문이 입에 익은 뒤에도 뜻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남루한 손님이 물건을 오래 만지면 저도 모르게 그 손을 살폈고, 값을 치르지 못할 듯하면 대답이 짧아졌다. 밤에 배운 글을 되짚다가 낮의 제 얼굴이 떠오르면 종이를 접지 못한 채 한동안 앉아 있었다.
하루는 장에서 만난 행상이 발을 다쳐 뒤처졌다.
한결은 먼저 고개를 넘으려다가 돌아와 그의 짐 일부를 제 지게에 옮겼다. 무게가 늘자 발바닥이 뜨거워졌고, 쉬었다 일어날 때는 함께 신음을 냈다. 길가에서 짐끈을 풀어 다시 매는데 원복이 제 어깨의 끈을 고쳐 주던 손이 생각났다.
그해 가을, 한결은 순임을 찾아가 집을 사서 고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장길에서 모은 돈으로 값을 치렀다. 순임은 돈을 받아 놓고도 한동안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린잎이 돋은 도수매와 무너진 문턱을 이야기하는 한결의 눈매며 입가에 오래전 오빠의 얼굴이 겹쳐졌다.
무진 오빠가 네 친아버지 아니냐.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순임은 고개를 숙여 돈을 보자기에 쌌다. 매듭을 묶고 나서도 손을 떼지 못하다가, 한결이 일어서자 겨우 입을 열었다.
“고쳐 준다니 고맙다. 그 나무도 잘 돌봐 주렴.”
이듬해 날이 풀리자 남면에 머물며 수리를 도왔다.
목수가 썩은 지붕 널을 걷어 내는 동안 재목을 날랐고, 내려앉은 서까래를 갈고 구들을 다시 놓은 뒤에는 벽에 바를 흙을 이겼다.
재목을 쌓던 일꾼이 도수매 쪽으로 다가가자 한결이 자리를 비켜 달라고 했다.
“저쪽에 놓아 주십시오. 가지가 다치겠습니다.”
문짝을 고쳐 다는 날에는 직접 문턱에 서서 몇 번이나 열고 닫아 보았다.
문은 더 이상 바닥을 긁지 않았다. 첫 불을 넣고 방에 올라갔을 때, 한결은 벽 가까이 앉아 손바닥으로 구들을 짚었다. 서늘하던 돌 밑에서 온기가 올라오는 동안 손을 떼지 않고 앉아 있었다.
수리를 마친 뒤 한결은 동백을 모시고 그 집에 갔다.
긴 길 끝에 마당으로 들어선 동백은 도수매부터 보았다.
나무 곁으로 다가가 낮은 가지를 손끝으로 받쳤다가 놓았고, 줄기를 돌아보며 오래된 껍질 사이에 난 새 가지를 살폈다. 한결은 새로 단 문을 열어 두고 어머니가 돌아서기를 기다렸다.
방 안에는 아직 세간이 없었다. 햇빛이 문턱을 넘어 벽 아래에 길게 놓여 있었고, 새로 바른 흙에서는 마르지 않은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동백은 방을 살핀 뒤 아들에게 말했다.
“네가 이 집에 들어와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
한결은 문지방에 묻은 흙을 발끝으로 털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 저는 변씨이기도 하지만 이씨이기도 합니다.”
동백의 눈길이 아들에게 머물렀다.
한결은 어머니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제 마음속 아버지는 영원히 이 자, 원 자, 복 자입니다.”
마당에서 바람이 도수매 잎을 뒤집었다가 놓고 지나갔다. 한결은 그쪽으로 잠깐 눈을 돌린 뒤 다시 어머니를 보았다.
“물론 제 뿌리도 찾아야겠지요.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지, 어떤 분이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래도 장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께 갈 겁니다.”
동백은 입술을 움직였다가 다물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 벽 가까이 앉더니 아들에게도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한결이 곁에 앉자 그녀는 그의 소매에 남은 흙을 털어 주었다. 손등에 엉긴 흙은 쉽게 떨어지지 않아 손가락으로 한 번 더 문질렀다.
두 사람은 문을 열어 둔 채 앉아 있었다. 처마의 그늘이 조금씩 마당으로 내려왔고, 도수매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빈방 안까지 들어왔다.
다음 장길을 떠나는 아침, 한결은 원복의 지게를 골랐다. 멜빵을 제 어깨에 맞게 고치되 안쪽에 덧댄 천은 뜯지 않았다. 주문을 적은 종이를 마른 헝겊에 싸서 실타래 곁에 넣고, 동백이 건네는 밥을 받아 짐 안에 갈무리했다.
돌아올 날과 묵을 집을 차례로 말한 뒤 몸을 세우자 어머니가 등짐의 기운 쪽을 바로잡았다. 그 손은 잠깐 지게에 남아 있다가 한결이 돌아보자 천천히 내려왔다.
마당을 건너 고갯길에 접어든 한결은 주문을 낮게 외웠다.
지기금지 원위대강에서 한 번 숨을 쉬고, 시천주 조화정으로 이어 갔다. 영세불망 만사지까지 외운 뒤에는 걸음에 맞추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오르막이 깊어지자 목소리는 숨 안으로 잦아들었다. 그는 입술로 남은 글자를 이어 가며 끈을 고쳐 잡지 않고 걸었다.
원복이 덧댄 천이 어깨를 받쳐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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