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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녹도아리랑 ㊵] 내가 아버지가 되겠소

  • 김광희 기자
  • 입력 2026.10.07 1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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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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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부 - 무진의 아이를 지키려는 사람들

 

무진의 장례를 치른 뒤 사흘 동안 순덕은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밤새 문풍지가 울고 처마에 얹힌 눈이 마당으로 쓸려 내려와도 아궁이 앞에 앉아 타들어 가는 나무 끝만 바라보았다. 불이 사그라진 뒤에도 한동안 장작을 밀어 넣지 않아, 순임이 곁에 와 앉으면 그제야 부지깽이를 들었다.

아침에는 아들이 쓰던 방을 쓸었다. 

사람이 눕지 않은 자리에는 먼지도 별로 없었으나 문턱까지 비질하고, 구석에 남은 실밥 하나를 집어 손바닥에 놓았다. 저녁이면 밥그릇 하나를 더 꺼냈다가 손에 든 채 서 있었다. 마당에서는 늙은 도수매의 마른 가지가 바람에 서로 부딪혔다.

순임은 어머니가 그릇을 도로 넣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오빠 얼굴은 아직 거기 있어요?”

순덕의 손이 멈추자 딸이 다시 물었다.

“얼굴도 데려와야 하는 것 아니에요?”

 

순임은 녹도에 가지 못했다.

문밖에서 원복이 하던 말을 듣고, 오빠의 몸을 덮은 삼베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 천 아래 어디가 어깨이고 어디가 무릎인지 알아보려다가 동백에게 안겨 방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는 어른들이 삼베를 걷지 못하게 한 까닭을 묻지 않았다.

순덕은 그릇을 내려놓고 딸을 품에 당겼다.

무슨 말이라도 해 주어야 했으나 입을 열면 아들을 두고 온 곳부터 말하게 될 것 같았다. 순임은 어머니의 옷깃에 얼굴을 묻고 한참 있다가 손을 뻗어 등 뒤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날 밤 순임은 잠들기 전에 오빠를 불렀다.

대답을 기다리던 목소리는 두 번째에 작아졌고, 세 번째에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순덕은 딸의 등을 쓸어 주며 어둠 속에 눈을 뜨고 있었다. 손 아래에서 어린 등이 고르게 오르내리자, 아들에게도 이렇게 등을 쓸어 주던 밤이 있었다는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때는 아이가 잠들면 손을 거두었다. 이제는 잠든 딸의 등에서도 좀처럼 손을 떼지 못했다.

 

동백은 남면을 떠나 아우라지로 돌아갔다.

무진과 살림을 꾸리려던 곳은 오래전부터 혼자 살아온 자기 집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느 곳에도 혼자였던 때의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았다.

벽에 기대 둔 삿대와 처마 밑의 짚신, 선반에 놓인 그릇마다 그가 다녀간 손길이 있었다.

방에는 개어 둔 이불이 그대로였고, 부엌 선반에는 나무그릇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작은 그릇을 집어 바닥을 만지자 무진의 칼이 비껴간 자리에 손가락이 걸렸다. 그가 다시 깎으려던 것을 말리며, 밥을 담으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던 것은 자기였다.

 

동백은 두 그릇을 씻어 엎어 놓고 불을 지폈다.

혼자 먹을 밥을 안치려고 곡식을 덜었으나 바가지와 솥을 번갈아 보다가 조금을 도로 쏟았다. 얼마 전까지는 두 사람이 먹기에 모자랄까 걱정하던 곡식이었다.

밥이 익자 작은 그릇에도 손이 갔다. 선반에서 내려놓은 뒤에야 빈 그릇인 채로 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동백은 제 밥을 한 숟가락 뜨고도 입에 넣지 못하다가, 식기 전에 먹으라던 무진의 목소리가 떠올라 고개를 숙였다.

 

며칠 뒤 원복은 남면의 순덕을 찾아갔다.

도수매 가지 끝에는 아직 굳게 닫힌 꽃눈이 붙어 있었다. 담 밑의 눈은 낮에 조금 녹았다가 밤이면 다시 얼었다. 그는 문밖에서 기침을 하고도 들어오지 못하다가 순덕이 부엌에서 나오자 모자를 벗었다.

“좀 더 일찍 소식을 알았더라면…….”

말끝이 마당에 남았다. 녹도에 없었던 원복은 무진이 마지막에 누구 곁에 있었는지, 무슨 말을 남겼는지 알지 못했다. 동백과 시신을 찾아 돌아온 뒤에도 밤이면 삼베 아래로 드러났던 손이 떠올랐다. 그 손을 잡아 주는 사람이 있었는지, 목이 말랐다면 물 한 모금은 얻어 마셨는지, 묻고 싶은 일이 자꾸 늘었다.

 

장터에서 녹도 이야기가 나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가까이 갔다.

그러나 처형 이야기가 시작되면 무진의 이름을 묻지 못한 채 사람들 뒤에 서 있었다. 조금만 더 들으면 알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그다음 말이 두려워 발길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끝내 묻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몇 번이나 걸음을 늦췄다.

 

누군가 무진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그날 함께 붙잡혔던 사람이라도 살아 돌아와, 무진이 어디에 앉아 있었고 누구에게 말을 건넸는지 들려주었으면 했다. 시신을 묻고 돌아왔으면서도 마음속의 무진은 아직 녹도 어딘가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을 알아야 그 기다림도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진이 겪은 일을 끝까지 듣고 나면, 혼자 두고 돌아왔다는 생각에서 조금은 놓여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복은 모자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순덕 앞에 서 있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차마 묻지 못할 말이 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순덕은 그를 부엌으로 들여 씨감자 자루를 풀었다. 작은 것들은 쭈그러들었고, 움푹 팬 눈에는 희끗한 싹이 돋아 있었다. 원복은 자루 안을 들여다보다가 물었다.

“이것도 잡수시지 못하고 남겨 두셨습니까?”

순덕은 감자 하나를 천천히 돌려 보았다.

“먹으면 봄에 묻을 게 없다.”

물러진 것은 따로 놓고 성한 것들을 다시 담았다.

원복이 손을 보탰다. 감자에서 떨어진 마른 흙이 두 사람 사이에 쌓였다. 그가 무슨 말을 꺼내려 할 때마다 순덕은 다음 감자를 집었다.

 

“봄에 거름을 가져오겠습니다.”

“비탈 아래쪽부터 해야겠네. 지난해 큰물에 흙이 많이 내려갔어.”

순덕은 자루를 여미다가 잠깐 손을 멈췄다.

“무진이가 흙을 좀 올려놓겠다더니.”

원복은 매듭 끝을 받아 쥐었다. 순덕은 그가 당겨 주는 동안 자루 입구를 붙들고 있었고, 두 사람은 더 말하지 않았다.

밖에서는 순임이 눈을 치우고 있었다. 빗자루가 언 땅을 긁는 소리를 들으며 순덕은 씨감자를 안쪽으로 옮겼다. 아궁이에서 밀려 나온 재도 작은 바가지에 모아 두었다. 봄에 쓸 것은 봄까지 남겨야 했다.

 

겨울 끝자락에도 정선의 산그늘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볕 드는 강둑에서는 얼음이 얇아졌으나 그늘에는 눈이 굳어 있었다. 낮에 흐른 물은 밤이면 돌계단에 다시 얼었다.

동백은 아침마다 삿대 끝으로 살얼음을 깨고 배에 올랐다. 살얼음 조각이 뱃전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밧줄을 풀면, 강바람이 덜 여민 옷깃 안으로 먼저 들어왔다.

장에 가는 사내와 친정으로 가는 여인, 의원을 찾는 어머니가 다시 나루로 내려왔다.

동백은 짐을 받고 앉을 자리를 일러 주었다. 사람들은 건너편에 매인 무진의 배를 보다가 눈길을 거두었다. 뱃삯을 건네면서도 평소보다 오래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놓는 이가 있었다.

 

동백은 한동안 무진의 배를 띄우지 못했다.

물이 오르면 밧줄을 고쳐 매고 눈이 쌓이면 바닥을 쓸었으나, 고인 물을 퍼내다가 벌어진 틈을 발견한 날에는 한참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무진이 늘 손보던 곳이었다. 그가 앉았을 자리로 몸을 옮겨 보았지만 어디에 무릎을 대야 편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원복에게 나무 조각을 구해 달라고 부탁해 틈을 메우고 며칠 지켜본 뒤에야 그 배도 물에 내렸다. 자기 배를 말리는 날에는 무진의 배를 부렸다. 돌아오면 노와 삿대를 처마 아래 나란히 놓았다. 젖은 손잡이를 헝겊으로 닦을 때면 손이 닿아 반들반들해진 부분에서 오래 머물렀다.

 

첫 뱃삯으로 받은 엽전은 따로 두었다.

감자 두 알을 받은 날에는 하나를 삶고 하나를 남겼다가 이튿날 남은 것도 솥에 넣었다.

무진의 몫이라고 두었던 것을 먹으면서 숟가락을 몇 번이나 내려놓았다. 끝내 다 먹은 뒤에는 빈 솥에 물을 붓고, 불이 꺼질 때까지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속이 뒤집히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처음에는 끼니를 거르고 찬바람을 맞은 탓이라 여겼다. 그러나 밥 냄새를 맡으면 목구멍이 막혔고, 빈속으로 배를 저은 날에는 기슭에 닿고도 땅이 흔들렸다. 손님이 내린 뒤에도 뱃전에 앉아 눈앞의 물살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야 했다.

남면에 들러 저녁을 먹던 날에도 동백은 몇 숟가락 뜨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

 

“속이 좋지 않니?”

“낮에 찬물을 마셨습니다.”

순덕은 밥상을 물리고 감자죽을 묽게 풀어 왔다.

“굶고 배를 부리니 그러지. 조금이라도 넘겨 봐라.”

동백은 고개를 숙여 한 숟가락을 삼켰다. 순덕이 부엌으로 나간 뒤에야 치마 위에 얹은 손을 내려다보았고, 달거리가 끊긴 지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그제야 떠올랐다. 부엌에서는 순덕이 솥뚜껑을 여는 소리가 났다. 동백은 그녀를 부르려다가 죽그릇을 두 손으로 감쌌다.

 

아우라지로 돌아온 밤, 무진이 떠나던 때부터 날짜를 짚었다. 등잔 곁에서 배에 손을 얹었으나 손바닥에는 전과 다르지 않은 제 몸의 온기만 닿았다. 옷고름을 느슨하게 풀고 다시 만져 보아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당신은 모르고 갔어요.”

말을 하고 나자 빈방이 더 조용해졌다. 무진이 문턱에 걸터앉아 젖은 버선을 벗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알았더라면 버선을 받아 들고 이 말을 했을 것이다. 그는 벗던 것을 멈추고 자기를 보았을 것이고, 동백은 그의 얼굴을 보며 한 번 더 말했을 것이다.

 

동백은 배를 감싼 채 몸을 숙였다.

“알았으면…… 한 번은 만져 보고 갔을 텐데.”

등잔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비친 어깨도 따라 떨렸다. 한참 뒤에야 그녀는 이불을 끌어다 무릎을 덮었다.

봄눈이 한 차례 더 지나간 뒤, 남면의 순덕은 순임과 밭을 갈았다.

거름을 가져온 원복도 아래쪽 비탈에서 일을 거들었다. 겨우내 굳은 흙이 괭이에 덩어리째 들렸고, 뒤집힌 자리에서는 물기 어린 검은빛이 났다.

 

순덕은 씨감자를 잘라 눈이 붙은 조각마다 재를 묻혔다. 순임이 고랑에 놓으면 뒤따라 흙을 덮었으며, 일을 마치고 남은 씨감자는 따로 싸서 원복에게 건넸다.

“동백에게 가져다주게. 집 뒤에 조금 심으면 여름에 캐 먹겠지.”

며칠 뒤 동백은 아우라지의 집 뒤꼍을 팠다. 담 밑에는 눈 녹은 물이 고여 있었으나 볕 드는 쪽은 흙이 부드러웠다. 허리를 굽힐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 몇 번이나 일어섰다가 다시 쪼그려 앉았다. 괭이를 내려놓고 손으로 흙을 헤치면 손톱 밑으로 젖은 흙이 밀려들었다.

 

감자 조각을 묻고 흙을 덮은 뒤 고랑 끝에 돌 몇 개를 놓았다. 여름에 이것을 캘 때쯤이면 몸도 달라져 있을 것이었다. 동백은 남은 감자 조각을 세어 마지막 고랑에 나누어 묻고, 흙을 누르던 손을 잠깐 배에 가져다 댔다.

밤에는 작은 나무그릇을 무릎에 놓고 바닥의 칼자국을 더듬었다.

아이에게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면 강을 건너던 손부터 말해 주고 싶었다. 삿대를 놓고 그릇을 깎던 손, 밥상에서 제 쪽으로 감자를 밀어 주던 손도.

 

동백은 그릇 안쪽을 마른 헝겊으로 닦아 선반에 올리고 이불을 폈다.

문틈으로 스미는 바람에 몸을 웅크릴 때마다 손이 먼저 아랫배로 갔다.

봄이 늦게 드는 아우라지에서도 강가의 버들부터 잎을 폈다.

산그늘에는 묵은 눈이 남아 있었으나 한낮의 물빛은 겨울보다 밝았고, 나루에 내려오는 사람들의 짚신에는 녹은 흙이 두껍게 붙었다.

 

원복은 강 건너 움막에서 지냈다.

장에 나갈 때마다 지고 다니던 짐은 줄어 있었으며, 머무는 날이면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남의 밭일을 거들었다. 동백의 집에는 필요한 것을 가져다주고도 문밖에서 말을 건넸고, 해가 기울면 다시 강을 건넜다.

동백은 여전히 배를 부렸으나 손님을 건네고 돌아오면 언덕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는 날이 많아졌다.

 

원복이 말뚝을 고치던 날, 그녀는 배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뎠다.

그가 팔을 받치자 뿌리치지 못하고 강둑에 앉았으며, 핏기가 빠진 얼굴을 숙인 채 한 손으로 배를 감쌌다. 원복은 물을 떠 와 건네고 그녀가 마시는 동안 강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언제부터 몸이 좋지 않았소?”

“괜찮습니다.”

동백이 일어나려 하자 그는 지게를 내려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건너편에서 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녀는 다시 주저앉았고, 원복은 그쪽에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뒤 돌아보았다.

 

“무진의 아이요?”

동백은 바가지를 쥔 채 그를 보았다.

“누가 말했습니까?”

“아무도 말하지 않았소. 내가 잘못 짚었다면 잊어주시오.”

그녀는 바가지를 발치에 내려놓고 버드나무 잎이 뒤집혔다 돌아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잦아들자 손바닥으로 치마의 주름을 폈다.

 

“무진씨도 모르고 갔어요.”

“어머니께는 말씀드렸소?”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면에 갔을 때 순덕은 남의 집에서 콩을 고르고 돌아오고 있었다.

하루 품삯으로 받은 보리를 치마에 싸 왔는데, 대문 앞에서 매듭을 풀다가 낟알 몇 개가 떨어지자 무릎부터 꿇었다. 젖은 흙에 박힌 보리를 손톱으로 파내어 치마 위에 놓던 손이 동백의 눈에 남아 있었다.

 

방에서는 순임이 오빠의 겨울옷을 개고 있었다.

무진의 해진 소매에는 다른 빛깔의 천이 덧대어져 있었으나, 옷을 개는 순임의 소매 밖으로는 팔꿈치가 나와 있었다. 아이는 옷을 다 접은 뒤에도 품에 놓고 앉아 있었다.

“아이를 보시면 데려다 키우겠다고 하실까 봐 겁납니다. 무진씨의 옷도 놓지 못하시는데, 아이를 보시면 어떻게 놓으시겠어요.”

 

동백은 배 위에 손을 얹고 원복을 보았다.

“그런데 저도 못 놓습니다. 제가 낳아서 제 손으로 키우고 싶어요. 울면 제가 안아 주고, 잠들면 곁에 누워 있고 싶습니다.”

손가락이 치마를 조금씩 움켜쥐었다.

“어머니가 무진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도 알아요. 저도 보고 싶으니까요.”

마지막 말은 목에 걸려 작게 나왔다. 동백은 입술을 누르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이 아이는 제 곁에 있어야 합니다.”

강물에 밀린 배가 젖은 돌에 닿았다. 원복은 무릎 위에 놓인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내가 아이의 아버지가 되겠소.”

“그 아이 아버지는 무진씨입니다.”

“알고 있소. 밖에서 아비를 물으면 내가 나서겠다는 말이오.”

원복은 갈라진 손바닥을 무릎에 펴 놓았다.

“먹을 것을 구하는 일도, 밤에 아이를 달래는 일도 자네 혼자 하게 두지 않겠소.”

 

“무진씨에게 갚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자네와 아이 곁에 있고 싶어서 하는 말이오.”

동백이 눈길을 내리자 원복은 말을 이었다.

“무진의 아이라고 알려지면 역적의 자식이라 부를 것이오. 지난 싸움에 식구를 잃고 동학에 원한을 품은 사람도 있을 테니,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누구의 눈에 들까 걱정하며 살게 하고 싶지는 않소.”

“무진씨는 역적이 아니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우리 말을 듣지 않소.”

 

동백은 물가에 매인 두 배를 바라보았다.

무진이 삿대 끝에 감아 둔 삼베는 오래 젖었다 말라 나무와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검어져 있었다.

“아이에게도 숨기라는 말입니까?”

“아이가 크면 알려줍시다. 자네가 괜찮다고 할 때, 무진이 제 아버지라는 것도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내가 길렀다는 이유로 그 이름을 막지는 않겠소.”

 

원복은 동백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말할 때까지는 내 어머니께도, 무진의 어머니께도 말씀드리지 않겠소.”

동백은 곧 대답하지 않았다.

원복은 건너편 손님을 데리러 갔고, 빈 나루에 남은 그녀는 그가 노를 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진과는 다른 힘으로 배를 밀고, 다른 버릇으로 뱃머리를 돌리는 사람이었다.

배가 기슭에 닿자 그는 먼저 내려 손님이 디딜 곳의 돌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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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동백은 곡식독을 기울여 남은 보리를 바가지에 덜었다.

끼니별로 나누어 보다가 다시 합쳤으며, 아이를 감싸려고 모아 둔 헝겊을 펼쳐 해진 자리를 살폈다. 낮에 원복이 하던 말이 떠오를 때마다 바늘을 멈추었다가 다시 천에 넣었다.

원복은 다음 날에도 나루에 왔다.

동백이 배를 대면 밧줄을 받았고, 그녀가 쉬는 동안에는 손님을 건넸다. 저녁에 삯을 내밀자 동백은 그가 부린 만큼 덜어 주었다. 그는 사양하다가 받았으며, 그 뒤로는 각자 건넨 손님을 따로 셌다.

 

동백이 나루에 나오지 못한 날에도 배는 오갔다. 

해 질 무렵 원복은 그날 받은 곡식과 엽전을 문밖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에는 물동이를 채우고 있었고, 일을 마친 뒤에는 빈 바가지를 엎어 놓고 강으로 내려갔다.

그는 다시 함께 살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동백도 대답을 미루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나, 저녁마다 그가 강을 건너 움막으로 돌아갈 때까지 물가를 바라보았다.

하루는 속이 좋지 않아 종일 누워 있다가 이튿날 아침에야 문을 열었다.

물동이는 가득 차 있었고, 아궁이 곁에는 마른 장작이 들어와 있었다.

동백은 물을 한 바가지 떠 놓고 문턱에 앉았다. 

밤새 무엇이 필요할까 헤아리지 않고 잠든 것이 무진을 잃은 뒤 처음이었다.

 

열흘쯤 지난 뒤, 비가 그친 저녁에 동백은 원복의 움막을 찾아갔다.

처마에서는 아직 물방울이 떨어졌고, 그는 젖은 장작을 쪼개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같이 살아요. 제가 사는 집으로 오세요.”

원복이 도끼를 내려놓자 동백은 문턱 아래 고인 물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당신을 무진씨처럼 사랑하겠다고는 못 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장작을 옆으로 치워 그녀가 앉을 자리를 닦았다. 동백이 천천히 앉자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이 짚신에 튀지 않도록 장작 한 토막을 문턱 아래에 놓았다.

 

두 사람은 잔치를 열지 않았다.

이웃을 부르면 언제부터 함께 지냈느냐는 물음이 나올 것이고, 그 뒤에는 동백의 몸을 살피는 눈길이 따라올 터였다.

날이 저문 뒤 동백은 샘에서 물을 떠 왔다.

비에 젖은 마당에서는 흙냄새가 올라왔고, 처마 끝에 남은 물방울이 드문드문 떨어졌다.

무진과 살기로 했던 방에 작은 상을 놓고 정한수 한 그릇을 올렸다.

원복이 문을 닫자 등잔불이 길어졌다가 가라앉았다.

선반에는 나무그릇 두 개가 있었다. 동백은 작은 그릇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두고 상 앞으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물그릇을 사이에 두고 마주 절했다.

동백은 고개를 숙인 뒤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무릎 아래 깔린 치마에 눈물이 떨어졌고, 손등으로 닦으면 다음 눈물이 그 자리에 고였다. 

원복은 먼저 일어났다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

한참 뒤 동백이 얼굴을 들었을 때 그는 물그릇 쪽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소매로 눈가를 닦고 상을 옮겼으며, 원복은 마른 헝겊을 가져와 그릇 밑에 번진 물자국을 닦았다.

그날부터 원복은 그 방에서 지냈다.

처음에는 이불을 문 가까이에 폈으며, 동백이 잠든 뒤에도 문틈에 손을 대어 바람이 드는지 살폈다. 아침이면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넣고, 솥의 물이 데워질 무렵 나루로 내려갔다.

 

동백은 잠결에 장작 타는 소리를 들었다.

부엌에서 그릇이 부딪히면 눈을 뜨기 전에 무진의 이름이 입술까지 올라왔다가 멎었다. 원복은 밖에서 아침 일을 하고 있었고, 동백은 문을 연 뒤에야 그의 이름을 불렀다.

며칠 뒤 원복은 함께 살게 된 일을 순덕에게 알리려고 남면으로 길을 나섰다.

고개를 넘고 정선읍을 지나 도착했을 때에는 볕이 기울어 있었다. 마당의 도수매에는 꽃이 피기 시작했고, 바람이 지날 때마다 가지 끝의 흰 꽃잎이 가늘게 떨렸다.

 

순덕은 그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대꾸하지 않았다. 순임이 물을 가져오는 동안 원복은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동백이 정한 일이냐?”

“그렇습니다.”

순덕은 물그릇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마당을 내려다보던 눈길이 원복의 짚신에 머물렀다가 부엌으로 옮겨 갔다. 저녁에 안칠 곡식이 작은 바가지에 담겨 있었다.

 

“추운 집에서 혼자 지내게 하지는 마라.”

원복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순덕은 끝내 아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가 가져온 보리 자루를 부엌에 들여놓는 동안 순덕은 마당으로 내려왔다. 원복의 어깨에 붙은 도수매 꽃잎 하나를 떼어 주고, 잠깐 그의 옷깃을 만졌다.

“오늘은 자고 가게. 어두워지겠네.”

그날 밤 원복은 남면에서 묵었다. 순덕은 자루에서 보리를 한 바가지 덜어 씻고 솥에 안쳤다. 밥물이 끓어오르자 불을 낮추었으며, 선반에서 순임의 그릇과 제 그릇을 내려놓은 뒤 손님 몫의 그릇을 꺼냈다.

 

이번에는 도로 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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