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33부 -산을 내려오다
갑오년(甲午年) 가을, 무은담(霧隱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날이 저물기를 기다렸다.
낮에 고개를 넘은 이도 부엌에 불이 켜진 뒤에야 사립문을 밀었다.
산마루의 볕이 붉게 식는 동안 밥 짓는 연기는 찬 공기에 눌려 담장 가까이 흘렀다.
개가 짖으면 멈췄다가 집 안에서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나야 등에 멘 보자기를 내려놓았다.
유시헌은 누구냐고 묻기 전에 발부터 보았다.
짚신을 잃은 발에는 마른 풀을 감았고, 풀 사이로 배어 나온 피가 버선과 함께 굳어 있었다.
평창과 영월, 제천에서 온 이들은 도인을 잡아들인다는 소식에 집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함께 주문을 외우던 이가 붙잡히자 다음에는 제 차례일까 두려워 고개를 넘었다.
정선 무은담의 유시헌을 찾아가면 몸을 숨길 곳을 얻고 다른 도인들의 소식도 들을 수 있다는 말을 따라온 길이었다.
평창에서 온 사내가 문턱에 앉아 발에 감은 풀을 푸는 동안 영월 사람이 물을 데웠다. 제천에서 넘어온 이는 사립문 밖을 한 번 더 살핀 뒤 문을 닫았다
방에 든 사람마다 다른 고을 이름을 댔으나, 누가 붙잡혔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길어졌다.
이름 하나 뒤에 형제와 이웃, 곡식을 빌려준 집까지 따라 나왔다.
무진은 물에 손을 넣어 온도를 살피고 사내의 발 위로 조금씩 부었다. 버선이 살에서 떨어질 때마다 무릎이 움찔했고, 굳은 피가 풀려 대야 가장자리로 번졌다.
“집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를 내놓으라고 했소.”
사내는 젖은 풀을 무릎 곁에 내려놓았다.
“아내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했더니 곡식 뒤지는 손이 먼저 들어갔지. 도인을 먹인 곡식이라면서.”
다른 발은 발등이 부어 버선의 매듭조차 풀기 어려웠다. 무진이 가위를 가져오자 사내는 발을 조금 당겼다가 도로 내밀었다.
“도에 들기 전부터 먹던 보리인데.”
부엌에서 솥뚜껑이 열리며 보리와 감자 익는 냄새가 들어왔다.
사내는 그쪽을 보았다가 눈을 내렸다. 무진은 버선을 잘라 벌리고, 살에 붙은 곳은 젖은 헝겊으로 덮었다.
“집에선 이것보다 더 아팠을 거요.”
사내가 발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무진은 아내의 일을 더 묻지 못했다.
영월 사람이 수건을 건넸다. 손가락 마디마다 검은 딱지가 앉아 있었다.
“달아난 집의 환곡까지 남은 집에 물렸소. 빌리지 않은 곡식을 갚고도 장부를 보여달라는 말은 못 했지.”
방 안에서 어린 아들이 군적에 올랐다는 말이 나왔다.
제천 사내는 밭을 돌려주고도 빚 문서가 따라왔다고 했다. 무진은 젖은 헝겊을 갈았다. 평창 사내가 이를 악물자 이야기를 하던 이들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그는 살에 붙은 버선 조각이 저절로 떨어질 때까지 물을 적셨다.
제천에서 온 이가 품에서 글 한 장을 꺼냈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종이는 접힌 자리가 닳고 귀퉁이에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전에도 주문을 외운다는 까닭으로 매를 맞거나 풀려날 돈을 마련하려 밭을 넘긴 사람이 있었다.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시작된 싸움이 커진 뒤에는 동학(東學)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사정부터 들으려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모이면 난리를 꾀한다 했고, 흩어져 생업으로 돌아가도 접주(接主)가 숨은 곳을 대라며 붙잡았다.
유시헌은 글을 읽고도 한동안 내려놓지 않았다.
“작년에는 대궐 앞까지 갔소. 돌아가 생업을 지키면 편안히 살게 해주신다 하여 돌아왔지. 보은(報恩)에서도 물러났소.”
그는 문턱에 놓인 피 묻은 풀을 보았다.
“여기까지 피해 온 사람에게 내가 또 어디로 돌아가라 해야 하오.”
무진은 사내의 발 아래 마른 헝겊을 받쳤다. 관아에 갇힌 광부들이 떠올랐다. 밀린 품삯을 달라던 사람들이었으나 돌아온 말은 누가 시켰느냐는 것이었다. 백도겸이 중재하러 찾아갔어도 대문은 오래 열리지 않았다.
장터에서는 기군문란(欺君紊亂)이라는 말이 돌았다.
임금을 속이고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뜻이라 했다. 갇힌 이들이 그 말을 알아듣기나 했을까. 그들이 아는 것은 몇 달째 받지 못한 품삯과 일을 마치고 돌아가서도 빈 솥을 보아야 하는 집의 저녁이었다.
“도인이라는 말만 거두면 풀어주겠답니까?”
백도겸이 고개를 저었다.
“함께 주문 외운 사람을 대라 하오. 그 이름을 받아야 놓아주겠다고.”
평창 사내가 발을 싸던 손을 멈췄다.
“그러면 나와도 돌아갈 집이 없겠구려. 내 입으로 이웃을 다 잡아가게 했는데.”
바람이 문풍지를 눌렀다. 처마에 매달아 둔 옥수수 잎이 서로 비볐다. 무진은 발목의 매듭을 조금 풀었다. 밤새 더 부을 발이 헝겊에 눌리지 않도록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을 남겼다.
그해 전주성(全州城)이 농민군에게 넘어가자 조정은 청(淸)에 원병을 청했다.
청군이 아산(牙山)에 상륙하자 일본(日本)도 군대를 보냈다.
농민군이 전주에서 물러난 뒤에도 두 나라의 군대는 돌아가지 않았고, 조선의 철군 요구는 그들의 다툼 사이에서 밀려났다.
음력 유월 스무하룻날, 일본군이 경복궁(景福宮)에 들이닥쳤다.
궁을 지키던 조선 군사들이 쓰러졌고 왕이 머무는 궁문마저 외국 군대의 힘에 걸렸다.
가을밤, 고종(高宗)은 등잔 가까이 놓인 보고서를 당겼다.
처마 끝의 물이 돌바닥으로 떨어졌다. 발소리가 문 앞에 닿자 고종은 읽던 줄에서 눈을 떼었다. 유월의 새벽 이후에는 보고의 내용보다 그 뒤에 누가 서 있는지 먼저 헤아리게 되었다.
보고서에는 강원도 여러 고을의 이름이 놓여 있었다.
붉은 인장 아래 취당(聚黨), 무리를 모았다는 글자가 보였다. 사람의 수와 무기, 움직일 고개는 적혀 있었으나 집을 나선 까닭은 동학에 물들었다는 말로 갈음되어 있었다.
고을마다 사람들이 모여 관아의 명을 거부하면 조정의 말은 어디까지 닿을 것인가.
그러나 백성을 누르려고 빌린 군대는 궁문까지 차지했다. 다시 그 힘에 기대면 왕의 곁에 무엇이 더 남을 것인가.
고종은 보고서의 접힌 자리를 손바닥으로 폈다.
종이는 펴졌으나 구김은 남았다. 사정을 살피는 동안 무리는 늘어날 수 있었고, 군사를 보내면 억울한 사람이 섞여 죽을 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이름으로 명이 내려갈 터였다.
“고을의 사정과 군사의 형편을 더 알아 올리라.”
내관이 엎드렸다.
고종은 백성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아오라 덧붙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보고서를 덮은 손이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한양에서 오간 말은 여러 고개를 넘어 정선에 닿았다.
일본 군대가 조선 군사와 함께 농민군을 치려 한다는 소식도 뒤따랐다.
일본 군대가 이 산골까지 들어오겠느냐는 사람도 있었으나, 무진은 대궐의 담을 넘은 군대가 산길 앞에서 멈출 까닭을 찾지 못했다.
제천에서 온 글은 며칠 동안 사람들의 손을 돌았다. 밤이면 유시헌이 등잔 아래 펼쳐 읽었고, 낮에는 글을 아는 이가 부엌과 마당에서 그 뜻을 풀어주었다.
토지세를 부풀려 거두고 죽은 이와 어린아이에게 군포를 물리며 빌리지도 않은 환곡을 갚게 하는 삼정(三政)의 폐단을 바로잡아,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자는 뜻이 적혀 있었다.
영월 사람이 종이 위의 한 줄을 짚었다.
“죽은 사람 이름부터 지워주면 좋겠소. 묻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산 사람처럼 내라 하니.”
마당에서 듣던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곡식을 거둔 뒤 제집 솥에 넣을 몫이 남는 것이 먼저였다. 방 안에서는 평창 사내가 발을 뻗고 앉아 있었다.
“나는 아내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지 않고 살았으면 하오.”
유시헌은 종이를 조금 낮췄다.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은 이들에게 거창한 말이 아니었다. 죽은 아버지와 어린아이에게 군포를 물리지 않고, 거둔 보리를 식구들과 나누어 먹으며, 밤마다 누가 잡으러 올까 두려워하지 않고 사는 것이었다.
지왈길은 그 글을 백도겸에게 건넸다.
“각자 소장을 내면 한 사람씩 잡혀 들어갑니다. 갇힌 사람을 내놓으라는 말도 함께 해야겠습니다.”
백도겸은 글을 접지 않은 채 무진을 보았다.
“사람을 모으면 먹이고 재워야 하오. 따라나선 집의 식구들도 살펴야 하고.”
“떠날 수 있는 사람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지왈길은 제천(堤川)과 청풍(淸風) 쪽에서 온 이들에게 길목의 형편을 물었다. 글에는 청풍 일대의 동학교도들을 이끄는 접주 성두환(成斗煥)의 이름도 있었다. 여러 고을에 흩어진 동학 모임인 접(接)들이 정선에서 만나 함께 나설 사람과 가져올 식량을 확인하자는 말이 오갔다.
몰운골(沒雲谷)을 비롯한 금점의 광부들도 접으로 찾아왔다.
돌가루가 박힌 손으로 자루를 내려놓으며, 다쳐 쉰 날의 식량값까지 빚으로 붙었다고 했다. 금은 산 밖으로 나갔으나 그것을 캐낸 사람은 다음 끼니를 꾸어야 했다.
무진이 아는 얼굴도 많았다.
나루에서 만난 사람이 갱 안에 있었고 돌을 나르던 사람이 장터에서 소장을 써줄 이를 찾았다. 관아에 갇힌 광부들은 다른 금점 사람들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갱을 비우고 나와도 되겠소?”
지왈길이 묻자 몰운 쪽 사내가 대답했다.
“돌아갈 때는 제 품삯을 받고 들어가고 싶소. 이대로면 일하러 가는 건지 빚 갚으러 갇히는 건지 모르겠으니.”
내려놓은 자루에서는 굳은 보리밥 냄새가 났다. 밥알 사이에 돌가루가 끼어 있었다.

정선은 오래전부터 도인들이 몸을 피하고 소식을 잇던 곳이었다.
장터에서는 정감록(鄭鑑錄)에 나온다는 십승지(十勝地) 이야기도 돌았다. 난리가 나도 목숨을 보전할 땅을 꼽는 사람 곁에서 누군가는 물과 밭이 있는지부터 보아야 한다고 했다.
무진은 금을 실어 나르는 길과 나졸이 금점으로 올라오던 길을 떠올렸다. 피하러 온 사람이 길을 잃는 골짜기에서도 잡으러 온 사람은 집을 찾아냈다.
그날 밤, 사람들이 잠든 뒤 무진은 처마 밑으로 나왔다.
찬비가 그친 하늘에 별이 드문드문 보였다.
엎어 둔 대야를 바로 세우자 남은 물이 발등으로 흘렀다. 낮에 씻어준 사내의 피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대야를 처마 안으로 밀어놓고 젖은 손을 저고리에 문질렀다.
어릴 적 할아버지에게 들은 거칠현 이야기가 떠올랐다.
거칠현동(居七賢洞).
고려(高麗)가 무너진 뒤 일곱 선비가 들어와 살았다는 골짜기였다. 할아버지는 그들이 옛 도읍을 향해 절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면 목소리를 낮췄다. 변귀수(邊貴壽)를 집안의 어른으로 받들며 족보를 펼쳐 무진의 손가락을 짚어주기도 했다.
어린 무진은 읽을 수 없는 이름 아래 손을 놓았다.
글자는 반듯했고 종이를 넘기는 손톱 밑은 깨끗했다.
그때는 그 반듯함이 사람을 지켜주는 줄 알았다.
아버지는 보리가 물에 잠겼다고 말했다.
도지를 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봄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관아에서도 그 말을 했을 것이다. 장부에는 다른 말이 남았고 아버지는 곤장을 맞았다.
곤장을 맞고 돌아온 아버지는 몸을 돌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할아버지는 방 앞을 서성였으나 끝내 문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흘 만에 숨지자, 할아버지는 유서를 남기고 그토록 아끼던 도수매에 목을 맸다.
무진은 유서를 읽은 뒤에도 할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다. 다만 아들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 알고 나서는, 아버지의 방 앞에서 돌아서던 그 등을 미워하기가 전보다 어려워졌다.
칠현도 산 아래를 등지고 들어왔다.
무진은 그들이 견딘 밤을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칠현이 관복을 벗고도 절개를 지켰다고 했으나, 산골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무진은 부엌에 놓인 보리 솥을 바라보았다. 일곱 선비도 밭을 일구고 물을 길으며, 저런 솥에 곡식을 안쳐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방 안에서 평창 사내가 앓는 소리를 냈다.
무진이 문을 조금 열자 영월 사람이 이불 밖으로 나온 발을 덮어주고 있었다. 더 깊은 골짜기로 옮겨간다면 저 발로 또 고개를 넘어야 했다. 어디에 닿아야 그만 달아나도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입속으로 주문(呪文)의 첫머리를 외웠다가 멈췄다.
사람 안에 한울이 있다면 나졸에게도, 품삯을 주지 않는 물주에게도 한울이 있을 것이다.
그들을 향해 날을 세우면서 사람을 모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손바닥을 펼치자 헝겊을 묶다가 묻은 피가 굳은살 사이에 말라 있었다. 창을 들지 않는다고 이 피가 멎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창을 든 손이 곧 옳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무진은 문을 닫기 전에 사내의 발이 이불 안에 들어 있는지 한 번 더 보았다.
영월과 평창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무은담과 여량의 접(接)에서 잠자리를 얻고, 그곳 도인들의 안내로 길을 이어갔다. 몰운골 금점의 광부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정선에서 사람을 모으면 여량과 임계를 거쳐 강릉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지왈길은 먼저 정선에서 사람을 추슬러야 한다고 했다. 갇힌 광부를 내놓게 하고 사람과 식량을 확인한 뒤에야 고개 너머를 의논할 수 있었다.
홍천과 횡성에서도 사람이 모인다는 소식이 왔으나 각 접의 사정은 달랐다.
지왈길은 여량과 임계의 집들을 다녔다. 누가 떠날 수 있느냐고 묻기 전에 누가 붙잡혔는지, 남은 식구가 어디서 자는지부터 확인했다.
한 집에서는 아내가 남편 대신 문을 열었다. 뒤꼍에는 거두다 만 콩대가 쌓여 있었다.
“돌아오면 접으로 보내겠소.”
여자는 빈 뒤꼍을 보았다.
“돌아오면요.”
지왈길은 그 집 이름 옆에 붓을 대었다가 떼었다. 여자가 내민 물을 마시고 콩대에 씌울 거적이 있는지 물었다.
출발을 하루 앞둔 아침, 정선의 동학 지도자들은 갈래산(葛來山) 적조암(寂照庵) 아래에 모였다.
밤사이 내린 이슬이 솔잎 끝에 매달렸다.
볕이 들지 않은 바위에서는 냉기가 올라왔고 젖은 낙엽을 밟으면 짚신 밑으로 물기가 스몄다.
북평에서 온 이들이 감자 보자기를 내려놓는 동안 유시헌은 암자로 오르는 길을 바라보았다.
정암사(淨巖寺)에 딸린 작은 암자는 산등성이 아래 몸을 낮추고 있었다.
처마 한쪽이 처졌고 비를 막으려 덧댄 나무판은 젖어 검었다. 스물두 해 전 최경상이라 불리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동행한 도인들과 마흔아홉 날 기도했다는 곳이었다.
그때도 쫓기는 사람들이 산을 올랐다. 이번에는 산을 내려갈 사람들이 모였다.
“잠깐이라도 마음을 살피고 갑시다.”
유시헌이 말했다.
“사람을 데리고 나설 이들이 제 마음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고 갈 수는 없소.”
지도자들은 창과 낫을 바위 곁에 세워두었다.
물을 떠온 사발이 평평한 돌 위에 놓였다. 젖은 소매를 걷고 손을 씻은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았다. 무진이 무릎을 굽히자 짚신에 붙은 낙엽 하나가 돌 위로 떨어졌다.
유시헌이 먼저 강령주문(降靈呪文)을 외웠다.
“지기금지 원위대강(至氣今至 願爲大降).”
지극한 기운이 이제 이르니, 크게 내려주시기를 빈다는 뜻이었다. 산길을 걸어온 숨이 가라앉자 목소리가 조금씩 한데 모였다.
이어 본주문(本呪文)이 흘렀다.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한울님을 모시고 그 조화에 마음을 정하며, 평생 잊지 않고 온갖 일의 도리를 알아간다는 뜻이었다.
무진은 ‘시천주’에 이르러 눈을 감았다.
아버지를 떠올리려 했으나 평창 사내의 부은 발이 먼저 보였다. 그 뒤로 관아에 갇힌 광부들의 얼굴이 왔다. 이름을 아는 사람과 이름을 듣고도 기억하지 못한 사람이 섞여 있었다.
주문이 몇 차례 이어진 뒤 유시헌이 손을 모았다.
“한울님, 갇힌 사람에게 돌아갈 길을 열어주십시오. 집을 떠난 이에게 밥과 잠자리를 주십시오. 저희가 두려워 곁의 사람을 버리지 않게 하시고, 성이 나 죄 없는 사람을 해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목소리가 낮아졌다.
“죽은 이를 앞세워 살아 있는 이에게 죽으라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길을 찾도록 저희 마음을 붙들어주십시오.”
기도가 끝난 뒤에도 누구도 곧 일어나지 않았다. 사발의 물 위로 솔잎 그림자가 흔들렸다.
장익수가 무릎 위의 손을 펴며 말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올라오는 말이 날마다 다르오. 도인을 잡는다 하고 싸움이 났다 하오. 죽었다는 말도 뒤따르지만 몇인지 아는 사람은 없소.”
유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주성 밖 싸움에서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왔소. 수백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여기서 그 수를 확인할 길은 없소.”
무진은 눈앞의 사람들을 보았다. 그곳에 쓰러진 이들도 밥을 싸고 짚신을 고쳐 신었을 것이다. 며칠 뒤 돌아오겠다고 말한 집도 있었을 것이다.
“살아서 돌아간 사람도 편히 지내지 못합니다.”
그가 말했다.
“물러난 뒤에도 사람을 내놓으라는 말은 그치지 않습니다.”
백도겸이 무진을 보았다.
“그래서 나서겠다는 것이냐”
“갇힌 사람을 데려오고 더 잡아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어서지 않으면 이 땅의 백성들이 얼마나 더 피를 뿌릴지 모릅니다.”
무진은 바위 곁에 세워 둔 창들을 보았다.
“함께 나서되, 함께 돌아올 길부터 정해야 합니다.”
유시헌은 사발을 들어 남은 물을 나누었다. 무진은 한 모금 마시고 떨리는 손으로 사발을 받쳐 다음 사람에게 건넸다.
여량의 접사(接司) 이중집은 다른 길로 들어온 이들의 이름을 맞춰 보았다.
두 번 적힌 이름을 지우고 어머니가 아파 돌아간 사람 곁에는 까닭을 적었다. 젊은이 하나가 지금 돌아갈 때냐고 하자 지왈길이 붓을 내려놓았다.
“병든 어머니 두고 나온 사람에게 남의 목숨 지키라 할 수는 없소. 집을 돌볼 사람을 구해 보고 다시 오라 했소.”
지왈길은 좁은 산길로 움직일 무리를 나누었다.
다친 이를 가운데 두고 뒤처지는 사람이 생기면 누가 기다릴지도 정했다. 가져온 곡식을 펼치니 감자 몇 알과 보리주먹밥 두 덩이가 한 사람 몫의 전부인 자리도 있었다. 묵은 무장아찌를 조금 보탠 집도 있었다.
“군사를 부르는 글은 왔는데, 먹일 곡식은 따라오지 않는구려.”
이중집이 낮게 말했다.
지왈길은 가까운 마을에 보낼 사람을 골랐다. 내준 곡식은 적어두고 내놓을 것이 없다는 집에서는 더 청하지 말라 했다.
무진은 나무창을 쥐었다.
허리에는 광석 자루의 끈을 끊고 강가의 풀을 베던 낫을 꽂았다. 자루는 익숙했으나 날이 향할 곳을 생각하면 손바닥이 차가워졌다.
장익수가 곁으로 왔다.
“관아에서 총을 내밀면?”
무진은 곧 대답하지 못했다. 뒤에서 이중집이 이름을 불렀다. 부를 때마다 대답이 돌아왔다. 막 떨리던 목소리도 있었고 남의 대답에 웃던 사람도 있었다.
백도겸이 두 사람 곁에 섰다.
“아무 대책 없이 몰려가면 어찌하겠소. 대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모두 그 앞에서 죽을 작정이오?”
주변의 사람들이 말을 멈췄다.
“갇힌 사람을 내놓으라 하고 도인 잡는 일을 그치게 해야 하오. 그 말을 함께 하러 가는 것이오. 성이 났다고 먼저 불을 놓으면 안 되오.”
그는 무진의 낫을 보았다.
“앞에 선 사람이 낫을 빼면 뒤에서도 빼게 되오.”
무진은 낫에서 손을 떼었다.
“먼저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갇힌 이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우리 말을 전하겠습니다. 대문 앞에 닿기 전에 물러날 길도 맞춰두겠습니다.”
장익수는 창을 짚고 서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은 그와 함께 산 아래로 이어진 길을 살폈다.
그날은 암자 아래에서 머물렀다. 낮에는 사람과 곡식을 확인하고, 해가 기운 뒤에는 마을로 보낸 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처마 밑에 누운 사람들 사이로 빈 보자기가 걸려 말랐다.
이튿날 새벽, 적조암 아래를 떠난 사람들은 전날 정한 무리대로 갈래산을 내려왔다. 앞사람의 짐이 솔가지를 건드릴 때마다 찬 이슬이 뒤따르는 이의 어깨에 떨어졌다. 무진은 부은 발에 헝겊을 감은 사내 곁에서 걸었다. 길이 좁아지면 먼저 내려가 창끝으로 미끄러운 돌을 짚어주었다.
무리는 이백 명 남짓이었다.
마을을 지날 때마다 지게를 내려놓고 따라오는 농부와 장터 일을 이웃에게 맡긴 사람이 더해졌다. 영월에서 올라오는 무리와 평창에서 넘어오는 무리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으며, 제천과 청풍, 청주에서 온 사람들도 그 사이에 섞였다.
길목에서 만난 이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 전에 누구를 따라왔느냐고 물었다. 접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야 창을 낮췄다. 지난 주문 모임에서 만났던 얼굴을 알아보고 팔을 붙드는 사람도 있었다.
지왈길은 만날 곳까지 사람을 보내고 다른 길로 온 이들에게 길목의 형편을 물었다. 서로의 수를 더할 때마다 먹일 입도 함께 늘었다.
뒤늦게 온 사람이 관아 소식을 전했다. 갇힌 광부들이 아직 나오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이름을 더 대라 한다더군요.”
무진은 옆에서 걷던 사내의 창을 잠깐 받아 들었다. 사내는 빈손으로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내놓으라 했다.
저녁에 보자기를 풀자 감자 두 알이 남아 있었다. 사내는 하나를 무진에게 내밀고 다른 하나를 반으로 갈라 뒤따라온 사람에게 건넸다. 무진은 제 몫을 다시 나누었다.
삶은 감자와 보리주먹밥은 사흘을 버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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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를 사흘 앞둔 날 아이들을 불렀다. 사위도 며느리도 손주들도 데려오지 말고, 이번에는 우리 네 식구만 밥을 먹자고 했다. 딸은 생크림 케이크와 어머니가 좋아하던 포도를 사왔다. 아들은 닭고기와 숯, 식당에서 쓰던 것과 닮은 낡은 석쇠를 가져왔다. 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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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변기까지 가는 데 처음에는 십 분이 걸렸고, 나중에는 삼십 분이 걸렸다. 어느 겨울 새벽, 아내를 화장실로 옮기다 둘이 함께 넘어졌다. 아내의 몸이 내 가슴 위로 무너졌고, 허리를 찌르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③] 아내가 제 몸 안에 갇혔다
아내가 쓰러진 것은 오월의 점심 장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아내가 쉰네 살 되던 해였다.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나는 계산대에 앉아 잔돈을 세고 있었다. 주방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와 접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날마다 듣던 소리였다. 그릇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