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제32부 - 무진을 멈춰 세운 백도겸
무은담을 찾는 사람들은 하룻밤을 머물며 주문을 외우고, 날이 밝으면 저마다의 일터로 돌아갔다.
같은 솥의 밥을 먹었던 광부도 금점에서는 물주의 눈치를 살폈고, 백정이 건넨 사발을 받았던 유생도 장터에서 그를 만나면 인사에 앞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서 넘었던 문턱은 문밖에서 다시 높아졌다.
무진은 지난 두 해 동안 나루와 금점을 오갔다. 강에서는 물살을 읽고, 갱에서는 곡괭이 소리 사이로 돌이 갈라지는 소리를 가려 들었다.
삿대를 밀던 손으로 광석을 나르고 밤이면 부순 돌을 씻었다. 손금에 박힌 돌가루는 물에 오래 담가도 빠지지 않았고, 다시 노를 잡으면 갈라진 살갗이 벌어졌다.
사금 한 점이 번쩍일 때마다 감독은 물가로 내려왔다. 젖은 손바닥을 펴게 하고 소매와 허리춤을 살폈다. 금은 작은 주머니에 차곡차곡 모였으나 일꾼들이 돌아온 움막의 솥에는 여전히 조보다 물이 많았다. 죽을 휘저으면 낟알이 잠깐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며칠째 비가 내려 갱에 물이 차고 일이 멎었다. 일꾼들은 젖은 짚신을 화덕 둘레에 세워 놓고 죽사발을 감쌌다. 장작을 더 넣어도 등에 붙은 옷은 마르지 않았다.
약초를 팔러 왔다는 낯선 사내 셋도 젖은 옷자락을 짜며 불 가까이 앉았다. 눈썹에서 귀밑까지 흉터가 이어진 사내는 자리를 옮길 때마다 출입구를 살폈다.
두칠이 다친 다리를 뻗고 사발을 내려놓았다.
“오늘도 품삯은 없겠군. 갱에 못 들어갔으니 일을 안 했다고 할 테지.”
“물이 찬 게 우리 탓인가?”
“물주에게는 비도 우리 빚이야.”
몇 사람이 웃다가 기침을 했다. 흉터 난 사내가 두칠에게 물었다.
“품삯을 못 받은 지 얼마나 되었소?”
“석 달이오.”
“그동안은 무엇을 먹었소?”
“빌려 먹었지. 이 사발에 든 것도 장부에 올라가오.”
“곡괭이가 부러지면 연장값을 물고, 다쳐 누우면 품삯은 끊겨도 밥값은 붙소. 석 달을 일했는데 받을 돈보다 갚을 돈이 많다더군.”
떠나려면 선금부터 갚아야 했다. 지난달 달아난 사내의 집에는 금점에서 보낸 사람이 찾아갔고, 아내가 이웃에게 곡식을 빌려 돌려주었다고 했다.
흉터 난 사내는 충청도에서 남의 땅을 부치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흉년이 든 해에 도지를 내지 못하자 마름이 솥을 떼어 갔다. 이웃집 아궁이에 솥 하나를 걸고 곡식이 있는 집은 곡식을, 없는 집은 장작을 보태며 다음 농사까지 버텼다.
“그런데 이듬해에는 더 거두려 하더군. 우리가 아직 살아 있으니 내놓을 것도 남았다고 여긴 모양이오.”
“하나씩 떠났소. 나중에는 그 솥에 불 때는 집도 없어졌지.”
무진의 사발에는 식은 죽 위로 얇은 막이 앉아 있었다.
동학에 들까 망설이던 젊은 광부가 물었다.
“포졸이 오면 몽둥이를 들고 막아도 됩니까? 사람을 한울처럼 섬기라면서요.”
“우리도 그 말을 두고 다투었소.”
“그러다 사람을 죽이면요?”
사내는 곧 대답하지 못했다. 화덕 안에서 젖은 장작이 쉰 소리를 냈다.
“나도 두렵소. 때리는 자들을 모조리 때려눕히자는 사람도 있었고, 그러면 우리도 다를 게 없다는 사람도 있었소. 같은 주문을 외워도 몽둥이가 눈앞에 오면 생각이 갈렸지.”
무진은 아버지가 곤장을 맞던 날 관아 담장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매가 떨어질 때마다 누군가 어깨를 움츠렸고, 비명이 끊기면 담장 너머를 보려고 발뒤꿈치를 들었다. 누구도 대문으로 가지 않았다. 무진도 그들 사이에 있었다.
“그날 사람들이 함께 들어갔다면 아버지가 살았을까요?”
사내가 그를 바라보았다.
“모르겠소. 몇 사람이 더 맞았을 수도 있지.”
무진은 고개를 숙였다. 사내는 잠시 뒤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자네가 아버지를 업고 나올 때 누군가는 등에 손을 받쳤겠지.”
무진은 아버지를 업고 몇 걸음마다 멈추던 길을 떠올렸다. 등에 닿은 숨이 끊길까 봐 돌아보지도 못했다.
두칠이 다리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우리가 함께 달라고 하면 품삯을 내놓겠소?”
“혼자 달라고 했을 때는 어찌 되었소?”
“싫으면 나가라더군. 나가겠다 하니 빚부터 갚으라 했고.”
벽 쪽에서 누군가 같은 말을 들었다고 했다. 다른 사내도 고개를 들었다. 늘 제 차례에만 듣던 말이 움막을 한 바퀴 돌고 나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무진이 벽에 기대 둔 판자를 가져왔다.
글을 아는 늙은 광부가 숯을 쥐고 누구의 이름부터 적을지 물었으나 선뜻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두칠이 판자를 제 쪽으로 당겼다.
“내 이름부터 쓰시오.”
숯이 거친 나뭇결에 걸려 부러졌다. 늙은 광부는 짧아진 숯을 고쳐 쥐고 이름을 마저 적었다. 두칠 곁에 앉은 사내가 몸을 숙였다.
“내 것도 그 밑에.”
이름이 하나씩 늘어났다. 문 가까이 있던 어린 일꾼은 남은 자리가 있는지 보고서야 입을 열었고, 늙은 광부는 판자를 뒤집어 그의 이름을 적었다.
“두칠만 앞에 세우지는 맙시다.”
벽에 기대 있던 사내가 무릎을 당겨 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불 가까이 옮겨 오며 빈 사발을 발치로 밀었다.
밤이 깊어서야 그들은 다음 날 갱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밀린 품삯과 빚을 함께 확인하고, 물이 빠지지 않은 굴에는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요구할 참이었다.
무진은 문밖을 보았다. 감독이 포졸을 부르면 달리지 못하는 두칠과 늙은 광부부터 붙잡힐 터였다. 날이 밝으면 다른 이들도 집에 두고 온 식구가 먼저 떠오를 수 있었다.
흉터 난 사내가 곁에 앉았다.
“겁이 나는군.”
“그렇습니다.”
“나도 집 문짝이 뜯길 때 뒷문부터 보았소.”
늙은 광부는 숯 묻은 손을 바지에 닦고도 판자에 적힌 제 이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새벽에 감독이 문을 열어젖혔다.
광부들은 밖으로 나왔으나 갱 입구로 가지 않았다. 두칠이 먼저 서고 늙은 광부가 이름을 적은 판자를 그의 곁에 세웠다.
“들어가라는 소리 못 들었나?”
감독이 두칠의 멱살을 잡았다. 무진이 손목을 붙들자 두칠은 그 손을 밀어내고 옷깃을 여몄다.
“품삯은 언제 줄 건지 물주에게 물어 주시오. 갱의 물도 함께 보고요.”
감독은 판자에 적힌 이름을 훑었다. 어린 일꾼들까지 처마 아래 모여 있었다. 빗물이 글씨를 번지게 하자 늙은 광부가 판자를 안으로 당겼다. 감독은 갱을 가리키던 손을 내리고 물주에게 사람을 보냈다.
물주에게서는 기다리라는 말만 돌아왔다. 며칠 뒤 감독은 갱의 물이 빠졌다며 사람들을 다시 들여보냈다. 품삯 이야기를 꺼내면 일부터 하라고 했다.
광부들은 다시 연장을 들었다. 두칠이 품삯 이야기를 꺼내도 곁에 있던 사람들은 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늙은 광부는 이름을 적은 판자를 움막 벽 안쪽으로 돌려 세웠다. 무진도 더 기다려 보자는 말밖에는 해 줄 수 없었다.
그러던 날, 열세 살 아이가 금점 마당의 기둥에 묶였다.
관리인 마상필은 씻어 낸 금가루가 전날보다 적다며 아이를 불러 세웠다. 물통 곁에는 젖은 모래가 발자국에 짓이겨져 있었다. 마상필은 그쪽을 보지 않았다.
“훔친 금을 어디에 감췄느냐?”
“훔치지 않았습니다.”
“금이 제 발로 달아났단 말이냐?”
회초리가 떨어질 때마다 아이의 어깨가 기둥에 부딪쳤다. 팔을 묶은 줄이 당겨져 발끝만 바닥을 긁었다. 갱에서 나온 광부들은 연장을 든 채 멈춰 섰다. 마상필 뒤에는 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있었다.
무진은 곡괭이를 내려놓았다. 회초리가 다시 들리는 사이, 아이의 벗겨진 어깨를 향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만 때리시오.”
“네가 시켰느냐?”
“훔친 것을 본 사람이 있소?”
“내 금점에서 금이 없어졌다. 저놈이 그 자리에 있었고.”
“함께 일한 사람들 말부터 들읍시다.”
마상필이 회초리를 휘둘렀다. 무진은 팔을 들어 그것을 잡았다. 가는 끝이 손바닥을 긁고 지나갔으나 잡은 곳을 바꾸어 힘을 주었다.
“줄을 푸시오.”
마상필이 장정들에게 눈짓했다.
그때 뒤에서 곡괭이가 땅에 놓이는 소리가 났다. 두칠이 다친 다리를 끌며 다가왔고 늙은 광부가 아이 곁에 섰다. 다른 일꾼들도 연장을 내려놓았다. 주문을 아는 사람과 한 번도 외워 보지 않은 사람이 기둥 둘레에 함께 섰다.
장정 하나가 몽둥이를 고쳐 쥐었으나 앞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늙은 광부가 매듭을 풀었다. 줄이 느슨해져도 아이는 팔을 내리지 못했다. 두칠이 겉옷을 벗어 걸쳐 주자 아이는 기둥에서 몸을 떼다가 무릎이 꺾였다. 늙은 광부와 두칠이 아이를 움막으로 데려갔다.
무진이 놓은 회초리가 마상필의 손에 그대로 남았다.
저녁에 아이의 등에 붙은 천을 적셔 떼자 아이가 이를 악물었다. 두칠은 겉옷을 접어 머리 밑에 넣었다. 아이는 엎드린 채 문 쪽으로 얼굴을 돌려 놓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면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일꾼 하나가 아이에게 없어진 금값을 물릴 것이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내일도 저 등에 광석을 지울 거요.”
감독은 낮부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문밖으로 마상필의 방에 켜진 불이 보였다.
밤이 깊자 스무 명 남짓이 금점 마당으로 갔다. 낫이나 몽둥이를 든 사람도 있었으나 사람에게 먼저 휘두르지 않기로 정했다. 아이의 누명을 벗기고 밀린 품삯을 따져 받을 참이었다.
마상필이 창고 앞을 막았다.
“낮에는 아이를 풀더니 밤에는 무엇을 빼앗으러 왔느냐?”
두칠이 판자를 들고 나섰다.
“우리가 일한 값을 받으러 왔소.”
마상필이 뒤에 선 장정에게 눈짓했다. 몽둥이가 판자를 후려쳐 모서리가 갈라졌다. 두칠이 놓치지 않으려 끌어안자 광부 둘이 그의 앞을 막았고, 무진은 창고 문에 손을 짚었다.
“장부부터 내놓으시오. 우리 몫을 따지기 전에는 못 물러납니다.”
몽둥이가 다시 들렸다. 광부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마상필이 뒤쪽의 일꾼들에게 눈짓했으나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창고 문에서 비켜섰다.
“네놈들이 얼마나 먹었는지 똑똑히 보아라.”

장부가 나오자 아이와 함께 금을 씻던 일꾼이 입을 열었다. 물통이 넘어져 모래가 흙과 섞였으며, 낮에도 그 말을 했으나 마상필이 듣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맞는 걸 보면서도 그 말을 다시 못 했소?”
사내는 뒤에 선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그때는 나 혼자였으니까.”
늙은 광부가 등잔을 당겨 장부를 펼쳤다. 처음에는 일한 날과 곡식을 받은 날이 이어졌다. 두칠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다가 한 줄에서 멈췄다.
“이날은 누워 있었소. 밥도 옆 사람이 가져다줬고.”
그 옆에는 새 곡괭이를 내주었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칠이 쓰던 것은 자루에 헝겊을 감은 낡은 곡괭이였다. 무진이 그것을 가져다 발치에 놓자 마상필은 다음 장을 보라고 했다.
다음 장에도 같은 연장값이 붙어 있었다. 무너진 갱의 버팀목 값은 안에 갇혔던 사람들에게 매겨졌고, 다친 이를 업고 내려온 날에도 밥값은 두 번씩 적혀 있었다. 이름이 불린 사내는 받은 것이 없다면서도 장부 가까이 오지 못했다.
아이의 이름은 맨 아래 있었다. 그날 없어진 금값이 빚으로 올라 있었다. 늙은 광부가 액수를 읽자 문 뒤에 서 있던 사내가 되물었다.
“저 아이가 몇 해를 일해야 하는 돈이오?”
마상필은 장부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갚을 때까지 하면 되지.”
무진이 장부 위에 손을 얹었다.
“물통이 넘어진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소.”
“금이 없어진 건 틀림없다. 저놈에게 맡겼으니 저놈이 물어야지.”
마상필은 장정에게 움막에 가서 아이를 데려오라고 했다. 장정이 창고 벽에 걸린 줄을 집어 들었다. 낮에 풀어 준 줄이었다. 한쪽 끝에는 젖은 흙이 묻어 있었다.
두칠이 출입구를 막았다.
“등이 저 지경인데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요.”
“또 달아나면 네가 대신 갚겠느냐?”
장정이 두칠의 어깨를 밀었다. 두칠은 문설주를 붙잡고 비키지 않았다. 줄 끝이 바닥을 쓸었다.
무진은 장부를 들어 올렸다. 마상필이 손을 뻗자 뒤로 물러났다. 등 뒤에서 화덕의 열기가 올라왔다. 펼쳐진 종이 끝이 뜨거운 바람에 떨렸다.
아이의 이름 옆에는 갚지 못할 금값이 적혀 있었다. 무진은 그 장의 모서리를 움켜쥐었다. 얇은 종이가 손안에서 구겨졌다. 불에 넣으면 금세 없어질 것이었다.
“무진.”
늙은 광부가 불렀다.
“그 안에 우리 일한 날도 있소.”
무진은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첫 장에는 두칠이 다리를 다치기 전부터 일한 날짜가 있었다. 아이의 이름은 구겨진 모서리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문가에서 줄 끌리는 소리가 났다. 두칠은 여전히 장정 앞을 막고 있었다. 무진은 장부를 화덕에서 거두었다. 구겨진 모서리를 펴려 하자 손바닥의 상처에 종이가 걸렸다.
“종이를 가져오시오.”
그는 장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적힌 것부터 모두 옮깁시다.”
늙은 광부가 붓을 잡고, 글을 아는 일꾼 하나가 곁에서 날짜와 액수를 불렀다.
빌린 곡식과 받은 적 없는 물건을 나누어 적었다. 이름이 불린 사람은 가까이 와서 말했고, 같은 날 일한 이가 곁에서 확인했다. 마상필이 장부를 덮으려 하자 두칠이 갈라진 판자로 그의 손을 막았다.
무진이 증인을 부르자 사내는 물통이 놓였던 자리와 넘어진 때를 짚었다. 늙은 광부가 그 말을 적고 이름을 물었다. 사내는 문 쪽을 한 번 본 뒤 이름을 댔다.
무진은 마상필에게 붓을 내밀었다.
“없는 빚은 지우시오. 아이 금값도.”
마상필은 붓을 받지 않고 문가의 장정을 보았다.
“왜 서 있느냐. 데려오라니까.”
무진이 장부를 덮었다.
“아이는 못 데려갑니다. 이 장부도 그대로 두시오. 다시 따질 겁니다.”
“내 장부를 네가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그럼 지금 지우시오.”
마상필이 무진을 노려보는 동안 일꾼 둘이 더 들어와 두칠 곁에 섰다. 늙은 광부는 베낀 종이를 말려 품 안에 넣었다.
무진은 장부를 마상필 앞에 놓았다. 검은 표지에는 손바닥에서 묻은 피가 작은 얼룩으로 남았다. 마상필은 그것을 낚아채 품에 넣었고, 무진은 손을 거두었다.
두칠이 마상필에게 베껴 쓴 내역을 내밀었다.
“빌려 먹은 건 빼시오. 남은 품삯은 곡식으로 주시오.”
그는 문고리를 놓지 않은 채 장정들을 불렀다. 한 사람이 몽둥이를 들었으나, 두칠 곁에 선 광부들을 보고 문기둥에 등을 붙였다. 곡식 가마니를 나르던 일꾼들도 마당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날이 밝으면 줄 테니 물러가라.”
두칠이 갈라진 판자를 발치에 내려놓았다.
“기다리라는 말은 석 달을 들었소.”
광부들은 빈 자루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마상필이 부를 때마다 평소 먼저 달려가던 사내까지 자루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처마 밖은 희어지고 있었으나 갱으로 가는 사람은 없었다. 마상필은 허리춤에서 열쇠를 꺼내 창고지기에게 던졌다.
“내준 만큼 적어라. 한 됫박도 빠뜨리지 말고.”
무진도 곡식을 퍼 담는 사람 곁에 앉아 받은 몫을 적었다. 되를 채울 때마다 두칠이 확인했고, 다친 사람의 집에는 함께 지고 갈 일꾼을 붙였다.
이튿날 마상필은 관아에 가서 동학도들이 금점에 몰려와 장정을 밀치고 곡식을 빼앗았다고 고했다. 아이를 때린 일과 밀린 품삯은 말하지 않았다.
소식을 들은 백도겸이 무진을 불렀다. 사랑방에는 청수 한 그릇이 놓여 있었다. 무진은 베껴 쓴 내역과 가져간 곡식의 양을 적은 종이를 내놓았다.
“장부는 어디 있는가?”
“마상필이 가지고 있습니다.”
백도겸은 종이를 읽다가 상처가 벌어진 무진의 손을 보았다.
“태울 생각도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 종이를 내밀기도 어려웠을 걸세.”
무진은 손을 무릎 아래로 내렸다. 백도겸은 아이의 금값 아래 적힌 증인의 이름을 짚었다.
“이 사람은 관아에서도 같은 말을 해 줄 수 있겠는가?”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자네가 곁에 서는 것만으로는 안 되네. 관아에서도 증언할 뜻이 있는지 먼저 물어보고, 식구가 어디 사는지도 알아두게. 아이도 살펴 주고. 나는 유시헌 접주와 의논하겠네.”
“아이를 살피고 증인들의 뜻부터 물어보게. 나는 유시헌 접주와 의논하겠네.”
그러나 며칠 뒤 관아에서 광부 셋을 잡아갔다. 물통이 넘어진 일을 말한 사내도 그 가운데 있었다. 포졸들은 남은 곡식 자루를 끌어냈고, 아내가 빈 자루라고 펴 보인 것까지 빼앗아 갔다.
무진과 광부들은 함께 관아로 갔다. 품삯 내역을 적은 종이를 내밀었으나 문을 지키던 나졸은 받지 않았다.
“금점에 몰려가 곡식을 가져온 자들 말부터 들어 달라는 게냐.”
마상필의 장부와 맞춰 보자고 해도, 아이의 등에 남은 상처를 살펴 달라고 해도 나졸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뒤에 서 있던 광부가 앞으로 나오려 하자 나졸은 창대를 가로놓았다. 무진은 그의 팔을 붙들어 물리고 종이를 품에 넣었다.
품속의 종이가 손에 구겨졌다. 안에서는 발소리가 들렸으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두칠이 물었다.
“내일도 안 만나 주면 어쩔 거요?”
무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대문은 산굽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잡혀간 사내는 금점에서 혼자가 아니어서 입을 열었다. 그를 저 안에 두고 돌아가면 다음에는 누구도 물통이 넘어진 일을 말하지 않을 터였다.
“사람들을 더 데리고 오겠소.”
그날 저녁 무진은 금점과 가까운 마을에 말을 전했다. 잡혀간 사람을 구하려면 함께 관아로 가야 한다고 했다.
누구는 나가겠다고 했고 누구는 문 안에서 대답을 미뤘다. 남쪽에서 관군이 물러났다는 소문을 들은 사내는 낫을 가져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무진은 그 물음에 곧 대답하지 못했다.
밤이 깊자 무은담 사랑채에 사람들이 모였다. 광부들은 젖은 짚신을 문턱 아래 벗었고, 화전민 하나는 낫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왔다. 두칠이 잡혀간 세 사람의 이름을 말하자 방 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일은 우리 집에도 올 거요.”
“이대로 있으면 하나씩 다 끌려갈 게 아니오.”
무진은 사람들의 말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날이 밝으면 관아로 갑시다. 잡혀간 사람을 내놓으라고 함께 요구해야겠습니다.”
문가에 앉은 사내가 물었다.
“포졸이 막으면?”
“이번에는 그냥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때 마당에서 짚신 끄는 소리가 들렸다. 무진이 사람들을 모은다는 말을 듣고 찾아온 백도겸이었다. 유시헌의 집에서 급히 길을 나선 그의 도포 자락에는 진흙이 튀어 있었다. 그는 보자기 밖으로 드러난 낫자루를 살피고 무진 맞은편에 앉았다.
“사람들을 데리고 관아로 가겠다 했는가?”
“셋이 잡혀갔습니다. 내역을 보여 주려 해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문을 밀고 들어가겠다는 것인가?”
무진은 무릎 위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들을 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내일은 가지 말게.”
백도겸의 말에 두칠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끌려간 사람들은 어찌합니까?”
백도겸은 두칠이 앉기를 기다렸다가 낫을 가져온 사내에게 보자기를 풀어 보라고 했다. 닳은 날에 불빛이 닿았다. 사내는 낫을 무릎에 놓고 기다렸다.
“포졸이 칼을 들면 무엇으로 막고, 갇힌 세 사람은 어느 길로 데리고 나올 텐가?”
낫을 가져온 사내가 자루를 고쳐 쥐었다. 무진은 그 손을 보다가 백도겸에게 눈길을 돌렸다.
“막는다고 또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아무 대책 없이 몰려가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 죽을 작정인가?”
문풍지가 바람에 밀렸다. 두칠은 일으켰던 몸을 낮추고 다친 다리를 천천히 폈다.
“자네 혼자 죽겠다고 나서는 일이 아니네. 자네 말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이야. 데리고 갔으면 데리고 돌아와야지.”
무진이 손을 펴자 회초리에 긁힌 자리가 당겼다.
“기다리는 동안 또 잡아가면요?”
“날이 밝는 대로 내가 유시헌 접주와 가겠네. 자네들이 관아에 내밀지 못한 것을 우리가 내밀겠어.”
백도겸이 손을 내밀었다. 무진은 관아에서 받지 않은 종이를 꺼냈으나 곧 건네지 못했다.
“그것마저 듣지 않으면요?”
“돌아와 여기 있는 사람들 앞에서 그대로 말하겠네. 일어서야 한다면 다른 마을과 뜻을 맞추고, 버틸 양식과 사람을 지킬 길부터 마련하세. 그때는 나도 함께 서겠네.”
무진은 사내의 무릎에 놓인 낫을 보았다. 그 곁에서 두칠이 다리를 굽히려다 그대로 두었다.
백도겸이 내민 손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자고 나서는 길 아닌가. 더 많은 사람을 저 안에 남겨 두고 와서는 안 되네.”
무진은 구겨진 종이를 펴서 그의 손에 놓았다.
백도겸은 종이를 등잔 가까이 당겼다.
“물주와 마상필을 함께 앉혀 장부를 맞추겠네. 품삯을 받아 간 일을 곡식 빼앗은 일로 고한 것부터 바로잡아야겠어.”
“잡혀간 사람들도 데려와 주십시오.”
“그러려고 가는 것이네.”
백도겸은 두칠에게 내일 함께 갈 광부들을 정하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잡혀간 세 집의 양식과 땔감을 부탁했다.
사람들은 한동안 더 앉아 있다가 짚신을 찾아 신었다. 낫을 가져온 사내는 무릎 위의 보자기를 펼쳐 날을 감쌌다. 마당에서 누군가 어느 집부터 들를지 물었고, 두칠이 아이 둘이 남은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었다.
백도겸은 종이를 접어 무진에게 돌려주었다.
“내일 자네가 가지고 오게. 장부와 맞춰 볼 때 빠진 것이 있으면 짚어 주고.”
여러 손을 거친 모서리는 펴도 다시 말려 올라왔다.
“저도 금점에 가겠습니다.”
백도겸이 문턱에서 돌아보았다.
“가세. 다만 이번에는 내가 말하는 동안 끝까지 들어 주게.”
무진은 대답하기 전에 마당을 보았다. 두칠이 짚신 뒤축을 당겨 신으려 몸을 숙이고 있었다. 먼저 신을 신은 사내가 그의 팔을 받쳤다.
“그러겠습니다.”
무진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고, 두칠이 일어설 때까지 문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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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병원 언어치료사가 의사소통기기를 한번 써보라며 빌려준 것은 그 무렵이었다. 아내는 말을 알아듣고 글자도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입 밖으로 온전히 밀어내지 못했다. 언어치료사는 작은 태블릿을 거치대에 고정하...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⑦] 당신도 살아
그날 저녁 딸에게 전화했다. “엄마가 기계로 말했어. 요양원에 보내달라고.” 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요?” “안 좋아진 건 오래됐지.” “아빠가 힘들어서 그러는 거예요?” 나는 그 말에 화가 났다. 딸이 나를...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⑧] 돌아오는 차에는 아내가 없었다
입소를 사흘 앞둔 날 아이들을 불렀다. 사위도 며느리도 손주들도 데려오지 말고, 이번에는 우리 네 식구만 밥을 먹자고 했다. 딸은 생크림 케이크와 어머니가 좋아하던 포도를 사왔다. 아들은 닭고기와 숯, 식당에서 쓰던 것과 닮은 낡은 석쇠를 가져왔다. 딸...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⑤] 아내를 씻기고 나는 늙어갔다
병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변기까지 가는 데 처음에는 십 분이 걸렸고, 나중에는 삼십 분이 걸렸다. 어느 겨울 새벽, 아내를 화장실로 옮기다 둘이 함께 넘어졌다. 아내의 몸이 내 가슴 위로 무너졌고, 허리를 찌르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③] 아내가 제 몸 안에 갇혔다
아내가 쓰러진 것은 오월의 점심 장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아내가 쉰네 살 되던 해였다.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나는 계산대에 앉아 잔돈을 세고 있었다. 주방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와 접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날마다 듣던 소리였다. 그릇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