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선 직후에도 정선 정책에 주목한 이재명… 폐광지역 생존 전략이 된 ‘정선형 기본소득 실험’
■ “저 이재명입니다”
“저 이재명입니다.”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며칠 뒤, 당시 최승준 정선군수의 휴대전화에 이름이 표시되지 않은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당시 윤석열 후보에게 패배해 낙선자 신분이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다.
대선 패배 직후였다.
정치권 전체가 충격과 후폭풍에 휩싸여 있었고, 이재명 후보 역시 정치적 거취와 향후 행보를 고민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이 후보의 관심은 의외로 강원도 작은 폐광지역인 정선군의 정책 실험에 향해 있었다.
당시 이 후보는 전화에서 “최 군수님이 추진하고 있는 지역화폐와 재난지원금 정책은 제가 경기도지사 시절 집중적으로 추진했던 정책과 방향이 같다”며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전국 지자체 가운데 가장 먼저 기본소득형 정책을 과감하게 시도하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정선군은 전국에서도 보기 드물게 ‘기본소득형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지역이었다. 코로나19 시기 재난지원금을 네 차례 지급했고, 강원도에서는 처음으로 군민 1인당 30만 원 규모의 민생회복지원금을 지급하며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 폐광지역의 생존 실험
하지만 정선군의 이런 정책은 단순한 ‘퍼주기 논란’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폐광 이후 수십 년째 이어져 온 지역 소멸 위기와 인구 감소, 침체된 지역경제라는 절박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실제 정선군은 석탄산업 쇠퇴 이후 청년층 유출과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됐고, 지역 상권 역시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사북읍과 고한읍 일대 거리 곳곳에는 불이 꺼진 빈 점포들이 늘어났고, 학생 수 감소로 통폐합 이야기가 나오는 학교들도 생겨났다. 저녁 시간이 되면 예전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던 골목 대신 문 닫힌 상가 셔터만 길게 이어지는 날도 많아졌다.
정선군 관계자는 “기본소득과 지역화폐 정책은 단순한 현금 지원이 아니라 지역을 유지하기 위한 생존 전략에 가까웠다”며 “돈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 안에서 순환하도록 만드는 구조가 가장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정선군은 지역화폐인 ‘와와페이’를 중심으로 소비가 지역 내에서 순환하도록 정책 구조를 설계했다. 군민들에게 지급되는 지원금은 대형 온라인 쇼핑몰이나 외부 소비가 아닌 전통시장과 지역 상권에서 사용되도록 유도됐다.
■ 와와페이와 살아난 시장
정선아리랑시장 상인들 사이에서는 “지원금 지급 이후 시장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시장 골목 한쪽에서 각종 나물을 파는 한 상인은 “코로나19 이후 손님이 점점 줄면서 가게를 접을까 고민한 적도 많았다”며 “하지만 지원금 지급 이후 손님이 눈에 띄게 늘어나 숨통이 트였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어르신들이 와와페이로 장을 보면서 ‘장날에 쓰려고 일부러 기다렸다가 왔다’고 이야기하는 걸 들으면 진짜 지역 안에서 돈이 돌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며 “예전보다 시장에 웃음소리가 조금은 많아진 것 같다”고 했다.
정선군은 지난해 3월 1인당 30만 원씩 민생회복지원금을 지급했다. 정선군이 의뢰해 대한자치행정연구원이 수행한 효과 분석 결과에 따르면, 약 97억 원의 직접 소비 효과 외에도 연계 소비 11억 원, 총 108억 원에 달하는 민간 지출이 유도된 것으로 추정됐다.
민생회복지원금 지급 이후 3월 유통업 매출은 전년 동기간 대비 27.1% 증가했으며, 외식업도 11.4% 증가해 지역 소상공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원금 사용률도 99.5%에 달했으며, 사용 점포는 슈퍼마켓, 주유소, 외식업 등 1,570개소, 가맹점 수는 약 250개 증가하는 등 지역화폐 기반 소비 구조도 확대됐다.
이와 관련해 최근 귀촌한 주민의 사례도 눈길을 끈다.
수도권 생활을 정리하고 정선으로 내려온 50대 정모 씨는 상동읍에서 카페를 열었다. 정 씨는 “처음에는 지방 소도시에서 창업하는 게 두려웠지만 지역화폐 사용층이 생각보다 두텁다는 걸 느꼈다”며 “기본소득과 와와페이 정책 덕분에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지역 상권을 이용하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 “지원금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나 모든 주민들이 정책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사북읍에서 조그마한 상점을 운영중인 한 주민은 “지원금도 도움이 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안정적인 일자리와 지역 산업 육성”이라며 “지역화폐 덕분에 시장은 조금 살아나는 느낌이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기업 유치나 청년 일자리 정책도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들은 “당장은 지역 상권에 도움이 되는 것이 체감되지만, 이런 정책을 지방재정만으로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은 “기본소득 지원금이 끊기면 지역 소비가 다시 급격히 위축되는 것 아니냐”며 “기본소득 정책이 본 사업화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선군 역시 이런 논란을 의식하고 있었다.
군 내부에서는 단순 현금 지급을 넘어 지역 소비 구조와 생활 인프라, 교통, 복지, 공동체 회복까지 함께 연결해야 정책 효과가 지속될 수 있다는 논의가 이어졌다.
실제 정선군은 2010년 무상급식 도입, 2020년 버스 완전공영제 시행, 지역화폐 확대, 재난지원금 지급 등을 통해 전국적인 정책 실험을 꾸준히 이어온 지역이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이러한 흐름을 주목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해 7월 3일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지역균형발전 방안을 설명하던 중 다시 한 번 정선군 사례를 직접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이제는 지역 간 격차가 지역균형발전과 성장을 가로막는 수준까지 왔다”며 “정선군처럼 인구소멸 위험이 큰 군 단위 지역에는 예산과 정책에 가중치를 더 둬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전국이 주목한 정선 모델
정선군의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사업 선정에는 전국농어촌군수협의회의 발빠른 움직임도 도움을 줬다.
지난해 7월 초 윤석열 정부 당시 임명됐던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유임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농민단체 사이에서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던 시기, 전국농어촌군수협의회는 오히려 환영 현수막을 내걸었다.
당시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일부 농민단체는 송 장관 유임 반대 농성을 벌이고 있었지만, 군수협의회(당시 회장 최승준 정선군수)는 송 장관이 지역 자립 역량 강화와 농산어촌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적임자라고 봤다. 또 “이 대통령이 전 정부 장관 출신이라도, 따지지 않고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적임자를 쓰겠다는 판단”이라며 “탕평과 통합, 실용주의 면모를 보여주는 인선”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정선군은 대통령의 지속적인 관심 속에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사업 대상지에 포함됐다.
현재 정선군은 지역에 주민등록을 두고 30일 이상 실거주하는 군민들에게 월 15만원의 카드형 지역화폐 ‘와와페이’를 지급하고 있다.
이 정책은 단순 현금 지원이 아니라 지역 내 소비를 촉진하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실제 지급 이후 전통시장과 지역 상권을 중심으로 소비가 빠르게 순환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 효과가 크게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다.
농어촌 기본소득을 지난 2월 27일부터 지급하면서 지역 경제 선순환‧주민생활 안정‧인구 증가 등의 변화가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지역경제 활성화다.
대형마트 대신 동네상점 이용이 증가하는 등 지역중심 소비 패턴 변화가 뚜렷하다.
지역화폐인 와와페이와 선불카드로 주민 1인당 월 15만 원씩 2월분(44억 5,155만 원) 지급을 시작한 지 13일 만에 약 71.7%인 31억 8,900만 원이 넘는 돈이 지역에서 사용됐다.
돈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고 순환되면서 생활비 지출은 전달에 비해 22.9%, 지역 매출은 25.9%가 넘게 각각 증가했다. 소상공인·자영업자가 운영하는 업소를 중심으로 한 매출 증가세가 뚜렷하다.
정선군은 지난해 정부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사업 대상지로 선정된 이후 7개월 연속 인구 증가세를 보이고 있으며, 유입 인구도 2,200명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효과가 알려지면서 최근 5곳을 선정하는 정부의 농어촌 기본소득 시범지역 추가 공모에는 전국 44개 군 단위 지자체가 신청해 경쟁률이 8.8대1까지 치솟았다. 강원도에서는 정선군 사례에 자극받아 영월·평창·화천, 철원 등 8개 군이 유치전에 뛰어들었다.
일부 지자체들은 주민 서명운동까지 벌이며 사업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최승준 정선군수 후보는 “정선군은 2021년부터 기본소득 도입을 준비해 왔고, 재난지원금 지급 경험을 통해 정책 실행 기반도 마련했다”며 “농어촌 기본소득이 단순한 복지정책을 넘어 지방소멸 위기를 극복하고 대한민국 기본사회의 성공 모델이자 마중물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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