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지운 이름, 아직 꽃으로 남아 있는가 — 능청다대 도수매와 정선의 잔향

“능청다대 도수매(能靑多帶 倒垂梅). 꺼꾸로 피는 매화를 아시나요? ”
오늘의 정선에도 능수 계열의 나무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능수벚꽃은 일부 지역에서 군락을 이루며 조용히 번지고 있고, 능수도화 또한 마을의 뜰과 언덕, 하천의 가장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문헌 속에서 전해지던 ‘도수매(倒垂梅)’의 뚜렷한 형상은 지금의 풍경 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나지 않는다.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 다른 이름으로 갈아입은 채 이어지고 있는 것인지, 혹은 처음부터 기록과 기억의 경계 위에만 피어 있던 상징이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이 공백을 두고 지역에서는 여러 갈래의 해석이 조용히 흐른다.
하나는 시간과 함께 바뀐 농업의 환경이다. 재배 방식의 변화와 병해충 관리의 강화 속에서 매화류 수목이 점차 다른 작물의 그늘에 밀려났을 가능성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소멸이 아니라 변용이다. 능수형 매화 혹은 그와 유사한 품종이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며, 어느새 지역의 일상 속에 흡수되어 버렸을 수도 있다.
그렇게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이름 붙이기가 겹쳐지는 사이, ‘도수매’라는 이름만이 서서히 희미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도수매가 단순한 식물의 존재 여부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 지역이 자연을 바라보던 방식이며, 세계를 해석하던 언어이고, 무엇보다 사람과 시대를 연결하던 상징 체계였다.


<오늘의 정선지역 산간에도 꺼구로 꽃을 피는 능수 계열의 나무들은 남아 있다.능수벚꽃은 일부 지역에서 군락을 이루며 조용히 번지고 있고, 능수도화 또한 마을의 뜰과 언덕,하천의 가장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꽃 한 그루를 통해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도리를 동시에 읽어내던 사유 방식이 바로 도수매라는 이름 속에 응축되어 있다.
특히 이 ‘도수매’는 조선시대 문헌 속에 기록된 정선의 자연문화 자산으로서, 지역 고유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동시에 지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단순한 전설이나 구전이 아니라,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가 편찬한 『규합총서(閨閤叢書)』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점은 이 자연물이 당대 생활문화와 지식체계 속에서 일정한 위치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과 같은 조선 초기 백과적 기록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자연은 단순한 경관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지식의 단서였던 시대다.
이는 정선이 단순한 산간 지역이 아니라, 자연과 관찰, 기록과 지식이 함께 축적된 문화 공간이었음을 시사한다.
도수매는 말 그대로 ‘거꾸로 매달린 매화’이다. 가지가 아래로 드리운 능수형 매화의 한 변형으로 이해되지만, 문인 문화 속에서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흔히 다음과 같은 의미를 함께 품었다.
세상이 뒤집혀도 꺾이지 않는 절개, 혼란 속에서도 제 계절에 피어나는 질서, 역전된 세계를 비추는 상징.
그래서 도수매는 자연물이면서 동시에 사유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 사유의 중심에, 정선이 있었다.
정선은 단지 산이 깊은 고장이 아니었다. 거칠지만 굴하지 않는 삶의 방식이 축적된 땅이었다.
'정선아리랑'이 한과 삶을 노래로 승화시켰듯, 도수매는 자연을 통해 정신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상징이었다.
선비들은 이 땅의 기운을 두고 말하곤 했다. 쉽게 꺾이지 않는 바위와 바람 속에서도 끝내 피어나는 것들이 있다고. 도수매는 바로 그 감각의 언어였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정선의 도수매는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빙허각 이씨의 『규합총서』에 기록된 문헌 속 정선의 자연문화 자산이라는 점이다.
노래로 남은 아리랑이 정선의 정신이라면, 문헌으로 남은 도수매는 정선의 또 다른 얼굴이다.
거칠현의 산은 여전히 거칠고, 사람의 삶은 여전히 단단하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서, 거꾸로 매달려도 제때 피어나는 꽃 하나가 오래된 기록처럼 조용히 남아 있다.
이제는 기록 속에만 남아 있는 ‘도수매’를 복원하고, 이를 지역의 문화자원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검토해볼 만한 시점이다.
단순한 식물 복원이 아니라, 그 이름이 담고 있던 상징성과 문헌적 의미, 그리고 정선이라는 지역이 지닌 정신성을 함께 복원하는 작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선의 자연과 역사, 그리고 정선아리랑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스토리텔링을 연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유력한 자산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결국 도수매는 사라진 꽃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록을 다시 읽어내는 일은, 정선이라는 공간이 지닌 오래된 기억을 현재로 불러오는 작업이기도 하다.
임학빈 기자 (hakbin5556@gmail.com
BEST 뉴스
-
40년 공직 마치고 양봉인 변신…벌 300군으로 일군 연 매출 1억원 ‘꿀맛 인생 2막’
“벌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정성을 쏟은 만큼 달콤한 꿀로 답하고, 제 인생의 두 번째 봄까지 열어줬으니까요.” 정선군청에서 40년간 공직생활을 하고 기획감사실장을 끝으로 부이사관으로 명예퇴직한 박명섭(70 사진) 아리벌양봉원 대표. 그는 요즘 공직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쁜 ‘꿀맛 인생 2막’을 살... -
북소리 따라 번진 웃음…손풍금에 실어 보낸 스무 해의 축하
북소리가 둥글게 퍼지자 객석에서 박수가 피어났다. 통기타의 맑은 선율 위로 손풍금의 정겨운 가락이 포개지자 굳어 있던 얼굴에도 하나둘 웃음이 번졌다. 주민들이 매주 한자리에 모여 다듬어온 음악은 이날 무대에서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선물이 됐다. 북평면 남평 강변마을 ... -
새만금 카지노 추진·고객 금융정보 규제에 폐광지역 강력 반발
새만금 내국인 카지노 추진과 강원랜드 이용객의 금융·신원정보 기록을 강화하는 특정금융정보법 개정 움직임에 맞서 폐광지역이 공동 대응에 나섰다. 지역살리기공추위(위원장 안승재)는 16일 공추위 사무실에서 집행부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폐광지역 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세운 강원랜드를 지키기 위해 모든 역량을 ... -
광부 떠난 1만4천 평 아파트 터…파크골프로 사북을 깨우자
정선 관내 흩어진 54홀·6천여 객실 연계해 전국대회와 체류형 관광 기반으로 한때 광부와 그 가족들의 삶을 품었던 사북광업소 아파트단지가 철거된 지 10년이 넘었다. 웃음과 발걸음이 오가던 자리는 이제 4만6천㎡의 빈 땅으로 남아 있다. 석탄산... -
국도 59호선 10년째 공사판… 남면 주민 불편 가중
정선군 남면을 관통하는 국도 59호선이 사실상 10년째 공사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면 유평리∼낙동리를 잇는 4.3㎞ 구간의 공사가 시공사 기업회생으로 중단됐다가 최근 재개된 가운데, 같은 노선 유평리 일원에서는 별도의 위험도로 개선공사까지 진행되고 있다. 오는 10월 30일까지 1개 차로가 통... -
“강원랜드 고객 모두를 범죄자로 모나”…폐광지역 ‘생존권 투쟁’ 선언
금융당국이 강원도민의 강력한 반대에도 강원랜드 카지노(사진)고객확인제도(CDD)를 모든 이용객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철회하지 않으면서 폐광지역의 분노가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강원랜드 이용객을 사실상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과도한 규제라는 비판과 함께 매출·폐광기금·배당금 감소가 지역경제 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