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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번호 붙은 돌 ⑫] 사과가 누렇게 변하는 동안

  • 김광희 기자
  • 입력 2026.11.01 1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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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신을 잊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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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수아에서 산티아고까지

 

아르수아에서 하루를 더 머물렀다.

새벽부터 비가 왔다. 창턱에 부딪힌 물이 유리를 타고 내려가다가 아래쪽에서 합쳐졌다. 맞은편 처마 아래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배낭 덮개를 씌운 사람이 먼저 나가면 다른 사람이 문 안에서 지팡이를 펴고 뒤따랐다.

지은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사과 두 개를 샀다. 하나는 먹고 하나는 탁자에 놓았다. 회사에 전화를 해야 한다며 내 방에 앉았다. 딸의 목소리는 일을 설명할 때 조금 낮고 빨라졌다. 나는 창가에서 공책을 넘겼다.

정희의 작은 공책은 어젯밤 지은이 덮은 그대로 창가에 놓여 있었다. 그 뒤쪽 누런 자국에 끼워져 있던 것은 지금 지은의 가방 안에 있었다. 나는 아내의 공책을 옆으로 밀어두고 내 공책을 펼쳤다.

뒤쪽에서 접힌 종이가 떨어졌다.

‘이번에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 아래에 원고를 끝내고 딸들에게 전화한다고 적혀 있었다. 맨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

 

‘땅의 끝. 바다가 보이는 곳. 끝장낼 것.’

 

함께 접힌 장에는 통장과 보험 서류, 원고를 둔 위치가 있었다.

내 글씨였다.

그 곁에 그저께 밤 지은이 끼워 둔 결과지가 접혀 있었다. 두 장은 같은 모양으로 네 번 접혀 있었다.

나는 여행을 연장하려던 것이라고 생각하며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다시 앞을 보았다. 화암 집의 책장과 서랍이 떠올랐다. 출발 전 지수가 약 봉투에 날짜를 쓰는 동안 나는 그 서랍을 닫고 있었다. 닫는 손이 왜 그렇게 조심스러웠는지, 종이에 적힌 말이 먼저 알려주었다.

 

땅의 끝이 어디인지는 알았다. 

정희와 차로 갔던 곶이었다. 아내가 바위에 앉아 여기까지 왔네, 하던 곳이었다. 끝장낸다는 말은 화암 집 부엌에서 지은에게 처음 했던 말이었다. 그때 나는 추억을 끝장내겠다고 했다. 종이에 쓴 것이 같은 말이었는지, 나는 이제 가리지 못했다.

정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때 다 적어두고 싶었다. 이름을 보고도 누군지 모르게 되기 전에 원고를 끝내고 싶었다. 그다음에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잊고 있었다. 병이 먼저 그것을 가져갔다. 가져간 것이 하필 그것이어서, 나는 아직 여기 앉아 있었다.

배낭에서 새 순례자 여권을 꺼냈다. 사리아부터 도장 아래마다 내 글씨가 있었다. 바르바델로, 정희가 탁자 앞에서 도장을 기다림. 포르토마린, 정희가 벽에 손을 댐. 팔라스데레이, 정희 혼자 사진. 리바디소의 칸에는 도장만 찍혀 있었다. 그 아래가 비어 있었다. 무엇을 적으려 했는지, 그 마을 이름을 적을 수 있었는지, 나는 칸을 보고서야 알았다. 빈칸 가장자리에 지은의 글씨로 마을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다. 정희가 한 일을 적을 줄은 끝내 비어 있었다.

지은이 통화를 끝냈다.

 

“뭐 찾아?”

원고에 쓸 것이라고 했다. 종이 끝을 공책 안으로 밀어 넣었다. 딸은 사과를 씻어 와 침대 끝에 앉았다. 한입 베어 무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저께 본 쪽지의 글씨를 생각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을 사람처럼 물어놓고. 그 쪽지를 쓴 사람도 나였고, 방금 딸에게 원고에 쓸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나였다.

지은이 빨래를 가방에 넣으려고 몸을 돌렸다. 나는 종이를 다시 꺼냈다.

“지은아.”

딸이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어.”

사과를 든 손이 멈췄다. 나는 종이를 무릎 위에 놓았다.

“원고 다 쓰면 죽으려고 왔어.”

지은은 내 얼굴을 보다가 종이를 보았다. 입을 열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빗물이 홈통에서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래서 나 오기 전에 먼저 온 거야?”

그렇다고 했다.

딸이 사과를 접시에 놓았다. 베어 문 자리에서 물이 배어 나왔다. 하얀 속살이 공기에 닿아 가장자리부터 누렇게 변해 갔다. 지은은 그것을 보지 않았다. 나도 보지 않으려 했으나 눈이 자꾸 그쪽으로 갔다.

 

나는 그것을 선택이라고 불렀었다. 병이 나를 데려가기 전에 내가 먼저 정하는 일이라고. 그런데 종이에는 딸들의 이름이 맨 끝에 적혀 있었다. 

다 정한 다음에 알리겠다고. 정희를 혼자 두고 나섰던 그 사월 아침에도 나는 혼자 정했고, 약만 받아오면 된다고, 곧 누가 올 것이라고, 하루쯤은 괜찮을 것이라고 차례로 나를 달랬고, 춥다는 아내 앞에서 문을 닫았고, 그 문이 다시 열린 것은 경찰이 아내의 외투를 봉투에 담아 내밀던 저녁이었다. 이번에도 나는 혼자 정하고 문을 닫으려 했다. 문밖에 두 딸을 세워 둔 채. 그것을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나는 이제 모르겠다.

 

아내가 죽은 뒤 나는 그 편지를 유서라고 불렀다. 아내가 나를 기억할 때 떠나려 했다고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그때 나는 아내의 편지에서 내 계획을 읽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내는 같이 걷자고 썼는데.

“그것도 잊고 있었어. 내가 왜 왔는지.”

나는 설명을 더 하려다가 딸의 얼굴을 보았다. 지은은 두 손을 무릎 사이에 넣고 앉아 있었다.

“아빠는 원고 쓰러 왔다고 했잖아.”

“그것도 맞아.”

말하고 나니 어제까지 하던 말과 같았다. 나는 공책을 덮었다.

“다 말하지 않았어.”

지은이 창가로 갔다. 유리에 딸의 얼굴이 비쳤다. 나는 그 등을 보면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 입을 열면 그 말부터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가면 딸이 물을 자리가 없어질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뒤 지은이 돌아섰다.

“지금도 그래?”

나는 탁자와 침대 사이에 놓인 딸의 신발을 보았다. 벗을 때 한쪽이 옆으로 넘어져 있었다. 그 너머에 내 신발이 있었다. 앞코가 문 쪽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은 너하고 돌아가고 싶어.”

지은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어제도 나하고 있었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들었잖아.”

딸이 가까이 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종이를 건넸다. 지은은 끝까지 읽고 접었다. 작게 접으려다가 원래 접힌 자리대로 다시 폈다.

“끝장낸다는 게 이거였어?”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딸은 화암 집 부엌에서 물컵을 든 채 나를 보던 그날처럼 한동안 서 있었다.

딸은 내 공책 사이에서 제 결과지를 꺼내 쪽지 옆에 펴 놓았다. 내 종이에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고, 딸의 종이에는 정밀 검사를 권한다고 적혀 있었다. 하나는 내가 혼자 정한 것이었고, 하나는 딸이 혼자 미뤄 둔 것이었다.

“이건 내가 가지고 있을게.”

그러라고 했다.

지은은 내 옆에서 지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하루 더 쉬기로 했다는 말부터 했다. 그러고는 내 쪽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딸은 내가 한 말을 옮겼다. 중간에 목소리가 끊겨 잠깐 기다렸다가 다시 말했다. 나는 전화기 너머에서 지수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무릎을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지은이 전화기를 건넸다.

“아빠, 언니 옆에 있어?”

“응.”

지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멀리서 문 닫는 소리가 났다.

“왜 우리한테는 안 물어봤어.”

나는 무엇을 물어야 했느냐고 되물을 뻔했다. 전화기를 귀에 더 붙였다.

“너희한테 짐이 될까 봐.”

“그 말 들으면 우리가 덜 무서울 줄 알았어?”

지은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니라고 했다. 늦게 대답했으나 지수는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많이 무서웠겠구나.”

“아직도 무서워.”

“나는 그 병이 너무 미워, 아빠. 엄마한테서 다 가져가고, 이제 아빠한테서도 가져가잖아. 내가 미워할 데가 그 병밖에 없어서 그것만 미워했는데, 아빠가 혼자 끝내려고 했다니까 아빠도 미워.”

나는 알겠다고 했다. 괜찮다고 해주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에서 딸이 숨을 골랐다.

“엄마 그렇게 가고 나서, 나는 전화가 오면 받기 전에 숨부터 참았어.”

나는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

“이번에도 그럴 뻔했잖아.”

“그래.”

“돌아와. 와서 같이 정해.”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이번에는 날짜를 말하지 않았다.

그날은 방을 떠나지 않았다. 지은이 직원에게 부탁해 식사를 올려 받았다. 나는 수프와 빵을 탁자에 놓았다. 지은의 그릇에서 김이 가라앉은 뒤에야 딸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여기 같이 있을 거야. 내일 일정도 다시 정하자. 혼자 먼저 정하지 말고.”

나는 알았다고 했다. 딸은 숟가락을 들었다. 식은 수프를 몇 번 떠먹다가 그릇을 조금 밀었다. 남길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우리는 도움을 구할 곳과 귀국편을 함께 알아보았다. 

지은이 전화를 할 때 나는 옆에 앉았다. 딸은 통화를 끝낼 때마다 들은 것을 적었다. 내가 들었어야 할 말들이 딸의 글씨로 쌓였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하면 되는지 물었다. 지은은 일단 여기서 쉬자고 했다.

직원이 접시를 가져간 뒤에도 탁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나는 탁자 위의 빈 빵 봉지를 접었다. 반으로, 다시 반으로. 더 접을 데가 없어지자 펴서 처음부터 다시 접었다. 지은은 그 손을 보고 있었다. 나는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가진 말이 없었고, 그 말은 아까 꺼내지 않은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딸이 손을 뻗어 내 손에서 봉지를 가져갔다. 접지 않고 펴서 탁자 위에 손바닥으로 눌러 놓았다.

밤이 깊어지자 직원이 가져다준 이불을 딸의 침대에 폈다. 지은은 제 방에서 가져온 세면도구를 욕실 선반에 놓았다. 두 칫솔이 컵에 나란히 꽂혔다. 나는 먼저 누웠다. 딸은 작은 등을 켜놓고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눈을 감고 있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 이불을 걷는 소리에 지은이 고개를 들었다.

 

“어디 가?”

욕실을 가리켰다. 딸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내가 문을 닫을 때까지 보고 있었다. 나는 문을 다 닫지 않고 손가락 하나만큼 열어 두었다. 불을 켜고 세면대 앞에 섰다. 문틈으로 침대가 작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어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은 숙소에 있었다. 밖에 나갈 때는 함께 나갔다. 지은이 씻는 동안에는 식당에서 기다렸다.

나는 딸이 잠든 오후에 원고를 고쳤다. 정희가 나를 기다렸다는 문장과 내가 정희를 기다렸다는 문장을 나란히 두었다. 한쪽을 지우기 전에 날짜를 더 확인해야 했다. 끝내 알 수 없는 곳은 그대로 표시했다.

원고 끝에는 따로 붙여 둔 마지막 장이 있었다. 

다 쓰고 나서 할 일을 적어 둔 장이었다. 나는 그 장을 지웠다. 지운 자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빈 줄 몇 개가 남았다. 언젠가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갈지는 나 혼자 정할 일이 아니었다.

편집자에게는 지금까지 고친 것이라고 적어 보냈다. 답장은 짧았다. 잘 받았으며 돌아와 이야기하자고 했다.

 

돌아와.

 

나는 그 말을 읽고 지은에게 보여주었다. 딸은 답장을 다 읽은 뒤 전화기를 돌려주었다. 사흘 사이에 같은 말을 세 사람에게서 들었다.

그날 오후에 남은 길을 의논했다. 지은이 탁자에 지도를 펼쳤다. 내가 동그라미 쳐둔 숙소들이 산티아고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남은 길은 차로 갔으면 좋겠어.”

딸이 말했다.

“계속 걸으면 내가 아빠 발도 보고, 앞에 있는지도 자꾸 봐야 할 것 같아.”

나는 지도 위의 선을 따라 손가락을 옮겼다. 아살세다와 오페드로우소 사이에서 멈췄다.

“아빠는 어떻게 하고 싶어?”

“조금은 걷고 싶어. 엄마하고 묵었던 데도 지나가 보고.”

“차로 가다가 내려서 볼 수 있어. 오래 걷지는 말고.”

나는 지팡이에 기대 일어서던 아침을 생각했다. 딸이 신발을 신은 채 문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의 일이었는지 그전 날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너는?”

“나도 산티아고는 가고 싶어.”

지은이 지도의 끝을 짚었다.

“여기까지 왔으니까. 아빠하고.”

나는 그 손가락 옆에 손을 놓았다.

“그럼 차로 가자.”

지은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도 옆에 적었다. 산티아고에서는 며칠 쉬었다가 함께 귀국하기로 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화암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지은은 적던 것을 멈췄다.

“바로 혼자 있겠다는 건 아니지?”

나는 딸을 보았다. 지은은 펜을 쥔 채 기다렸다.

“네가 며칠 같이 있으면 좋겠어.”

“나는 출근해야 해. 오래는 못 있어.”

“며칠이면 돼.”

그렇게 말하고 나니 또 내가 날짜를 정하고 있었다.

“얼마나 있을 수 있니?”

지은은 달력을 열었다.

“주말까지. 그다음은 지수하고도 얘기해볼게.”

“너희 둘이 번갈아 내려오기는 힘들잖아.”

“그러니까 돌아가서 같이 정하자. 아빠 생각만 하지 말고, 우리 사정도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이 일정표에 화암을 적었다. 나는 그 글씨 옆에 손을 얹었다.

“집에 가면 창문부터 열어야겠어.”

“가서 같이 하자.”

딸은 펜 뚜껑을 닫았다.

귀국표를 바꾸는 동안 지은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나는 내 카드로 하라고 했다. 딸은 카드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다. 그제야 휴가를 얼마나 썼느냐고 물었다.

“돌아가서 조정해야 해.”

네가 고생이라고 하려다가 말을 바꾸었다.

“고맙다.”

“나 좀 잘게.” 지은이 말했다. 나는 불을 끄고 커튼을 당겼다.

떠나기 전날 공책 첫 장에 돌아가 머물 집의 주소를 적었다. 지은이 보낸 도로명과 건물 번호를 옮기고 동과 호수를 썼다. 두 딸의 전화번호도 적었다. 다음 장에는 화암 집 주소가 있었다. 찬장과 서랍마다 이름을 써 붙이던 정희의 손이 떠올랐다. 아내가 그렇게 제 집을 붙들고 있을 때 나는 그것을 병이라고만 적었다. 이제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장을 한 번 더 읽고 볼펜 뚜껑을 닫았다.

지수는 언니 집에 국을 사다 놓겠다고 했다.

“직접 안 해도 돼.”

“나 그날 늦어서 못 해.”

나는 알겠다고 했다. 딸은 공항에서 만나자고 했다.

아르수아를 떠나는 날 비는 그쳐 있었다.

낮은 구름 밑에 숲이 잠겨 있었다. 참나무의 검은 가지 사이로 물안개가 흩어졌다. 유칼립투스의 잎들이 차창 가까이 스쳤다. 줄기에는 벗겨진 껍질이 긴 띠처럼 매달려 있었다. 껍질이 떨어진 자리는 비에 젖어 희고 매끈했다.

지은이 전화기에서 나무 이름을 찾았다. 호주에 살던 갈리시아의 수도사가 고향으로 씨앗을 보내왔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 뒤로 많이 심었다고 했다.

“원래 여기 나무는 아니네.”

“응.”

딸은 화면을 조금 더 내렸다.

“불이 지나가도 다시 싹이 나는 종류가 있대. 껍질 안이나 밑동에 살아남은 눈에서.”

나는 창밖의 줄기들을 보았다. 벗겨진 껍질 아래로 잿빛과 흰빛이 번갈아 지나갔다.

“다 살아나는 건 아니고?”

“응. 눈까지 죽으면 못 나오는 거지.”

숲이 끊기자 목초지가 드러났다. 집 곁에는 돌기둥으로 받친 곡물창고가 서 있었고, 지붕 끝의 십자가 아래로 새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죽은 나무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불이 미처 죽이지 못한 곳에서 새 가지가 자라는 것이었다. 불은 나무를 고르지 않는다. 남은 눈도 나무가 고르지 않는다. 나는 무엇이 남을지 고를 수 없었다. 다만 남은 것에서 무엇이 돋는지는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은은 읽던 화면을 닫고 지수에게 온 메시지를 열었다. 공항에 몇 시까지 가면 되느냐는 말이었다. 딸이 도착 시간을 적어 보내는 동안 나는 그 옆얼굴을 보았다. 정희를 닮은 입술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어려서부터 무언가에 골몰하면 저렇게 입을 벌렸다.

지은이 있었고 지수가 있었다. 둘에게는 내가 모르는 날들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지수가 새로 맡은 일이 무엇인지 아직 제대로 묻지 못했다.

“지수는 그날 회사에서 바로 오니?”

지은이 전화기를 보았다.

“물어볼게.”

걸을 때는 오래 보이던 나무가 차에서는 금세 사라졌다. 지은이 창문을 조금 열었다. 젖은 풀 냄새 사이로 서늘하고 알싸한 냄새가 들어왔다.

아살세다에서 차를 마셨다. 길과 도로가 가까워지는 마을이었다. 배낭을 멘 사람들이 길 건너편에서 차가 끊기기를 기다렸다. 한 사람이 먼저 나서자 나머지도 따라갔다. 카페 앞에는 접은 파라솔들이 벽에 기대 있었다. 천 끝에서 떨어지는 물이 받침 아래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지은은 커피를 저으며 회사에서 온 메시지를 읽었다. 답을 보낸 뒤 전화기를 가방에 넣고 과자 봉지를 가운데 놓았다.

“이것도 먹어봐.”

한 개를 집었다. 씹자 마른 부스러기가 혀에 붙었다. 지은이 냅킨을 내 쪽으로 밀었다. 길 건너에서 배낭을 멘 사람들이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산타이레네에서는 참나무 아래로 잠깐 걸었다. 작은 돌 경당과 샘이 길손들이 쉬는 숲에 남아 있었다. 정희와 지날 때 나는 차창 너머로 이 샘을 보고도 차를 세워 달라고 하지 않았다. 지은이 안내를 읽었다. 샘물로 피부의 병을 고치고 상처 난 발을 낫게 했다는 전승이었다. 샘 위의 돌 틈에서 풀이 자랐고, 떨어진 잎들이 물길을 따라 한쪽에 모였다.

지은은 벤치의 물기를 손으로 쓸어보고 마른 끝에 앉았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샘물에 손을 넣어 보지는 않았다. 낫게 해달라고 빌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한 번은 차에서 내려 이 앞에 앉아 보고 싶었다. 참나무 가지가 경당 지붕 위로 드리워져 있었다. 잎 사이에서 떨어진 물이 돌계단을 검게 적셨다.

오페드로우소에서는 점심을 먹었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이 마지막 밤을 보내는 마을이었다. 정희와 내가 마지막 밤을 묵은 곳도 여기였다. 식당 벽에 다음 구간의 지도가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한 손으로 수프를 먹고 다른 손으로 길을 짚었다.

정희가 여기서 지은에게 전화했다고 말하자 딸은 기억난다고 했다.

“빵 맛있다고 했어. 아빠가 자꾸 절고 있다고도 했고.”

“공책에 있었어.”

“나는 엄마한테 들었어.”

나는 물잔을 내려놓았다. 지은은 엄마가 더 걷고 싶다고도 했고, 빨래집게를 자꾸 남한테 준다고 아빠가 투덜거렸다며 웃었다고 했다. 나는 웃었다.

“그날 밤 엄마가 하루 더 걷자고 했어.”

지은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비행기 날짜가 있었어. 엄마도 피곤해 보였고.”

딸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어.”

지은이 나를 돌아보았다. 묻지 않은 말에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접시 가장자리의 소금을 손가락으로 모았다.

“그 말 듣고도 내가 표부터 봤어. 나으면 다시 오자고 했어.”

“엄마는 뭐라고 했는데?”

“알겠다고 했어. 그리고 가방 손잡이를 벽 쪽으로 돌려놨어.”

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알겠다고 한 아내의 목소리를 떠올리려 했다. 손잡이가 벽에 닿던 소리만 남아 있었다.

 

다시 차에 오른 뒤 기사가 무슨 말을 했고 지은이 웃었다. 나도 뜻을 물어 웃었다. 그러고 나서야 한동안 정희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가방 위에 손을 얹었다. 아내의 공책이 들어 있는 곳이었다. 지은은 아직 웃음이 남은 얼굴로 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거두어 무릎에 놓았다. 잊는 것이 늘 잃는 것은 아닐지도 몰랐다.

라바코야에서는 비행기 소리가 먼저 들렸다. 낮은 구름 아래로 기체가 나타나 숲 너머로 내려갔다. 공항 가까이에서 길은 개울을 지났다. 『칼릭스티누스 사본』에는 옛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 들어가기 전 이곳에서 몸을 씻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옷을 벗고 길의 먼지를 씻은 뒤 사도의 무덤으로 갔다고 했다.

풀에 가려 물은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가자 작은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물살 아래에서 모래가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정희와도 여기서 씻었다. 아내는 배낭을 내려놓고 쪼그려 앉았다. 소매를 걷어 올렸으나 손을 담그자마자 끝이 흘러내렸다. 내가 다시 접어주었다. 정희는 두 손에 받은 물을 얼굴에 가져갔다.

“차가워.”

그 말을 하면서 한 번 더 물을 떴다. 아내가 옆으로 비켜주어 나도 앉았다. 정희는 젖은 손수건으로 내 목덜미를 닦아주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내가 다 됐다고 할 때까지.

지금은 물가에 서서 손을 담갔다. 손끝이 금세 시렸다. 지은이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닦아.”

나는 받아 손가락 사이를 닦았다. 그날도 손수건이었다. 아내가 닦아준 것이 내 목덜미였는지 내 손가락 사이였는지는 가려지지 않았다. 원고에는 손을 씻었다고 적혀 있었다. 몸은 목덜미를 기억했다. 딸이 손수건을 도로 받으려 하자 내가 말려서 주겠다고 했다. 젖은 자리가 손바닥만 했다.

몬테도고소에서는 구름이 빨리 흘렀다. 도시의 지붕들이 언덕 아래 펼쳐져 있었다. 볕이 구름 사이로 나와 한쪽 지붕을 비추다가 곧 거두어졌다. 대성당을 처음 본 순례자들이 기뻐했다는 언덕이었다. 일행 가운데 먼저 탑을 본 사람을 순례의 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했다.

나는 멀리 탑을 찾았다. 지은이 방향을 짚어주었다. 눈을 좁히자 건물들 너머로 가느다란 윤곽이 보였다.

예전 사진을 열었다. 정희가 모자를 들고 서 있었다. 지은이 자기 전화기에서 잘리지 않은 사진을 찾아 보냈다. 오른쪽에 내 손이 있었다. 아내의 다른 손을 잡고 있었다. 내 얼굴은 배경을 보느라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왜 잘랐지.”

“엄마 얼굴 크게 보려고 그랬을 수도 있지.”

사진을 받아 저장했다. 내가 잘라낸 것은 내 손이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이었다.

처음 이 길을 걸을 때 나는 이 길이 바벨탑 같다고 생각했다. 하늘에 닿으려고 돌을 쌓듯 사람들이 걸음을 쌓는다고. 그 생각을 정희에게 입 밖에 냈는지는 모르겠다. 많이 걸으면 하느님한테 더 가까워지느냐고 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아내는 신발에 깔창을 넣다가 나를 보았을 것이다.

“나는 당신하고 걷고 싶은 건데.”

그 대답만은 아내의 목소리로 남아 있었다.

 

아내는 이 길에서 하느님을 찾았고, 나는 이 길에서 아내를 찾았다. 둘 다 끝에 닿지 못했다. 아내는 낫지 않았고, 나는 아내를 되찾지 못했다. 그래도 아내는 끝까지 걸었다. 구원이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어디에 있었을까. 신발 끈을 매고 일어서면 조금 앞에서 기다리던 그 자리였을까.

지은이 춥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조금 그렇다고 했다. 딸은 차 쪽으로 먼저 걸었다. 나는 사진을 닫고 따라갔다.

산티아고에서는 구시가지 바깥에 내려 걸었다.

 

콘체이로스는 가리비 껍데기를 팔던 장인들의 이름이 남은 거리라고 했다. 산페드로 거리를 내려가자 옛 성벽의 문이 있던 포르타도카미뇨에 닿았다.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이곳으로 도시 안에 들어왔다. 지금도 가게 처마에는 가리비 껍데기와 작은 지팡이가 매달려 있었다.

배낭은 내가 멨다. 지은이 무겁지 않느냐고 물었다. 괜찮다고 대답한 뒤 조금 무겁다고 고쳤다. 딸은 천천히 가자고 했다.

골목 안에서는 사람들의 말이 돌벽에 부딪쳐 가까워졌다. 물이 덜 마른 돌 틈에 하늘이 가늘게 비쳤다. 배낭의 가리비 껍데기가 걸을 때마다 허리를 쳤다.

나는 지은의 소매를 잡았다.

“옆에 가자.”

딸이 걸음을 늦췄다.

오브라도이로 광장으로 나가기 전 처마 아래에 잠깐 섰다. 지은이 전화기로 대성당 안내를 읽었다. 9세기 무렵 사도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믿음에서 순례가 시작되었다. 작은 성당이 커지고 사람들이 모여 도시가 되었다. 지금의 로마네스크 대성당은 1075년 무렵 짓기 시작해 1211년에 봉헌되었다. 앞은 나중에 지은 것이라며 지은이 18세기에 세운 바로크 정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정희도 이 앞에서 안내문을 읽었다. 나는 사진을 찍을 자리를 찾느라 먼저 나갔다. 아내가 뒤따라왔을 때 무엇을 읽었느냐고 묻지 않았다.

지은이 화면을 끄려 했다.

“더 있어?”

내가 물었다. 딸이 나를 보았다.

“읽던 거.”

지은이 남은 문장을 읽었다. 나는 지팡이에 체중을 옮기고 끝까지 들었다.

골목이 끝나자 광장이 열렸다.

두 탑 위로 회색 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돌로 새긴 얼굴과 옷주름의 그늘이 깊어졌다가 옅어졌다. 지붕 끝의 물방울이 볕을 받아 잠깐 빛났다.

 

우리 앞에서 걷던 여자가 멈춰 섰다. 뒤따르던 남자가 배낭을 내려놓자 여자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남자는 웃다가 고개를 숙였다. 여자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사람들이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자 주위에서 박수가 났다. 신발을 벗어놓고 탑을 올려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가 비둘기를 쫓아 달리자 새들이 앉아 있는 사람들 머리 위로 낮게 날았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정희도 광장에 들어서자 내 팔을 잡았다. 나는 대성당을 보느라 몇 걸음 더 가려 했다. 아내가 잡아당겨 돌아보니 웃고 있었다. 입술은 웃는데 눈에는 물기가 고여 있었다.

“우리 왔네.”

나는 왔다고 했다. 정희는 내 팔을 놓지 않았다. 나는 아내를 안았다. 배낭 때문에 두 사람의 몸이 비스듬히 닿았다. 어깨 너머로 아내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발 아프지?”

내가 묻자 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앉자.”

우리는 웃었다. 나는 아내의 배낭을 받아 바닥에 놓았다. 정희는 주저앉듯 앉아 두 다리를 뻗었다.

지은이 내 옆에 서 있었다.

“조금 앉을까?”

딸이 마른 돌바닥을 가리켰다. 우리는 거기에 앉았다.

빵을 꺼냈다. 이미 둘로 잘라져 있었다. 한쪽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 광장 한편에서는 증서를 펴고 사진을 찍었다. 내 순례자 여권의 도장은 중간에서 멈춰 있었다.

“다 걷지는 못했네.”

“응.”

지은은 빵을 먹었다. 나도 한입 먹었다. 껍질이 부서져 바지 위로 떨어졌다. 열다섯 해 전 순례자 사무실의 직원이 내 여권의 빈칸을 짚었다. 이번에는 빈칸을 짚을 사람이 없었다. 내가 먼저 보았고, 그대로 두었다.

“엄마하고 여기 앉았어.”

딸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디쯤?”

나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계단 곁이었던 것 같다가 더 가운데였던 것 같았다.

“정확히는 모르겠어.”

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옮기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돌아갈 집의 주소가 적힌 첫 장을 넘겼다. 빈 곳에 오늘 날짜와 산티아고를 썼다. 그 아래 정희의 이름을 적었다. 지은은 무릎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봉지에 털고 있었다. 나는 한 줄 아래에 딸의 이름을 썼다. 그 아래에 지수의 이름도 썼다.

전화기에서 정희의 사진을 다시 열었다. 모자를 든 손과 조금 벌어진 입술이 보였다. 화면을 늘렸다가 줄이고, 공책의 빈 곳에 몇 줄을 적었다.

 

당신을 보다가

 

사진을 늘렸다.

당신의 입술이 커졌다.

 

무슨 말을 하던 중이었을까.

나는 또 얼굴만 찍어두었다.

 

그날 당신이 했을 말들을

혼자 대답하다가

 

곁에서 딸이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지은이 다 먹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남은 빵을 입에 넣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무거운 것을 지고 이 문 앞까지 왔다. 죄를 씻으러, 병을 고치러, 누군가를 잃고. 다 나아서 돌아간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갔다. 집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혼자 끝내려던 나는 이 문 앞에서 처음으로 돌아갈 길을 셈하고 있었다.

나는 고해소 앞에 서본 적이 없었다. 아르수아의 방에서 딸에게 말한 것이 내 첫 고해였다. 딸은 나를 용서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늘 들었다고만 했다. 용서를 구할 아내는 이제 없고, 나는 언젠가 그 아침 닫은 문도 잊을 것이고, 문을 닫았다는 것도, 닫힌 문 너머에서 아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을지 밤마다 생각하던 일도 잊을 것이고, 그렇게 다 잊는다고 해서 용서받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잊은 뒤에도 그것을 기억해 줄 사람들에게, 나는 그 문을 열어 보였다.

지은이 가방을 무릎 위로 끌어왔다. 옆주머니의 지퍼를 열고 한동안 손을 넣은 채 있었다. 손을 꺼냈을 때 엽서가 들려 있었다.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 있었다.

“엄마가 아빠한테는 아직이라고 했어.”

딸은 엽서를 바로 건네지 않고 무릎 위에 놓았다.

“그 아직이 언제인지는 말 안 했어. 아빠가 나를 모르게 될 때인지, 아빠가 엄마를 모르게 될 때인지. 몰라서 계속 가지고 있었어.”

“언제인지 알았니?”

“아르수아에서.”

지은이 엽서를 내밀었다. 앞면에는 푸른 언덕 사진이 있었다. 아르수아의 가게에서 정희가 성당 사진과 오래 번갈아 보다 고른 쪽이었다. 뒤집자 받는 사람 칸이 비어 있었다.

첫 줄은 깊이 눌러 쓴 ‘여보’였다. 그 아래 몇 줄은 젖었다 마른 자국 속에서 번져 있었다. 글자의 모양은 남았으나 읽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아내가 창가에서 손바닥으로 덮던 자리였다. 끝의 두 줄만 또렷했다.

‘먼저 가지 마. 나도 말없이 가지는 않을게.

갈 때 전화할게.’

나는 그 두 줄을 오래 보았다.

아내는 늘 내 뒤에서 걸었다. 나는 늘 먼저 갔다. 다리를 건널 때도, 광장에 들어설 때도, 성당 문 앞에서도.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먼저 가려고 했다. 내 종이에도 마지막에 딸들에게 전화한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떠날 때 전화하겠다고 적어 두었다.

 

아내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날 아침 전화를 건 것은 나였고, 받지 않은 것은 아내였다. 신호가 끝날 때까지 정희는 받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아내가 말없이 떠난 것이라고 여겼다. 유서라는 말도 거기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는 말없이 가지 않겠다고 적어 두었다. 전화를 걸 수 없는 병이 그 약속 앞을 먼저 지나갔을 뿐이었다.

번진 줄들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종이가 조금 우툴두툴했다. 무엇을 썼는지는 끝내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들리지 않았던 그날의 대답처럼. 나는 이번에는 그 자리를 내 말로 채우지 않기로 했다.

엽서를 공책 첫 장, 돌아갈 집의 주소 곁에 끼웠다.

그러고는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에 싼 것을 꺼냈다. 매듭을 풀자 정희의 묵주가 나왔다. 알 사이의 줄이 한 군데 닳아 있었다.

“엄마 거야.”

지은이 그것을 보았다.

“아빠가 가지고 있었어?”

“경찰이 돌려준 외투 주머니에 있었어. 이번에 가지고 왔어.”

나는 묵주를 딸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네가 가지고 있어. 나는 첫 구절도 끝까지 못 외워.”

지은은 손을 오므리지 않고 한동안 펴 든 채 있었다. 십자가가 손금 위에서 조금 기울었다.

“아빠는?”

나는 공책을 들어 보였다. 엽서의 모서리가 첫 장 사이로 조금 나와 있었다.

“나는 이거면 돼.”

딸이 손을 오므렸다. 그러고는 묵주를 제 외투 안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잠갔다.

나는 전화기를 꺼냈다. 지수의 이름을 찾는 데 시간이 걸렸다. 화면을 몇 번 내렸다가 올렸다. 지은이 옆에서 보고 있었으나 대신 찾아주지 않았다.

신호가 두 번 갔다.

“아빠?”

지수의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왔다. 숨을 참았다가 내쉬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빠다.”

그 말이 우스웠던지 옆에서 지은이 고개를 돌렸다.

“산티아고야. 언니하고 같이 있어. 돌아간다고 전화했어.”

지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딸이 어딘가에 앉는 소리였다.

“아빠가 먼저 전화한 거야?”

“응.”

“처음이네.”

나는 그런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 것 같았다.

“그리고 너 새로 맡은 일 말이야. 돌아가면 처음부터 얘기해줘. 내가 적을게.”

“적지 말고 그냥 들어, 아빠.”

나는 웃었다. 지수도 웃었다. 웃음 끝에 딸의 목소리가 조금 젖었다.

“잊어버리면?”

“그럼 또 얘기해줄게.”

전화를 끊은 뒤에도 나는 한동안 화면을 보고 있었다. 통화 시간이 떠 있다가 사라졌다.

멀리서 종이 울렸다. 두 탑 사이로 구름이 흘렀다. 구름 가장자리에서 나온 볕이 젖은 광장에 닿았다.

“우리도 한 장 찍자.”

지은이 말했다. 나는 공책을 넣고 배낭을 멨다. 딸은 지나가던 사람에게 전화기를 건넨 뒤 내 옆에 섰다. 나는 딸 쪽으로 조금 가까이 갔다. 이번에는 배경을 보지 않고 카메라를 보았다.

사진을 받아 보았다. 두 탑 아래 우리가 서 있었다. 지은은 눈을 조금 찡그리고 있었고 내 배낭 끈 끝이 두 사람 사이로 늘어져 있었다. 내 손은 딸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

 

화암 집 거실을 생각했다. 정희와 걸었던 길의 사진들이 책장과 창가에 놓여 있었다. 빛에 바랜 사진 옆으로 오늘 찍은 것을 놓아 보았다. 리바디소 강가에서 딸이 웃던 사진은 소파 곁에 두면 앉아서도 볼 수 있겠다. 언젠가 이 사진들 속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딸들이 사진 뒤에 적힌 이름을 읽어줄 것이다. 나는 그 일을 혼자 막아서지 않기로 했다.

“돌아가면 이것도 뽑아야겠어.”

지은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나도 한 장 줘.”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딸이 대성당 쪽을 보았다.

“들어갈래?”

정희가 성당에 들어가면 나는 늘 문밖에서 기다렸다. 아내가 무엇을 비는지 묻지 않았고, 아내가 나오면 날씨부터 말했다. 지은이 고해소에 들어갈 때도 나는 방에서 기다렸다.

“같이 가자.”

지은이 먼저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무릎이 조금 당겼다. 딸은 손을 놓지 않고 내가 지팡이를 고쳐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문 앞의 계단은 생각보다 높았고,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서로 길을 비켜 주었고, 나는 앞서 가지도 뒤에 처지지도 않고 한 칸씩, 열린 문 안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돌 냄새 쪽으로 올라갔다.

딸이 옆에서 걷고 있었다.

[연재소설|번호 붙은 돌 에필로그] 열린 따옴표 ― 인천, 그리고 화암 집

인천에 내린 것은 저녁이었다. 입국장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 지수는 기둥 옆에 서 있었다. 회사에서 바로 왔는지 목에 출입증 줄이 걸려 있었다.

딸은 손을 들지 않았다. 내가 가까이 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한 걸음 앞에서 내 배낭 끈을 잡았다.

“아빠 왔네.”

나는 왔다고 했다. 지수는 끈을 놓지 않고 내 얼굴을 오래 보았다. 무엇을 확인하는지 알 것 같아 나는 딸의 이름을 불렀다. 지수야. 딸은 그제야 끈을 놓고 언니를 안았다. 언니의 어깨 너머로 나를 한 번 더 보았다.

주차장에서 지수가 보온 가방을 열었다. 언니 집에 두고 오려던 국을 그냥 들고 왔다고 했다. 뚜껑을 열자 김이 차 안에 퍼졌다. 지은이 숟가락을 꺼내 내게 먼저 건넸다.

“집에 가서 먹어도 되는데.”

“식잖아.”

지수가 말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국을 떠먹었다. 조금 짰다. 맛있다고 했다. 운전석의 지수가 백미러로 나를 보다가 차를 움직였다.

 

화암 집에는 이틀 뒤에 내려갔다. 셋이 함께였다. 굽이를 돌자 낮은 지붕이 보였다. 마당 가장자리의 고무대야는 엎어져 있었다. 지수가 떠나기 전에 뒤집어 둔 것이라고 했다.

현관문을 열자 오래 닫혀 있던 집의 냄새가 났다. ‘화암 집’ 종이는 귀퉁이가 들뜬 채 그대로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고 창문부터 열었다. 개울 소리가 들어왔다. 지은이 부엌 창을 열었고, 지수가 정희의 방 창을 열었다. 세 군데에서 들어온 바람이 거실에서 만났다.

저녁에는 사진을 뽑았다. 지수가 가져온 작은 인화기에서 사진이 한 장씩 밀려 나왔다. 두 탑 아래 지은과 내가 서 있었다. 푸렐로스 다리의 난간 앞에 우리가 있었다. 리바디소 강가에서 지은이 웃고 있었다. 정희의 산티르소 사진은 두 장 다 뽑았다. 내가 찍은 것과 남이 찍어 준 것이었다.

나는 사진마다 뒤에 이름과 마을과 날짜를 적었다. 지은, 아빠, 리바디소. 정희 혼자, 팔라스데레이, 바람. 글씨가 앞으로 비치지 않게 볼펜을 눕혀 썼다.

“그걸 다 적어?”

지수가 물었다.

“포르토마린 성당 돌에는 번호가 있었어. 옮겨도 제자리를 찾으라고.”

나는 다음 사진을 뒤집었다.

“내가 제자리를 잊어도 너희가 맞춰 줄 수 있게.”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적은 사진들을 받아 책장과 창가에 세웠다. 빛에 바랜 예전 사진들 옆이었다. 리바디소 사진은 소파 곁 탁자에 놓았다. 앉아서도 보이는 자리였다.

지은은 주말까지 있었고, 그다음 주에는 지수가 내려왔다. 셋이 식탁에 앉아 달력에 이름을 적었다. 도움을 주러 올 사람의 이름도 그 사이에 적었다. 내가 혼자 정한 날짜는 없었다. 지수가 새로 맡은 일을 이야기하는 동안 나는 적지 않고 들었다. 모르는 말이 나오면 다시 물었다. 딸은 처음처럼 대답했다.

지은이 서울로 올라가기 전날 밤, 나는 원고를 인쇄했다. 처음부터 끝까지는 아니었다. 순례길을 쓴 장들만 골랐다. 종이가 손바닥 두께만큼 쌓였다. 지수가 서랍에서 노란 형광펜을 찾아 주었다.

 

나는 원고를 넘기며 줄을 칠했다. 정희가 한 말에, 정희가 본 것에. 사리아의 돌계단, 빨랫줄 아래로 떨어지던 물, 다리 위의 바람, 묵시아의 바위틈에서 솟던 거품. 저기까지만 가서 쉬자. 따뜻한 데 좀 들어가자. 집에 가면 된장찌개부터 먹고 싶어. 내가 한 말에는 칠하지 않았다.

“왜 거기만 칠해?”

지수가 물었다.

“나중에 내가 못 읽게 되면, 칠한 데만 읽어 줘. 길게 안 읽어도 돼.”

지수는 펜 뚜껑을 손가락으로 돌렸다. 지은이 원고를 제 쪽으로 당겼다가 내 앞으로 밀어 놓았다.

“지금 읽어 줘. 아빠가.”

나는 안경을 고쳐 쓰고 첫 장을 읽었다. 칠한 줄에서는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아내가 말하던 높이를 나는 끝내 찾지 못했으므로, 그 자리에서는 내 목소리를 조금 낮추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포르토마린의 다리에 이르렀을 때 지은이 휴지를 찾았다. 지수는 식탁에 팔을 괴고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나는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다시 시작할 자리를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바닷가의 장까지 읽었을 때는 자정이 넘어 있었다. 지수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다.

“엄마 목소리 같았어.”

그럴 리 없었다. 나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고 원고를 가지런히 모았다. 노란 줄들이 종이 가장자리 밖으로 조금씩 비어져 나와 있었다. 종이를 모아 세우자 그 줄들이 한쪽으로 몰려 띠처럼 보였다.

엽서는 공책 첫 장에 끼워 두었다. 정희의 묵주는 지은의 외투 주머니에 들어 서울로 갔다.

어느 아침 나는 원고를 열었다. 첫 장이었다. 정희가 길가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나는 발목 아래 손을 받치고 물을 부었다. 저기까지만 가서 쉬자, 하고 내가 말했다.

그 아래 열린 따옴표가 있었다. 떠나기 전에 ‘당신하고 걸으니까 좋네’를 넣었다가 물음표를 쳐 두었던 자리였다. 나는 그 문장을 지웠다.

따옴표는 지우지 않았다. 열린 채로 두었다. 아내는 그날 무슨 말을 했고, 밤나무 숲에서 잎들이 한꺼번에 뒤집혔고, 나는 가방을 여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내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엽서의 번진 줄처럼, 그 자리는 아내의 것이었다.

커서가 따옴표 안에서 깜박였다. 나는 그 깜박임을 한동안 보았다. 그리고 다음 줄로 내려가 썼다.

‘정희가 일어섰다. 나는 등 뒤로 배낭을 받쳐 주었다.’

저장을 누르고 창밖을 보았다. 산등성이에서부터 볕이 내려와 마당에 닿아 있었다. 개울은 굽이의 바위에서만 희게 드러났다. 마당의 대야는 엎어진 채였다. 비가 오기 전에 바로 놓아 두어야 했다. 정희가 그러라고 했었다.

 

마지막 장 ― 지은이 적다

 

아빠의 원고 끝에는 빈 장이 하나 있었다. 아빠가 아르수아에서 무언가를 지우고 비워 둔 자리라는 것을, 나는 화암 집 서랍에서 원고를 꺼내 처음부터 읽고서야 알았다. 지수와 의논해 그 자리에 몇 줄을 적는다.

아빠는 원고를 끝까지 고치지 못했다. 앞의 몇 장은 몇 번이고 고쳤고, 뒤로 갈수록 같은 장면이 두 번씩 나왔다. 어느 쪽을 나중에 쓴 것인지 알 수 없는 곳도 있었다. 우리는 고치지 않았다.

편집자는 두 해를 기다려 주었다. 원고를 보낼 때가 되면 아빠는 아직이라고 했다. 엄마가 엽서를 나에게 맡기며 한 말과 같은 말이었다. 그 아직이 언제인지 몰라서, 우리는 원고를 보내지 않았다.

원고는 엄마의 작은 공책과 엽서, 뒷면에 이름을 적은 사진들과 함께 화암 집 서랍에 있다. 서랍 앞에는 아빠 글씨로 ‘원고’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그 아래에 지수가 ‘열어도 됨’이라고 적었다.

아빠는 요즘 원고의 첫 장을 자주 꺼내 읽는다. 열린 따옴표가 있는 장이다. 어떤 날은 거기서 오래 멈춰 있고, 어떤 날은 나를 보며 엄마가 그때 뭐라고 했는지 아느냐고 묻는다. 모른다고 하면 아빠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이상하게 좋다.

어제는 아빠가 내 이름을 두 번 불렀다. 한 번은 나를 보고, 한 번은 사진 뒤의 글씨를 보고. 나는 두 번 다 대답했다.

이 원고가 책이 될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그것을 정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가 묻는 것에 처음처럼 대답하는 일만 정했다.

 

* * *

 

세 해 뒤, 사월. 이 장에 몇 줄을 더 보탠다.

아빠는 이제 우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지수를 보면 정희 씨는 언제 오느냐고 묻고, 지수는 곧 온다고 대답한다. 엄마가 하던 물음을 아빠가 하고, 그때 아빠가 하던 대답을 이제 지수가 한다. 지수가 결혼하던 날 아빠는 누구의 팔인지 모르는 팔에 제 팔을 내주고 통로 끝까지 같이 걸었다. 놓아야 할 때는 놓았다.

돌아온 해 유월, 나는 정밀 검사를 받았다. 아빠 여권의 아르수아 칸에 적힌 대로 아빠와 지수가 같이 들었다. 의사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일 년 뒤에 다시 보자고 했다. 일 년 뒤에도 같은 말을 했다. 유전자 검사는 상담만 두 번 받고 하지 않았다. 알면 그날부터 매일 그 생각만 할 거라던 지수의 말을, 이번에는 내가 상담실에서 했다.

그 뒤로 나는 회의 중에 거래처 이름이 막히면 숨을 참는다. 이름이 오면 숨을 쉰다. 오지 않으면 수첩에 적어 둔다. 몇 번 적었는지는 세지 않는다.

 

아빠는 원고에서 몇 군데 틀렸다. 엄마가 냉장고에 숨겨 두고 먹던 치즈는 싼 네모 치즈였는데, 아빠는 끝까지 다른 치즈라고 썼다. 엄마가 늘 큰 빵을 자기에게 줬다고도 썼는데, 엄마 공책에는 큰 걸 엄마가 감췄다고 적혀 있다. 우리는 그것도 고치지 않았다. 틀린 데까지가 아빠의 원고다.

우리는 저녁마다 그 원고를 읽어 드린다. 형광펜으로 칠한 줄들이다. 지수가 읍내 인쇄소에서 한 권만 묶어 왔다. 표지에는 제목만 있다. 번호 붙은 돌.

읽는 사람은 번갈아 한다. 나는 사리아의 돌계단과 빨랫줄 아래로 떨어지던 물을 읽고, 지수는 다리 위의 바람과 묵시아의 거품을 읽는다. 노란 줄이 끝나면 다음 노란 줄까지 건너뛴다. 아빠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아빠는 대개 창밖을 본다. 

그런데 집에 가면 된장찌개부터 먹고 싶다는 줄을 읽으면 웃는다. 사흘에 한 번쯤. 무엇이 우스우냐고 물으면 모르겠다고 하고, 한 번 더 웃는다.

어젯밤에는 읽기를 마치고 책을 덮는데 아빠가 표지에 손을 얹었다.

“이 남자는 아내를 좋아했나 보네요.”

엄마가 아빠의 원고를 듣고 거의 같은 말을 했다. 7장에 있다. 지수가 책을 아빠 무릎에 놓아 드렸다. 아빠는 표지를 손바닥으로 몇 번 쓸었다.

오늘 저녁에도 읽는다. 노란 줄이 끝나면 다음 노란 줄까지.

지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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