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입력해주세요.

로그인을 하시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받으실 수 있습니다.

[연재소설|녹도아리랑 ㉙] 나무는 한양으로, 굶주림은 집으로

  • 김광희 기자
  • 입력 2026.10.05 19:52
  • 댓글 0
  • 글자크기설정

  • 이름을 빼앗긴 사람들, 끝내 이어진 노래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는 사람들

 

30.3.65.png

 

보리 대신 재를 받은 사람들

 

박성돌이 첫 품삯을 받으러 내려온 날, 산판 대리인은 그가 내민 됫박을 밀어놓았다.

“한양에서 나무값이 아직 안 왔소.”

성돌은 됫박을 거두지 않았다. 산에 들어올 때 대리인은 먹을 것을 따로 주고, 하루 품삯은 보리 한 됫박이며 열흘마다 치르겠다고 했다. 곁의 일꾼들도 들은 약속이었다.

“집에 두고 온 아이가 있소.”

“다음 셈에 함께 쳐주겠소.”

 

성돌은 빈손으로 산길을 되올라갔다.

됫박이 지게 옆에서 흔들릴 때마다 나무에 부딪쳤다. 뒤따르던 길상이 그것을 벗겨 제 짐 속에 넣었다.

“다음에는 자루를 가져오십시오. 두 번 치르면 됫박으로 못 담을 테니.”

성돌은 대꾸하지 않았으나 길상이 앞서가자 걸음을 조금 재촉했다.

 

그해 겨울, 임계에서 골지천을 따라 여량으로 내려오는 산비탈마다 도끼 소리가 났다.

벌작군은 나무를 찍어 넘겼고, 부출군은 재목에 줄을 걸거나 지게에 져 강가로 날랐다.

베어놓기만 해서는 셈에 들지 않았다. 눈길을 끌고 내려가 물가에 쌓아야 하루 일이 끝났다.

성돌은 벌작군으로 들어왔지만 나무를 넘긴 뒤에도 줄을 잡았다.

봄이면 떼를 타는 사람이어서 겨울 삯을 못 받았다고 떠나면 뗏일마저 잃을까 두려웠다.

두 번째 셈날에도 곡식은 오지 않았고, 세 번째에는 한양으로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산판에서는 끼니가 나왔다.

성돌은 제 밥을 삼킬 때마다 집에 남은 딸을 떠올렸다.

하루를 쉬고 내려갔다가 빈 뒤주를 보면 다시 올라오지 않을 수 없었다.

눈보라로 길이 막힌 날과 딸의 열이 내리지 않아 집에 남은 날을 빼니 서른엿새를 일했다.

길상은 서른여덟 날이었다.

날수를 적은 종이를 옷깃 안에 넣고 다니다가 저녁마다 꺼냈다. 글씨가 땀에 번지자 지왈길이 새 종이에 옮겨주었다. 여량 접주인 그는 같은 산판에서 줄을 잡으며 일꾼들의 사정을 듣고 있었다.

 

“이것도 한양에서 돈이 와야 쳐준답니까?”

길상이 종이를 접으며 묻자 성돌이 도끼날의 얼음을 털었다.

“한양에 가면 또 다른 말이 있겠지.”

전에 떼를 몰고 갔을 때, 재목을 살 적에 곧다고 하던 상인은 돈을 줄 때 옹이를 짚었다.

돌아갈 날은 다가오고 먹고 묵은 값은 늘어, 목상이 값을 깎이는 것을 뗏군들도 지켜보았다.

성돌이 소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윗가지는 볕을 받고 있었으나 밑동에는 푸른 그늘이 남아 있었다.

“저것도 큰집 들보가 되겠구먼.”

“우리 집 문짝부터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길상이 도끼 자루를 고쳐 쥐자 성돌이 입가를 조금 움직였다.

“그건 들보 한 개 값도 안 들겠지.”

“그 돈도 안 주니 하는 말이지요.”

골짜기 아래에서 줄을 가져오라는 소리가 났다.

 

지왈길은 해진 줄을 걷어냈다.

짧게 잘라 이어 쓰라는 대리인의 말을 듣지 않고 다른 산판에서 빌린 줄을 걸었다. 사람들이 물러나자 소나무가 길게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가지 친 나무 끝이 중턱의 바위에 걸렸다. 줄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 줄기가 돌아섰고, 성돌의 짚신 앞코가 눈에 가린 돌 틈에 끼었다. 발을 빼려는 사이 나무 끝이 정강이를 쳤다.

길상은 당기던 줄을 놓고 달려갔다. 눈 위로 피가 번졌다. 지왈길이 어깨를 붙들어 눕히자 성돌은 위쪽 산판을 보았다.

“내 몫도 세어주시오.”

“세어두겠소. 몸부터 가만히 두시오.”

가지 두 개를 다리 양옆에 대고 찢은 옷으로 묶었다. 길상이 허리끈을 풀어 들것에 보태는데 대리인이 아래쪽에서 나무를 누가 내릴 것이냐고 소리쳤다.

“그 사람 몫까지 우리가 내릴 테니 의원부터 부르시오!”

뒤에 남은 부출군이 받아쳤다. 그러나 강가에 내려갔을 때 의원은 없었다. 대리인은 들것을 들여다보고 장부부터 폈다.

 

지왈길이 밀린 삯을 내놓으라고 하자 봄까지 기다리라 했다.

처마 아래에는 곡식자루가 있었으나 일꾼들 먹일 것이라며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다리가 부러졌는데 봄까지 누워 굶으라는 겁니까?”

길상이 앞으로 나서자 성돌이 바짓자락을 당겼다. 지왈길은 그를 불러 들것을 잡게 했다.

집에 닿자 딸이 불부터 살렸다. 생나무에서 연기만 나자 아이는 눈을 비비다가 방의 신음에 돌아보았다. 길상은 들것을 내려놓고 나루로 달려갔다. 무진이 배 바닥에 붙은 얼음을 긁고 있었다.

“와서 좀 읽어주게. 사람이 다쳤는데도 장부만 내미네.”

 

무진은 동백에게 배를 맡기고 따라갔다.

성돌은 그가 떼 엮는 일을 배울 때 느슨한 매듭을 풀어 다시 보여주던 사람이었다.

방에 들어서자 성돌이 눈을 떴다.

“내 받을 것만 받아주게. 남의 집 양식을 자꾸 가져오지는 말고.”

문가에는 동료들이 놓고 간 감자와 보리가 있었다. 한 사내가 장작을 쌓는 동안 다른 사내는 덜컹거리던 방문의 쐐기를 깎았다. 성돌이 그만하고 가라 하자 사내가 문짝을 당겨보았다.

“이 집 문은 올 때마다 나한테만 성을 내니 오늘은 고쳐놓고 가야겠소.”

딸아이가 웃으며 문을 여닫았다. 소리가 나지 않자 한 번 더 당겨보았고, 성돌도 누운 채 그쪽을 보았다.

 

무진이 지왈길이 적어둔 날수를 읽기 시작하자 아이는 문에서 손을 떼고 아버지 곁에 앉았다.

의원을 데려와 다리를 살피게 한 이튿날, 밀린 삯을 치를 보리가 산판에 들어왔다는 말이 돌았다. 성돌의 집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지왈길과 무진이 막사를 찾아가자 대리인은 이미 나누어주었다며 장부를 폈다. 성돌의 이름 옆에는 서른여섯 됫박을 지급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누구에게 주었소?”

“사람을 시켜 보냈소.”

“누가 가져갔는지 말해주시오. 받은 사람 앞에서 맞춰봅시다.”

대리인이 장부를 덮으려 하자 함께 온 일꾼이 종이 끝을 눌렀다.

“먼저 스무 날은 나와 함께 베었소. 나머지는 길상과 있었고. 쉬는 날도 맞춰보았소.”

“봄에도 여기서 일할 사람이오?”

사내의 손이 종이에서 떨어졌다. 막사 뒤의 도끼 가는 소리도 멎었다. 그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다가 다시 말했다.

“보았으니 보았다고 하는 것이오.”

대리인은 그를 노려보다가 곡식자루를 풀었다. 보리 두 됫박을 떠 내밀자 무진이 장부를 가리켰다.

“다 주셨다는 삯을 지금 다시 주시는 겁니까?”

“다친 사람 굶기지 말자고 주는 것이오.”

“그러면 삯은 아직 남았소?”

대리인은 됫박을 자루 안으로 던졌다.

“못 믿겠거든 아우라지로 가시오. 목상에게 따지면 될 것 아니오.”

 

지왈길은 종이를 펴고 오늘 받은 두 됫박과 남은 서른네 됫박을 적었다.

무진이 날짜까지 읽어주자 대리인은 두 사람을 막사 밖으로 몰아냈다.

“오늘 온 얼굴들, 다 기억해두겠소.”

지왈길은 돌아보지 않고 종이를 접었다.

아우라지의 목상은 주막 한쪽을 빌려 셈을 보고 있었다. 지왈길이 종이를 내놓자 다친 사람 몫부터 주라고 일렀다며 보리를 나른 사내를 불렀다. 사내는 산판까지 보낸 자루 수와 날짜를 댔다.

“여기서 보낸 것은 틀림없소.”

 

목상은 대리인이 보내온 지급 내역 장부를 꺼내 성돌의 이름이 있는 쪽을 펼쳤다.

서른여섯 됫박 옆에 지급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무진이 그 자리를 짚었다.

“산판에는 갔지만 이 사람에게는 오지 않았습니다.”

함께 온 일꾼들도 장부 가까이 다가섰다. 제 이름을 찾은 사내가 손가락을 멈추었다.

“나도 받았다 되어 있소?”

무진이 적힌 수량을 읽어주자 사내는 허리에 찬 빈 자루를 풀어 상 위에 놓았다. 다른 이도 제 이름을 찾아달라고 했다. 받지 못했다는 말이 잇따르자 목상은 대리인을 데려오라며 심부름꾼을 보냈다. 그러고는 한양의 거래 문서를 내놓았다.

“나도 제값을 못 받았소. 백 냥에 사겠다던 나무를 칠십 냥으로 깎더니 그중 마흔 냥만 주었소.”

 

무진이 문서를 읽었다.

거래를 붙인 구문 열 냥, 숙식과 보관한 값 여섯 냥, 이자 여섯 냥이 빠져 있었다.

“손에 쥔 것은 열여덟 냥입니까?”

“그 돈으로 올라왔소. 남은 서른 냥도 다음 물량을 올려야 맞춰주겠다는데, 나더러 어쩌란 말이오.”

목상은 그 문서를 성돌의 품삯 내역 위에 겹쳐놓았다. 무진은 밑의 종이를 빼내 상 가운데 놓았다.

“한양에서 못 받으신 돈은 어른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성돌 아저씨 삯은 여기서 주셔야 하고요.”

“그래서 곡식을 보냈잖소!”

“받았다고 적힌 사람은 있는데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셈을 맞춰주십시오.”

심부름꾼은 혼자 돌아왔다. 대리인이 새벽에 곡식자루를 싣고 산판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목상이 욕을 퍼붓자 일꾼 하나가 당장 뒤쫓자고 했다.

“어디로 갔는지 알고?”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지왈길은 관아에 알리자고 했으나 목상은 먼저 사람을 풀어 찾아보겠다며 문서를 거두었다.

“우리는 언제 받습니까?”

 

길상이 물었지만 목상은 종이를 묶는 끈만 당겼다.

길상은 그날로 산판에 오르지 않았다. 서른여덟 날을 일하고 한 됫박도 받지 못한 채 도끼를 집에 두었다. 다른 일꾼들도 새벽마다 산길 어귀에 모여 삯을 먼저 치르라고 했다. 나무를 더 내려야 한양에서 돈이 온다는 말이 돌아왔지만, 올라가는 사람은 날마다 줄었다.

성돌은 누운 채 그 소식을 들었다. 부엌에서 딸이 보리 자루를 털고 있었다. 두 됫박을 받아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사람 돈은 한양에 있고, 내 다리는 여기 있네.”

그는 다리를 받친 짚단을 밀어내려 했다. 딸이 달려와 무릎을 붙들자 이를 악물고 손을 멈췄다.

“아버지, 어디 가려고요.”

“가서 내 이름을 대야겠다. 누워 있으니 없는 사람인 줄 아는 게야.”

길상이 등 뒤에 앉아 팔을 내밀었다.

“업히십시오.”

몸을 옮기는 순간 성돌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무진과 지왈길이 다시 눕혔다.

딸은 흐트러진 짚단을 끌어다 받쳤다. 길상이 팔을 거두자 성돌이 손목을 잡았다.

“내 몫만 세고 오게. 싸움은 하지 말고.”

 

길상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방을 나와서도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안에서는 딸이 아버지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고친 방문은 소리 없이 닫혔다.

봄물을 기다리는 때가 되자 아우라지 강가에 초군 수백 명이 모였다.

산에서 나무를 베고 나르던 사람들 사이로 뗏군들도 삿대를 들고 섰다. 빈 곡식자루를 허리에 찬 사내가 있었고, 집에서 쓰던 됫박을 가져온 사내도 있었다.

길게는 두 달 가까이 밀린 삯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낮에 녹은 진창이 다시 얼어 발밑에서 깨졌다. 송천을 따라 내려온 바람이 주막 처마의 짚 끝을 흔들었다.

 

2e6b84d0-9d3a-4585-8908-8bc0722633c2 65%.png

 

목상은 주막 안에 있었다.

사람들이 마당을 채우자 문이 닫히고 빗장이 걸렸다. 지왈길이 문 앞에서 그를 불렀다.

“오늘은 날짜를 정해주시오. 또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소.”

안에서는 한양에서 답이 오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다. 욕설이 터지자 무진이 뒤쪽 사람들을 물렸다. 길상은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와 날수를 적은 종이를 문틈으로 밀었다.

“이것부터 받아보시오.”

잡아주는 손이 없어 종이가 문턱 아래로 떨어졌다. 길상은 그것을 주워 흙을 털었다. 다시 내밀려는데 문틈마저 막혔다.

“아이도 안에 있네. 문을 부수지는 말게.”

 

무진의 말에 길상이 부엌 쪽을 보았다.

아궁이 앞에서 움직이던 작은 그림자를 그도 보았었다. 길상은 종이를 접어 넣고 한 걸음 물러났다.

뒤에서 누군가 오늘도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길상은 대답하지 못한 채 닫힌 문을 보았다. 성돌의 딸이 털던 자루 소리가 떠올랐다. 내일 다시 와도 저 빗장은 그대로일 것 같았다.

사람들 사이로 횃불 하나가 넘어오자 그가 받아 들었다. 지왈길이 돌아보며 내려놓으라고 했다. 길상은 횃불을 낮췄다가 문짝 가까이 가져갔다.

“문 열어요. 열면 끄겠소.”

안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났다.

 

길상은 횃불을 더 높이 들었다. 처마 끝에 불이 붙자 손목을 돌려 떼려 했으나, 짚 속으로 파고든 불씨가 바람을 타고 옆으로 번졌다.

지왈길이 횃불을 쳐냈다.

길상은 떨어진 불을 밟다가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불길이 이미 지붕을 타고 있었다.

마당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물러났다.

물동이를 찾는 소리와 문을 열라는 고함이 뒤엉켰다.

 

길상은 나루로 달려가 물을 퍼왔으나 쏟아진 물 너머로 서까래가 타들어갔다. 불붙은 짚단이 셈막의 거적 위로 날아갔다.

“안에 사람이 있소!”

지왈길이 도끼로 빗장 걸린 문을 찍었다. 무진이 함께 밀자 갈라진 문짝이 넘어갔다.

연기 속에서 아이가 기어 나왔다.

무진은 아이를 안고 강가로 달려갔다. 동백이 치맛자락에 물을 적셔 그을린 얼굴을 닦았다.

주모는 문턱 안쪽에 쓰러졌다.

 

길상이 겨드랑이를 붙들어 끌어내자 그녀는 기침하면서도 집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불이…… 아이 덮을 것도 다 있는데.”

길상은 다시 들어가려 했으나 지왈길이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들보가 꺾이며 부엌이 주저앉았고, 뜨거운 바람이 사람들을 뒤로 밀었다.

뒤꼍으로 빠져나온 목상이 셈막을 가리켰다.

“장부부터 꺼내오시오! 저 안에 장부가 있소!”

무진이 다가가려는 앞에 불붙은 새끼줄이 떨어졌다. 종이 몇 장이 바람에 휘말려 나왔다. 그는 발치의 종이를 밟아 불을 끄고 집어 들었다. 가장자리는 탔지만 가운데에 일꾼 이름과 곡식 수량이 남아 있었다.

 

길상은 물동이를 내려놓고 아이에게 갔다. 주모는 아이의 입가를 닦다가 그를 보았다.

“우리 애가 안에 있는 줄 몰랐소?”

길상은 입을 열었으나 대답하지 못했다.

주모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아이를 고쳐 안았다. 젖은 치맛자락 밑으로 아이의 맨발이 드러나자 제 손으로 감쌌다.

동백은 가까운 집에서 낡은 이불을 빌려왔다.

주모의 어깨에 둘러주고 아이의 발끝까지 덮었으나, 아이는 기침할 때마다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주모가 그 등을 쓸어내리자 손에 묻은 검댕이 이불에 번졌다.

한 사내가 길상의 어깨를 잡았다.

“이제 우리 삯은 어찌 받으라고 불을 질러!”

다른 사내가 그 손을 떼어냈다.

“남은 불부터 꺼야지. 옆집까지 타겠소.”

사람들은 물을 나르고 불붙은 울타리를 무너뜨렸다.

 

길상도 동이를 들고 강가를 오갔으나 물을 채울 때마다 주모가 앉은 쪽을 돌아보았다. 가까이 갈 수 없어 물동이만 사람들 손에 넘겼다.

불이 잦아든 뒤에도 무너진 지붕 밑에서 연기가 올랐다. 사람들은 긴 장대로 짚을 헤쳐 물을 부었다. 길상이 타다 남은 기둥을 밀어내는데 목상이 다가와 팔을 붙들었다.

“네가 질렀지.”

길상은 장대를 놓았다. 목상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관아에 가서 그대로 말하시오. 장부도 받아둔 문서도 다 저 안에 있었소.”

 

지왈길이 두 사람 사이로 다가갔다.

“길상은 달아나지 못하게 하겠소. 밀린 삯은 장부가 남았든 타버렸든 따로 셈해야 하오.”

“이 꼴을 보고도 삯부터 달라는 것이오?”

지왈길은 대답 대신 길상의 다른 팔을 잡았다. 길상은 목상에게서 풀려났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동백이 주모와 아이를 부축해 이웃집으로 데려가는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해가 기울 무렵에야 잔불이 잡혔다.

몇 사람을 남겨 지키게 하고 일꾼들은 강가의 빈 헛간으로 옮겨갔다. 잠시 뒤 동백이 주모 모자를 덮어주었던 이불을 안고 들어왔다. 이웃집에서 두 사람의 잠자리를 마련해주어 돌려주기 전에 마른 흙과 재를 털어내려는 것이었다. 불 앞에서 젖은 옷을 말리던 사내들이 자리를 좁혀주었다.

 

무진은 마른 바닥에 멍석을 펴고 주운 종이를 올려놓았다. 검게 탄 가장자리가 손끝에서 부서졌다. 남은 이름을 읽어보았으나 성돌은 없었다.

지왈길이 품에서 따로 적어둔 종이를 꺼냈다. 성돌이 일한 서른엿새, 두 됫박을 받은 날짜와 남은 서른네 됫박이 적혀 있었다. 무진은 그 종이 곁에 새 종이를 폈다.

한 사내가 다가와 쪼그려 앉았다.

“내 이름도 적어주시오.”

다른 사내가 허리의 빈 자루를 풀어 종이 밑에 깔았다. 무진은 빌려온 벼루에 먹을 갈고 첫 사람의 이름을 물었다.

“며칠 일했습니까?”

“스물아홉 날이오. 받은 것은 없소.”

곁의 사내가 함께 일했다며 앞으로 앉았다. 무진은 증언할 사람의 이름도 옆에 적었다.

 

길상은 헛간 문가에 앉아 있었다.

지왈길이 내일 함께 관아로 가자고 했을 때도 고개만 끄덕였다. 사람들이 제 날수를 부르는 동안 품속의 종이를 꺼내 무릎에 폈다. 서른여덟 날이라는 글씨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갔다가 거두었다.

“길상.”

무진이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대답하려는데 문밖에서 동백이 이불 한쪽을 털었다. 마른 재가 떨어지고, 가장자리에 묻은 검은 손자국은 그대로 남았다. 길상은 주모가 감싸 쥐던 아이의 맨발을 떠올렸다.

 

무진은 붓을 든 채 기다렸다.

길상은 종이를 다시 접지 못하고 두 손으로 펴들었다.

“서른여덟 날…….”

목이 막혀 말을 멈추자 곁에 앉은 사내가 그 날수를 받아주었다.

“내가 함께했소.”

무진은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적었다. 길상은 종이를 무릎에 내려놓고, 검게 탄 제 손을 그 아래 감추었다.

 


ⓒ 정선신문 & jsweek.net 무단전재-재배포금지

BEST 뉴스

전체댓글 0

추천뉴스

  • 강원랜드 한가위 전통시장 찾아 지역상권 활성화 나서
  • 추석 연휴에도 정선 관광시설 문 활짝
  • 정선군 목재문화체험장 인기
  • “농어촌 기본소득 바람·사전투표 압승…최승준 징검다리 4선 견인”
  • 최승준 민주당 후보 정선군수 당선 확정
  • 공연 보면 케이블카 반값… 정선형 ‘문화관광 패키지’ 뜬다
  • 최승준 정선군수 후보, 막판 표심 공략 총력…“129 민간구급차 지원 추진”
  • 차 한 잔의 행복 - 달팽이 뿔 위 에서 의 싸움
  • 정선군 예미농공단지 공공폐수처리시설 2단계 증설
  • 강원랜드, 태백진로박람회서 청소년 도박예방 캠페인 전개

포토뉴스

more +

해당 기사 메일 보내기

[연재소설|녹도아리랑 ㉙] 나무는 한양으로, 굶주림은 집으로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