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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번호 붙은 돌 ⑪] 소리 없이 오는 것들

  • 김광희 기자
  • 입력 2026.11.01 1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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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신을 잊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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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리데에서 아르수아까지

 

멜리데를 나서는 아침에는 안개가 낮았다.

밤새 젖은 지붕 위로 굴뚝들이 먼저 드러났다. 처마 밑에 서 있던 사람들이 배낭을 고쳐 멨다. 지은은 신발 끈을 풀어 다시 묶었다. 나는 앞서 나가지 않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다른 길로 들어온 사람들이 같은 식탁에서 먹고 같은 방향으로 떠났다. 문어를 먹던 식당의 옆자리 남자가 우리를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집들이 끊기자 길이 숲으로 들어갔다. 참나무 잎 끝에서 물이 떨어졌다. 유칼립투스의 벗겨진 껍질은 몸통에 길게 매달려 있었고, 발밑에서는 젖은 낙엽이 밑창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안개 속에서 앞사람의 붉은 배낭이 흐려졌다가 가까워졌다.

정희와 걸을 때 나는 이런 날에도 마을에 닿을 시간을 계산했다. 아내가 숲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발이 아파 고개를 숙인 것인지, 내 뒤에서 무엇을 생각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지은이 옆으로 왔다.

“발은 어때?”

“아직 아파.”

말하고 나니 딸이 걷는 속도를 살피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는 보엔테에서 쉬기로 했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산티아고 성당과 돌십자가가 마주 보고 있었다. 살레타 샘에는 물이 나오는 주둥이가 네 개였다. 한 사람이 물병을 채우는 동안 다른 사람은 신발 끈을 고쳐 맸다. 지은은 차가 뜸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 옆에서 길을 건넜다.

카페 유리에는 안쪽부터 김이 서렸다. 잔을 감싼 딸의 손가락에 온기가 돌아왔다. 지은은 회사에서 온 문서를 읽다가 전화기를 뒤집었다.

“급한 거니?”

“내가 확인해줘야 다음 사람이 할 수 있는 거.”

나는 먼저 마신 잔을 내려놓았다. 딸이 답을 쓰는 동안 밖을 보았다. 성당 앞에서 사람들이 순례자 여권을 꺼내고 있었다.

카스타녜다 쪽으로 오르자 안개가 풀렸다. 목초지에 서 있던 소의 등이 볕을 받아 반짝였다. 그늘진 풀밭에는 물기가 희게 남았다. 돌담 아래 작은 물길이 길과 나란히 흘렀다.

마을 안내판에는 12세기의 『칼릭스티누스 사본』 이야기가 있었다. 옛 순례자들은 트리아카스텔라에서 주운 석회석을 이곳까지 가져와 내려놓았다. 가마에서 구운 석회는 산티아고 대성당을 짓는 데 썼다고 했다. 사람마다 들고 온 돌 한두 개가 모여 성당 벽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지은이 길가에서 작은 돌 하나를 주워 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엄지손톱만 한 회색 돌이었다. 나는 그것을 산티아고까지 가져가기로 했다. 무겁지 않았다.

돌을 내려놓은 사람들 가운데 성당이 다 지어진 것을 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끝을 보지 못할 일에 왜 돌을 지고 왔을까. 나는 다 적을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빌었다. 다 적은 것을 내가 읽을 수 있을지는 빌지 않았다.

지은이 안내판을 다 읽고 돌아섰다.

“엄마는 이 길에서 뭘 얻고 싶었을까.”

“집에 돌아가 밥 짓고 싶다고 했어.”

딸은 배낭 끈을 잡았다.

“너희 보고 누구냐고 묻지 않게 해달라고도 했고.”

지은이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뒤를 따르다가 옆으로 갔다.

리바디소로 내려가는 길에서 숲이 벌어졌다. 지붕 사이로 이소강이 보였다. 물은 그늘에서 검다가 여울에 이르러 희게 흩어졌다. 잠긴 풀잎들이 물살을 따라 누워 있었고, 돌 사이에 걸린 갈색 잎은 끝만 떨었다. 중세의 돌다리 곁에는 길손을 돌보던 옛 구호원이 지금도 숙소로 남아 있었다. 정희와 발을 담갔던 강가였다.

강가 계단에 앉은 사람들이 신발을 벗었다. 나는 그 발들을 보다가 정희의 발목을 떠올렸다. 내 무릎에 얹혔던 무게와 손끝이 닿을 때 조금 오므라들던 발가락이었다.

“엄마한테 여기서 약 발라줬어.”

지은이 나를 보았다.

“내 무릎에 발 올려놓고. 뒤꿈치가 쓸려서.”

딸은 강 쪽으로 내려갔다. 나는 지팡이를 짚고 뒤따랐다.

정희는 이 계단에서 조금 더 앉아 있자고 했다. 나는 방에 들어가서 쉬자고 했다. 아내는 젖은 발을 수건으로 감싼 채 물을 보고 있었다. 그때는 방이 더 편할 텐데 왜 그러는지 몰랐다.

그런데 내 원고에는 내가 그 발을 무릎에 올려놓고 오래 받치고 앉았다고 적혀 있다. 얼마나 오래였는지는 적지 않았다고까지 썼다. 방에 들어가자고 한 것도 나였다. 둘 다 있었던 일인지, 하나는 내가 바란 일인지 지금은 가리지 못한다.

우리는 빵을 먹었다. 지은이 작은 쪽을 받으려다 내가 내민 것을 그대로 받았다. 강 건너에서 누군가 발을 담갔다가 소리를 내며 뺐다. 딸이 그쪽을 보고 웃었다. 나는 전화기를 꺼냈다. 화면을 맞추는 사이 웃음이 조금 가셨으나 사진을 찍었다.

“나 찍었어?”

화면을 보여주었다. 지은은 들여다보다가 빵을 다시 집었다. 사진 속 딸의 눈가에 가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뒤로 강물이 희게 흘렀다.

그날은 리바디소에서 묵었다. 저녁에 지은은 혼자 마당에 나갔다. 창을 열자 낮에는 사람들의 말에 묻혔던 물소리가 들어왔다. 물소리 사이로 딸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지수야, 하고 부르는 소리였다. 나는 창을 닫지 않았다. 내가 하기로 했던 전화를 딸이 대신 걸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지은은 한참 뒤 돌아와 추워졌다고 했다. 지수가 아빠 바꿔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느냐고 묻지 못했다.

다음 날 아르수아까지는 천천히 올랐다. 강물 소리가 멀어지자 차 소리가 들렸다. 북쪽 길에서 온 사람들도 이 마을에서 같은 흐름에 들었다. 광장의 배낭들 사이로 여러 나라 말이 섞였다. 정희가 엽서를 고르던 가게가 광장 건너에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이틀을 쉬기로 했다.

숙소 안내지에는 이 지역의 폰테 산타라는 샘도 나왔다. 우리가 걸어온 길가에 있는 곳은 아니었다. 상처 난 발을 씻은 순례자들이 나아 다시 떠났다는 전승이었다. 누군가 물값을 받으려 하자 샘이 말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거기도 가려고?”

지은이 물었다. 나는 안내지를 접었다.

“아니. 오늘은 쉬자.”

나은 사람들은 이야기로 남았다. 발을 씻고도 낫지 않은 사람들은 무엇을 가지고 다시 길을 떠났을까. 정희는 낫지 않았다. 그래도 아내는 끝까지 걸었다.

첫날 저녁에 딸이 메일을 보냈다. 정희가 종이배를 접던 사진과 두 딸의 기록이었다. 사진 뒤에는 닫힌 서재 문이 있었다. 그때 내가 어디 있었느냐고 묻자 지은은 서재라고 했다.

지수는 엄마가 접는 법을 말하지 못했지만 손은 움직였다고 썼다. 배 한쪽이 덜 접혀 기울었고 둘이 웃었다고 했다. 같은 날짜의 지은 기록에는 잇몸이 아파 감자를 으깨주니 먹었다는 말이 있었다. 그 아래에 ‘아빠 오냐고 다섯 번 물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정희가 나를 남이라고 부르던 주간이었다.

“어떻게 아빠 기다리는 건지 알았어?”

“문 열릴 때마다 일어났어.”

“나만 들어가면 무섭다고 했잖아.”

옷을 갈아입히려고 다가가면 아내는 몸을 뒤로 물렸다. 딸들이 와야 팔을 내주었다. 지은은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아빠가 무서웠던 것도 맞아. 기다린 것도 맞고. 둘 중 하나만 쓰지 마.”

나는 날짜를 다시 보았다. 그날 밤 이불을 간 것은 나였다. 침대 모서리에 무릎을 대고 젖은 천을 빼내던 감촉이 떠올랐다.

“그날 다른 일은 안 적었어?”

“무슨 일?”

사진 뒤의 서재 문을 가리켰다.

“내가 계속 저기 있었던 건 아니야.”

“계속 있었다고 안 했어.”

나도 힘들었다는 말을 꺼내자 딸은 화면에서 손을 뗐다.

“알아. 그런데 지금 그 얘기만 하잖아.”

정희는 사진 속에서 종이를 누르고 있었다. 손톱 끝까지 힘을 주어 접은 선을 문지르고 있었다.

“나도 어릴 때 아빠 무서웠어.”

지은은 컵을 감쌌다.

“성적표 내놓고 아빠가 보고 있으면, 무슨 말부터 해야 덜 혼날까 생각했어.”

“내가 그렇게까지 했니.”

“나는 그랬어.”

딸은 엄마에게 아빠 기분이 어떠냐고 먼저 물은 날도 있었다고 했다. 정희가 내 방에 들어와 아이에게 너무 그러지 말라고 하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무엇을 그렇게 했느냐고 되물었다. 지은은 컵을 내려놓고 자기 방으로 갔다.

나는 원고를 열었다. 리바디소의 장면을 찾았다. 거기에는 약이 아니라 반창고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지은에게 약을 발라줬다고 말했었다. 반창고 가장자리가 들려 있었고, 그것을 갈아주었다. 손바닥에 남은 감촉은 약을 밀어 바르던 손끝이었다.

시장에 다녀온 정희의 발을 닦는 장면도 찾았다. 실종되었던 아내가 새벽에 돌아온 날이었다. 문장을 읽자 손바닥에 발목이 얹히는 것 같았다. 복사뼈 아래의 마른 살과 핏물이 말라붙은 양말을 떼던 손끝의 감촉이 있었다.

한국에서 지은의 기록을 보고 한 번 고친 장면이었다. 그날 미지근한 물을 가져와 아내의 양말을 적신 사람은 딸이었다. 그런데 다음 장을 쓰면서 예전 문장을 다시 가져왔다. 고친 문장과 나란히 놓았다.

리바디소에서 아내의 발을 만진 것은 나였다. 집에서 실종된 밤 뒤 정희를 씻긴 사람은 지은이었다. 서로 다른 날의 발목이 내 손바닥에서는 같은 감촉으로 남아 있었다.

딸이 양말을 떼었다는 문장 뒤에 다음 장을 붙였다. 예전 원고는 ‘보류’ 폴더에 넣었다. 닫았다가 조금 뒤 다시 열어 남아 있는지 보았다.

아침 식탁에서 어제 내가 너무 말했다고 했다. 지은은 어떤 말이냐고 물었다.

“다.”

딸은 숟가락을 든 채 잠깐 나를 보다가 다시 먹었다. 한동안 각자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지은이 약 상자를 열었다. 어제 저녁 칸에 약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딸은 아무 말 없이 그 약을 꺼내 내 앞에 놓고 물컵을 밀어주었다. 나는 그것을 삼켰다. 언제 빠뜨렸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작은 가게에서 치즈를 샀다. 정희가 먹던 것인지 몰라 사지 않겠다고 하자 지은은 자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산티아고 성당 앞을 지났다. 문 옆에 미사와 고해성사 시간을 적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지은이 걸음을 멈췄다.

지은은 문 옆에 붙은 종이를 한참 보았다.

“나 엄마 돌아가시고 성당 안 다녔어.”

나는 딸을 보았다. 장례식장에서 무릎을 꿇고 연도를 따라 읽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까지만 다녔어. 엄마 보내는 날까지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딸은 종이 아래 적힌 시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내렸다.

“엄마는 평생 빌었잖아. 아이들 얼굴만은 알아보게 해달라고. 그거 하나 들어줬어? 마지막엔 나보고 누구냐고 했어.”

지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이제 아빠까지야. 엄마가 우리를 잊고 갔는데, 아빠도 그 병으로 우리를 잊고 간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어. 하느님이 있으면 어떻게 한 집에 두 번을 그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산니콜라스의 의자에서 내가 했던 말이었다.

“그래서 안 갔어. 갈 데가 없는 사람처럼 일요일마다 집에 있었어.”

딸은 성당 문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들어가고 싶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나 잠깐 들어갔다 올게.”

나는 벤치를 가리켰다. 딸은 길 건너 숙소를 보았다.

“방에서 기다려. 내가 갈게.”

숙소 문을 열며 돌아보니 지은이 그대로 서 있었다. 정희가 성당에 들어가면 나는 늘 문밖에서 날씨를 살피거나 남은 거리를 세며 기다렸고, 그 문밖이 내 자리라고 여기며 서른 해를 보냈는데, 이번에는 딸이 나를 문 안으로 들여보내고 저는 바깥에 남았다. 나는 손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딸은 한 시간쯤 뒤 돌아왔다. 외투를 벗고 손을 씻었다. 나는 치즈를 잘라 빵에 얹었다. 한 조각을 먹은 뒤 지은이 말했다.

“몇 년 만에 고해했어.”

나는 칼을 내려놓았다.

“영어로 했어?”

“응. 모르는 말은 전화기로 찾아가면서.”

딸은 빵의 껍질을 조금 떼었다.

“엄마가 같은 걸 자꾸 물으면 아까 말했잖아, 그랬어. 엄마가 입을 다물면 조용해서 좋았고. 그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 했어.”

엄지손톱 옆에 마른 살이 일어나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니까 그 생각 때문인 것 같았어. 아니라는 건 아는데.”

신부도 아니라고 해주었다며 딸은 부스러기를 모았다.

“그런데 엄마가 알았을까 봐. 내가 싫어하는 걸.”

나는 딸이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그 말 하고 뭘 했느냐고 묻더라. 방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고 했어. 엄마 밥 안 드셨다고 해서. 감자 으깨고 식혀서 드렸어.”

복도에서 사람들이 지나갔다. 지은은 문 쪽을 보았다가 돌아앉았다.

“아빠 전화 받기 무섭다는 말도 했어. 또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지수하고 남편한테도 얘기하래.”

“지수는 알아?”

“그저께 조금 했어. 오늘 더 하려고.”

“아빠한테는 말 못 할 줄 알았어.”

나는 치즈를 더 잘라 접시 가운데 놓았다.

딸은 용서를 빌러 들어갔다가 나왔다. 나는 그런 문 앞에 서본 적이 없었다. 용서를 구할 사람이 이미 없을 때 용서는 어디에서 오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아직 그날 아침 닫은 문을 기억한다. 언젠가 그것마저 잊으면, 그것을 용서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잊는 것은 용서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일까.

오후에 지은은 침대에 모로 누워 잠이 들었다. 외투는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었고, 안주머니 쪽이 조금 처져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전화기를 열었다. 하느님이 있으면 어떻게 한 집에 두 번을 그러느냐던 딸의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검색창에 병의 신이라고 쳤다. 역병을 내린다는 신들의 이름이 몇 나라 말로 줄지어 나왔다. 그 아래에 판도라라는 이름이 있었다.

어려서 상자 이야기로 알던 것이었다. 원래는 상자가 아니라 곡식이나 기름을 담아 두는 큰 항아리였다고 했다. 수백 년 뒤 한 학자가 옮겨 적으면서 상자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대목을 읽다가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이야기를 옮겨 적은 사람 하나 때문에 항아리가 상자가 되었고, 그 뒤로 사람들은 모두 상자를 떠올렸다. 오래 소설을 써 온 나는 그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시인 헤시오도스가 적은 이야기는 이랬다.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사람에게 주자 제우스는 그 값을 사람에게 치르게 하려고 대장장이 신에게 흙과 물로 여자 하나를 빚게 했다. 신들이 저마다 하나씩 선물을 얹어 주었고, 그래서 그 여자의 이름이 모든 선물을 받은 자, 판도라가 되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아우에게 제우스가 보내는 것은 받지 말라고 일러두었으나, 아우는 여자를 집에 들였다. 그 집에 뚜껑 덮인 항아리가 있었다.

여자가 뚜껑을 열자 그 안에 있던 것들이 흩어져 나왔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고된 일도, 병도 모르고 살았다고 했다. 항아리에서 나온 수많은 괴로움이 땅과 바다를 채웠다.

그다음 구절에서 나는 손가락을 멈췄다. 병들은 밤에도 낮에도 저절로 사람에게 찾아와 나쁜 것을 가져다 놓는데, 소리 없이 온다고 했다. 제우스가 그들에게서 목소리를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 병들을 노소이라고 불렀다.

목소리가 없는 병.

정희의 병도 그렇게 왔다. 찬장 안쪽에 소금과 설탕이라고 크게 쓴 종이가 붙던 날에도, 밥솥에 ‘여기 누르기’라는 화살표가 생기던 날에도, 그것은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는 오래 쓰던 것도 모르느냐고 웃었다. 병이 문을 두드렸다면 나는 원고를 덮고 일어났을 것이다. 두드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방문을 닫고 계속 썼다.

내게 온 것도 다르지 않았다. 같은 파일을 두 번 보낸 날에도, 우유를 들었다가 내려놓고 빈손으로 가게를 나온 날에도, 아무것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오래 앉아 있어서 그렇다고 나는 말했다. 제우스가 병의 입을 막은 것이 벌이었다면, 그 벌은 병이 아니라 병이 찾아온 집의 사람들이 받았다. 소리가 없으니 아무도 문간에 나가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병은 들어온 집에서 목소리를 가져갔다. 정희는 이름을 잃었고, 문장을 잃었고, 마지막에는 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목소리를 빼앗긴 것들이 다른 이의 목소리를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 나는 화면을 끄지 않은 채 그 생각을 오래 했다.

항아리 이야기에는 끝이 있었다. 병과 괴로움이 다 흩어진 뒤 여자가 뚜껑을 다시 덮었고, 그 바람에 하나가 항아리 아가리 아래에 걸려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 엘피스, 희망이었다.

그 대목을 두고 사람들이 오래 다투어 왔다는 글도 있었다. 희망이 사람 곁에 남은 마지막 선물이라고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희망도 괴로움 가운데 하나여서 다행히 갇혔다고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이 끝내 꺼내 쓰지 못하도록 신이 거두어 간 것이라고 읽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 셋을 차례로 읽었다. 어느 쪽인지 정할 수 없었다. 다만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는 알았다. 나는 그 항아리 바닥에 남은 것을 손으로 긁어서라도 꺼내려고 했다. 밤새 기적담을 찾아 읽었고, 가리비 껍데기를 목에 대고 나았다는 기사의 이야기를 저장해 두었고, 대성당에서는 낫게 해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꺼내지 못하자 나는 항아리를 아예 깨고 나가려 했다.

지은이 몸을 뒤척였다. 눈을 뜨더니 내가 들고 있는 전화기를 보았다.

“뭐 봐?”

나는 판도라 이야기라고 했다. 딸은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들었다. 병이 목소리 없이 온다는 대목에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서 아무도 몰랐구나.”

지은은 한동안 천장을 보았다.

“하느님한테 화내면 하느님은 가만히 계시잖아. 그 병한테 화내면, 그 병은 목소리도 없대.”

딸이 웃으려다 말았다.

“그럼 나는 누구한테 소리를 질러.”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희망은 왜 안 나왔느냐고 지은이 물었다. 나는 읽은 대로 세 가지를 말해 주었다. 딸은 마지막 것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그거 꺼내 쓰려고 안 했던 것 같아.”

지은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넣어 두고, 하루에 한 번씩 뚜껑만 열어 봤어. 내일도 조금만 걷자고. 모레도 조금만 걷자고.”

나는 오페드로우소의 방을 생각했다. 내일도 조금 걷고, 모레도 조금 걸으면 안 되느냐고 묻던 아내 앞에서 나는 항공권의 날짜를 셈하고 있었다. 아내는 희망을 다 꺼내 달라고 하지 않았다. 하루치만 달라고 했다. 나는 그 하루치를 비행기 표 값에 견주었다.

지은은 외투를 끌어다 무릎에 덮었다. 안주머니 쪽이 딸의 무릎에서 조금 처졌다.

나는 전화기를 껐다. 검은 화면에 창밖의 빛이 비쳤다. 소리 없이 오는 것들이 있으면, 소리 내어 부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딸의 이름을 불렀다. 지은이 돌아보았다. 무엇을 말하려고 불렀는지 잊었다고 하자, 딸은 그럼 생각날 때 다시 부르라고 했다.

그날 저녁에는 생선을 먹었다. 지은은 가시를 접시 가장자리에 모았다. 벽의 텔레비전에서 함성이 터지자 딸이 고개를 들었다. 나도 돌아보았으나 공은 이미 골대 안에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딸은 회사에 보낼 문서를 고쳐 보냈다. 그러고는 전화기를 내 쪽으로 돌렸다. 오래된 종이를 찍은 사진이었다.

“고등학교 때 아빠가 써준 거.”

성적표를 가져온 날이었다고 했다. 나는 화면을 늘려 읽었다.

지은아.

네 책상에 앉았다. 문제집이 펼쳐져 있어 몇 장 넘겨보았다. 같은 문제를 몇 번이나 지웠더구나. 지우개로 밀다가 종이가 뚫린 곳도 있었다.

어제 아빠가 공부를 하기는 하느냐고 했지. 너는 대답을 안 했고, 나는 그것 봐라, 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안 믿을 사람처럼 물어놓고 대답까지 하라고 했다.

아빠가 틀렸다.

네가 방문을 닫고 들어간 뒤 엄마한테 물었다. 요즘 공부는 하느냐고. 엄마가 직접 물어보라고 하더라. 네 방문 앞까지 갔다가 그냥 왔다. 또 공부 얘기냐고 할 것 같았다.

내일 저녁에는 네가 좋아하는 것 먹자. 뭐 먹고 싶은지 적어놓아라. 내일은 밖에서 저녁 안 먹고 올게. 같이 가자.

귤 두 개 놓고 간다. 지수하고 하나씩 먹어라.

아빠가.

마지막 줄 아래에 연필로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날 아빠랑 돈가스 먹었어.”

지은이 물었다.

“기억나?”

“어디서?”

“학교 앞에. 내가 맨날 가자고 하던 데.”

가게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화면을 늘렸다. ‘아빠가 틀렸다’는 글씨가 손가락 사이에서 커졌다. 그 글씨는 내 것이었으나 쓴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은 성적 얘기 안 했어. 아빠도.”

딸은 내가 돌려준 전화기를 받았다.

“다음 시험 보고는 또 물었지만.”

나는 지은을 보았다.

“그래도 이건 가지고 있었어.”

원본은 집 서랍에 있다고 했다. 종이가 낡아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고 했다. 딸이 화면을 끄자 유리에 두 사람의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

지은은 빨래를 가져왔다. 내일 비가 온다며 마른 것을 먼저 걷었다고 했다. 나는 셔츠를 집어 접었다. 소매가 밖으로 나와 다시 폈다. 딸은 제 양말을 짝지었다.

지은이 한 짝을 들고 빨래 더미를 살폈다. 나는 이불 끝에 걸린 다른 한 짝을 찾아 딸 옆에 놓았다. 딸은 그것을 집어 두 짝을 포갰다. 나는 접다 만 셔츠를 무릎 위에 놓았다.

“고해소에서 못 한 말이 하나 있어.”

지은은 가방에서 네 번 접힌 종이를 꺼내 빨래 더미 위에 놓았다.

병원 이름이 찍힌 종이였다. 신경과. 날짜는 출발하기 한 달 전이었다. 표 아래쪽에 숫자 몇 개와 의사의 글씨가 있었다. 나는 숫자를 읽을 줄 몰랐다. 맨 아래 줄만 알아보았다. 정밀 검사 권함.

지은은 갠 양말을 무릎에 올려놓고 말했다. 봄부터 회의 중에 거래처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다 아는 이름인데 입 앞에서 멈췄다고. 같은 메일을 두 번 보낸 날도 있었다고. 처음에는 잠을 못 자서라고 했다. 아빠 병원에 따라다니느라, 회사 일이 많아서. 그러다 어느 날 집 앞 편의점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숫자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했다. 뒤에 선 사람이 기다렸다고 했다.

“검사 안 받는다고 했잖아. 지수 앞에서.”

“유전자 검사 말고. 그냥 내가 이상해서 간 거야.”

딸은 혼자 갔다고 했다. 의사가 인지 검사를 하고 가족 이야기를 물었다. 엄마가 쉰한 살에 진단받았다고 하자 의사가 펜을 내려놓았다고 했다. 이번 결과만으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스트레스나 우울로도 이럴 수 있다고. 다만 이 나이에 이런 결과가 나왔고 어머님이 그 나이에 발병하셨으면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배제할 수는 없으니, MRI와 아밀로이드 PET, 유전자 검사까지 정밀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예약은 했어?”

“아빠 다녀오면 하려고 했지.”

지은은 웃으려고 했다.

“그런데 아빠가 먼저 가 버렸잖아.”

나는 종이를 들었다. 손이 떨려 종이 끝이 탁자를 긁었다. 의사가 그 나이에는 흔한 병이라고 할 때 지은이 받아 적던 손이 떠올랐다. 절반이라고 적고 줄을 긋지 않던 손. 그 손이 그때 이미 무엇을 알고 있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묻지 않은 것이 그날 하나뿐이 아니었다.

“괜찮을 거야.”

말해 놓고 나는 그 말을 거두고 싶었다. 정희가 나을 수 있다고 했을 때 내가 한 말과 같았다. 지은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는 거야, 아빠. 그냥 모르는 거.”

“엄마도 혼자 참다가 찬장에 종이부터 붙였잖아. 나도 그러고 있었어. 아빠 몰래, 지수 몰래.”

지은은 제 종이를 내 쪽으로 밀었다.

“이번에는 같이 들어. 나도 아빠 거 같이 들을게.”

나는 순례자 여권을 폈다. 그날 받은 아르수아 도장 아래, 정희의 일을 적던 자리에 적었다. 지은 정밀 검사. 같이 갈 것. 날짜는 비워 두었다. 돌아가서 딸과 함께 채울 칸이었다. 펜을 내려놓자 지은이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지수한테는 내가 말할게. 돌아가서, 얼굴 보고.”

나는 그러라고 했다. 딸은 결과지를 접어 내 공책 뒤쪽에 끼웠다. 거기 다른 종이가 먼저 접혀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잊고 있었다.

* * *

정희의 작은 공책 ― 아르수아, 둘째 날 밤

아르수아의 둘째 날 밤, 빨래를 다 갠 뒤에 지은이 엄마 공책을 처음부터 같이 읽자고 했다. 딸이 소리 내어 읽었고 나는 들었다. 앞쪽의 시 구절과 준비물 목록 다음부터, 날짜를 적은 장들을 여기에 옮긴다. 고치지 않았고,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첫날. 빨래했다. 당신 양말에서 냄새가 났다.

둘째 날.

아침에 떠난 데. 포르토마린. 물에 잠긴 마을.

당신 자꾸 절음. 내가 발 아프다고 했다.

당신 없이 걸음. 아일랜드 사람. 자꾸 쉬자고 함. 길은 하나.

양말 다 마름. 지은이한테 전화함. 웃었다.

당신한테는 내일 말할 것.

비. 가방 없어진 줄 알았다. 의자에 있었다. 주인한테 미안.

감자 깎음. 그 사람 이름 세 번 틀림. 그래도 불러줌.

초콜릿. 당신이 손가락 이렇게 들고 서 있었다. 나중에 읽으면 생각날 것.

성당. 들어가 보고 싶었다.

장갑 찾아줌. 고맙다고 네 번.

빵. 큰 거 내가 감춤. 당신 손 뻗음.

사진. 나 혼자. 바람. 이게 좋다.

지수 시험. 속상하다고 함. 당신은 다음 얘기부터.

밥은 먹었다고 함.

창문 열어줌.

강. 너무 차. 당신이 먼저 뺌.

발. 당신 무릎. 오래.

치즈 너무 많이 놓음. 덜어서 당신 줌.

엽서 씀. 지은이한테 맡길 것. 아직.

차 탐. 당신 무릎. 내가 먼저 말함.

내일도 조금만 걷고 싶다고 했다.

나으면 다시 오자고 했다.

다 왔다. 같이.

지수 밥 먹음.

전화 안 받음. 다시 할 것.

바다. 당신 손 차가움. 내 주머니에 같이.

집에 가면 된장찌개.

날짜가 없는 장이 하나 있었다.

오늘 빵 당신이 큰 거 줌. 치즈는 싫다.

그 뒤 장에는 이름 네 개가 세로로 적혀 있었다. 맨 위가 정희였다. 그 아래로 내 이름과 지은, 지수가 있었다.

지은은 마지막 장을 넘겼다. 엽서 크기의 누런 자국이 나왔다. 딸은 그 자리에 손바닥을 얹었다가 공책을 덮었다. 다 읽은 뒤에도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이 창틀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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