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리핀 계절근로자… 두바이·오만 거쳐 화암 토마토 비닐하우스에서 구슬땀
고된 하루 끝 가족과 영상통화가 큰 힘…“내년에도 정선에 오고 싶어요”
“5년 뒤에는 요리사가 될래요”…타국의 노동으로 여물어가는 소박한 꿈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는 한여름, 정선군 화암면의 한 토마토 농장.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휘감는다.
가만히 서 있어도 땀이 흐르는 그곳에서 크리스티나(32·필리핀·사진)는 붉게 익어가는 토마토를 살피며 쉼 없이 손을 움직인다.
잘 익은 열매를 골라 따고, 크기와 상태에 따라 선별해 상자에 가지런히 담는다.
같은 필리핀에서 온 리안(35), 마일린(45)도 곁에서 일한다. 하루가 저물면 세 사람은 함께 숙소로 돌아간다. 낯선 나라에서 일터와 생활을 나누는 이들은 서로에게 작은 그늘이 돼주고 있다.
지난 5월 계절근로자로 정선을 찾은 크리스티나에게 올여름은 녹록지 않다.
뜨거운 비닐하우스에서 토마토를 따고 농작물을 돌보는 일은 날마다 체력을 시험한다. 잠시 허리를 펴고 숨을 고를 때면 고국에 있는 남편과 아들, 딸이 떠오른다. 그리움은 마음을 무겁게 하지만,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도 가족에게서 온다.
크리스티나가 먼 한국까지 온 이유 역시 가족이다.
남편과 두 자녀를 필리핀에 남겨둔 채 낯선 땅으로 향하는 선택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흘린 땀이 가족의 내일을 조금씩 바꿀 수 있다고 믿기에 그녀는 다시 토마토 상자를 들어 올린다.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한국에 왔어요. 일이 힘들지만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정말 좋아요.”
필리핀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새로운 희망이 됐다.
타국 생활은 처음이 아니다. 한국에 오기 전 두바이와 오만에서도 일했다. 여러 나라에서 노동과 타향살이를 경험한 그녀는 보수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한국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정선의 생활도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말과 음식, 생활방식이 달랐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곳은 돈만 벌다 떠나는 일터를 넘어섰다.
가족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소중한 시간이 됐다.
하루 중 가장 기다려지는 순간은 일이 끝난 뒤 가족과 영상통화를 할 때다. 숙소로 돌아오면 무엇보다 먼저 고국에 전화를 건다. 작은 화면에 떠오른 남편과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날 있었던 일을 하나씩 들려준다.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웃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비닐하우스에서 쌓인 피로도 잠시 자취를 감춘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작은 화면 안에서 가족은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 그 시간은 하루를 견뎌낸 보상이자, 이튿날 다시 일터로 향하게 하는 힘이다.
<크리스티나에게는 계절근로자로 같은 필리핀에서 온 동료들이 있어 큰 힘이 된다. 하루가 저물면 동료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간다.
낯선 나라에서 일터와 생활을 나누는 이들은 서로에게 작은 그늘이 돼주고 있다.>
크리스티나의 꿈은 소박하고 단단하다.
가족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살아가도록 돕고, 자녀들에게 더 넓은 기회를 열어주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꿈도 품고 있다. 타국에서 부지런히 돈을 모아 5년 뒤에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 지금 토마토를 고르고 상자에 담는 두 손으로 언젠가는 자신만의 음식을 만들겠다는 소망이다.
수확이 끝나면 크리스티나는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정선과의 인연을 이번 한 철로 끝내고 싶지는 않다.
“내년에도 다시 오고 싶어요. 올해 경험을 살려 정선에서 또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크리스티나와 같은 외국인 계절근로자는 이제 정선 농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농촌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일손을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외국인 계절근로자의 규모도 해마다 커지고 있다.
정선군이 외국인 계절근로자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2023년에는 227명이 농촌 현장에 투입됐다.
이듬해인 2024년에는 498명으로 두 배 넘게 늘었고, 2025년에는 528명으로 확대됐다. 군은 2026년 역대 최대 규모인 690명을 도입할 계획을 세웠다.
올해 정선에서는 라오스와 필리핀에서 온 외국인 계절근로자 537명이 농촌 곳곳에서 주로 고추와 고랭지채소 등의 농작업에 종사하며 부족한 일손을 채우고 있다.
화암면 토마토 농장에서 땀 흘리는 크리스티나와 동료들도 그 537명 가운데 일부다.
숫자는 해마다 늘었지만 그 안에는 저마다의 이름과 가족, 고향에 두고 온 삶이 있다. 농촌에는 꼭 필요한 일손이지만, 바다 건너온 이들에게 정선에서의 하루는 가족의 내일을 바꾸기 위해 견뎌내는 삶의 시간이기도 하다.
농장주 최종진 씨도 이들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모두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게 일한다”며 “내년에도 다시 초청해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화암의 토마토가 붉게 익어가는 여름, 농장에서는 크리스티나와 동료들의 손길이 분주히 이어진다.
그들의 노동은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채우는 데 머물지 않는다.
바다 건너 가족의 삶을 일으키고 자녀의 내일을 넓히며,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간절한 걸음이다.
오늘도 크리스티나는 잘 익은 토마토를 골라 정성스럽게 상자에 담는다.
차곡차곡 쌓이는 상자마다 화암의 여름이 담기고, 가족을 향한 그리움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꿈도 함께 여문다. 권동균기자 imfre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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