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탄마을서 해발 1,028m 정상까지 암릉 산행
발아래 굽이치는 동강, 가수리·귤암리·백운산 한눈에
닭이봉은 늘 눈앞에 있었다.
이름도 친근하고 고개만 들면 보이는 산이지만, 동강을 끼고 솟은 험준한 바위산이라 좀처럼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서울에서 내려온 ‘숲 친구’ 허홍기(62) 회장이 산행에 힘을 보태기로 하면서 마침내 닭이봉으로 향했다.
지도에는 계봉(鷄峰·1,028m)으로 표기돼 있지만, 지역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닭이봉 또는 달구봉이라고 불러왔다.
이름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진다. 먼 옛날 큰 홍수가 나 천지가 물에 잠겼을 때 닭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겨우 앉을 수 있었던 두 봉우리만 물 위에 남았다고 한다. 그곳이 닭이봉과 곰봉(1,016m)이다. 닭이봉은 닭의 볏처럼 크고 작은 바위 봉우리가 날카롭게 솟았고, 곰봉은 웅크린 곰의 등처럼 넓고 완만한 모습이다.
백두대간 함백산(1,562m)에서 갈라진 산줄기는 두위봉(1,470m)을 지나 죽렴지맥으로 이어진다. 국도 38호선 마차재를 넘으면 왼쪽으로 곰봉이 우뚝하고, 그 북쪽에 닭이봉이 솟아 있다. 능선은 가수리 수미마을 앞까지 길게 뻗어 동강의 동쪽 수계를 이룬다.
배롱나무 붉은 꽃길 지나 숲으로
산행은 가탄마을 동강변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했다. 가탄은 아름다운 여울을 품은 마을이다. 늦가을이면 물 건너 유지마을을 잇는 섶다리가 놓여 많은 사람이 찾는다.
붉은 꽃을 피운 배롱나무 가로수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왼쪽 시멘트길 끝 두릅나무 농장에서 계곡을 건넌 뒤 무덤 뒤편 소나무 숲으로 발을 들였다. 그곳부터 본격적인 산행이었다.
첫 봉우리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다. 힘겹게 능선에 오르자 잠시 하늘이 열렸지만, 안부를 지나자 다시 오르막이 앞을 막았다. 숲길 곳곳에는 버섯이 고개를 내밀었고 너구리의 것으로 보이는 배설물도 자주 눈에 띄었다.
큰 봉우리에 이르자 북쪽을 향해 놓인 의자 두 개가 나타났다. 의자 아래로 동강이 굽이쳐 흘렀다. 그러나 남쪽에는 닭이봉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거친 암릉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상 120m’와 ‘닭이봉 650m’
동강 쪽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곧장 능선을 탈 수 없어 동쪽 사면을 비스듬히 내려갔다. 나무와 산딸기 군락을 헤치며 깊은 골짜기로 향했다. 안부에는 가래나무 열매가 바닥을 가득 덮고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이정표를 만났다. ‘정상 120m’, ‘닭이봉 650m’라고 적힌 팻말 옆에 긴 의자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정상’은 우리가 내려온 998.5m 봉우리를 뜻하는 듯했다. 정작 목적지인 닭이봉까지는 아직 650m가 남아 있었다.
<동강에서 본 닭이봉 전경.>
거리만 보면 짧았지만 길은 만만하지 않았다. 닭의 볏처럼 솟은 크고 작은 암봉을 여러 차례 오르내려야 했다. 불과 650m의 능선이 이날 산행에서 가장 길고 힘겨운 구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정상 능선에 올라서자 숲에 가려졌던 시야가 한꺼번에 열렸다. 발아래 가탄마을이 내려다보이고, 동강 상류로 가수리와 북대가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만지산(716m) 아래에는 귤암리가 자리했고, 하류 쪽으로는 수동마을 뒤 백운산(883m)까지 산줄기가 이어졌다.
암봉 너머 펼쳐진 동강의 속살
닭이봉 정상에 ‘닭이봉 1,028m 다솔산악회’라고 적힌 표지판을 달았다. 정상 표지판 뒤로 지나온 암봉들이 닭의 볏처럼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힘겹게 건너온 여정의 훈장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상에 오른 기쁨도 잠시였다. 시간은 이미 오후 5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해발 1,028m 정상에서 해발 300m 안팎의 동강변까지 급격히 고도를 낮춰야 했다. 서둘러 남쪽 사면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정상 120m’, ‘닭이봉 650m’ 팻말이 가래나무 옆에 있다.>
능선 끝에서 폐무덤을 발견했을 때 산길이 거의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암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밧줄에 몸을 의지해 세 차례나 암벽을 내려서고 나서야 가까스로 위험 구간을 벗어났다. 마지막에는 야생동물의 농작물 피해를 막기 위해 설치한 철망이 길을 가로막았다.
여름 해가 긴 덕분에 오후 8시를 넘겨서야 어둠 속에서 산행을 마칠 수 있었다. 동강 동쪽 수계를 따라 남아 있던 가장 어려운 숙제 하나를 끝낸 기분이었다.
가까이 있지만 쉽게 오를 수 없었던 산, 부드러운 이름과 달리 날카로운 바위 능선을 품은 산.
닭이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동강의 깊은 물굽이는 긴 산행 끝에 받은 선물이었다. 무엇보다 모두 무사히 산을 내려온 것이 고마웠다. 글·사진=이수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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