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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 보다 더 오지 거칠현에 스스로 유배온 고려 충신 7명'

  • 김광희 기자
  • 입력 2026.03.14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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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개국에 ‘不事二君’ 선언 백이산 자락 머물며 세상과 단절

불의의 세상서 충절 지키겠다 나물 캐먹으며 처절한 저항

 

어린 왕 단종(1441~1457)의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이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이 영화를 본 관람객 상당수는 청령포를 강원도 최고의 유배지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새롭게 나라를 세웠을 때 영월보다 더 오지인 정선으로 자발적인 유배(?)를 온 7명의 고려 선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말선초 격동기 지조의 상징 청맹(青盲) 

청맹정신.jpg

 

조선시대 선비.jpg

<고려와 조선시대 선비들은 충절을 지키기 위해 눈을 뜨고 있으면서 장님 행세를 하는 '청맹'의 삶을 살았다.>

 

14세기 말 여말선초(麗末鮮初) 극심한 정치적 혼란기였다.

한국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 중 하나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공민왕, 이제현, 이곡, 이색, 신돈, 우왕, 이인임, 최영, 정몽주,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정도전, 조준, 신덕왕후, 이지란, 조영규, 조영무 등은 이 격동기를 살다 간 사람들이다.

동시대를 살았지만 그들의 시대 인식은 제각각이었다.

누구는 개국 공신이 되었고, 누구는 적이 되어 싸웠다.

 

역사는 백성 모두의 행복이 뿌리내리는 대지가 아니다.

피가 뿌려진 세상이며 날 세운 칼처럼 사납다.

선비에게 불의가 지배하는 세상은 암흑이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장님 행세를 하는 사람을 청맹(靑盲)이라고 한다.

청맹은 세상과 등지며 충절을 지키겠다는 선비 정신의 처절한 자기방어 수단이다.

위중한 병을 낫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斷指)단지와 같다.

역사서에는 여말 이성계의 득세에 대한 저항으로 청맹을 택했다는 선비들의 기록이 나온다.


조선 개국초에 불의를 피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숨어 지낸 72명의 청맹이 있었다

새 왕조에 출사하기를 거부하고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며 청맹이라는 행위를 통해 저항했다.

이들은 충직한 신하는 결코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선택했다.

세상과 등지고 사라진 것이다.

그들이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숨어 들어간 곳은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광덕면(光德面) 서쪽 산기슭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두문불출하며 망국(亡國)의 한을 삭였다.

집에만 틀어박혀 바깥출입을 하지 않는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의 어원이 바로 두문동이다.

하지만 조선 개국 공신들은 이들 유신들을 대상으로 회유와 협박을 하며 출사할 것을 종용했다.

이성계 일파의 회유가 집요해지자 이들 중 다수는 조정(朝廷)에 중용됐다.

 

그러나 일부는 다시 조선 개국 공신들의 회유를 피해 바람처럼, 물처럼 흩어졌다.

이 가운데 7명이 물결을 따라 흘러들어가 숨어든 곳은 오지 중의 오지인 정선 땅이다.

정선으로 온 7()은 전오륜(全五倫), 김충한(金仲漢), 고천우(高天祐), 이수생(李遂生), 신안(申晏), 변귀수(邊貴壽), 김위(金瑋) 등이다

그들은 이웃 여주의 목은 이색이나 원주의 원천석과 같은 이들과 교류하며 회한을 나눴다.

 

7현은 출세 대신 은둔을 택한 선비들이다.

 

()가 아닌 것에는 눈길도 보내지 말고, 예가 아닌 말은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닌 말은 입에 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마라.’

 

칠현사 전경.jpg

 <칠현사 전경>

 

거칠현동.jpg

<거칠현동을 알리는 표지석>

 

후손 칠현사 제례.jpg

<7현 제례> 

 

7현은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어록을 엮은 경전인 논어에 나온 글처럼 세상과 담을 쌓으며 청빈하게 살았다.

후세 사람들이 이름을 지은 거칠현동(居七賢洞)에 머물렀다.

거칠현동은 정선읍에서 40여 리쯤 남쪽 쇄재 너머 백이산(白夷山)과 서운산(瑞雲山아래에 있다.

정선군민은 칠현(七賢)들이 보여준 높은 애국충절(愛國忠節)의 뜻을 기리고자 칠현사(七賢祠)를 건립해 위 일곱 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10월 초 정선아리랑제에 맞춰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또 그들의 이름을 새긴 칠현비(七賢碑)를 세웠다.

두문동에서 피해 온 7현의 고려 유신을 기리기 위해 1985년 6월 정선 조양회에서 세운 비석이다.

 

높다란 기단 위에 세워진 팔각형 비석의 한 면에는 고려 유신 칠현비(高麗遺臣七賢碑)라고 새겨져 있다다른 7면에는 7현들의 한시가 한 편씩 새겨져 있다.

 

경백이산 전.jpg

<백이산 전경>

 

거칠현동의 앞산 백이산은 첩첩산중에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가파르다.

백이산은 동강의 상류를 이루는 동남천 언저리에 솟구쳐 있다.

오랜 옛날 홍수로 인해서 온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겨 버렸다

하지만 백이산 꼭대기만이 감투만큼 물 위에 솟았다

이곳이 감투봉이다

홍수가 빠진 뒤에 정상에 가보니 뱃조각이 걸려 있어 배이산 또는 백이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남면 낙동리 · 광덕리 · 유평리를 품고 있다.

 

이 산은 정선에서도 때 묻지 않은 원시 그대로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는 오지 속의 산이다.

3월 중순이지만 산 높고 골 깊은 백이산 일대는 아직도 겨울이다. 

최근 내린 눈으로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시간은 고려에서도, 조선에서도, 현대에서도 이어져 흐른다. 

눈이 녹으면, 백이산 맑은 숲은 겨우내 품은 신령스러운 영기(靈氣)를 뿜어낸다.

 

7현은 나무로 엮은 움막에 살면서 곧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매일 아침 관복을 옛 궁궐 쪽에 걸어 놓았다.

외출할 때는 항상 패랭이를 눌러쓰고 다녔다.

나라를 잃은 죄인이 어찌 해를 보겠느냐는 이유다.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은 채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은 중국의 백이숙제(伯夷叔齊) 고사(故事)처럼 서운산(瑞雲山)과 백이산이 내주는 고사리와 산나물을 캐 먹으며 살았다.

 

전오륜은 매월 보름이면 조복을 입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서 송도 쪽을 바라보고 통곡했다. 마음이 진정되면 직접 지은 시를 읊었다.

 

정선으로 가져온 관복 몸에 걸치고(東來朝服在臣身)

송도를 바라보니 구슬프기만 하네(遙望松京淚滿巾)

당나라 우나라 세상 멀어지니 내 어디 가리요(唐虞世遠吾安適)

서산을 향해 머리 들어 세상과 인연 끊었네(矯首西山繼絶塵)


이 시는 개성의 남동쪽에 있던 광덕산 부조현에서 조복(朝服)을 벗어던지고 두문동으로 들어가 머물던 상황을 그리고 있다.

 

정선아리랑, 불사이군 충성 다짐하는 비통의 망국가

 

7현은 항상 죽음을 이웃에 놓고 살았다.

하루하루 작두에 올라탄 사람과 같았다.

그들이 선택한 궁핍은 언제 죽을지 모를 칼날 위의 삶을 선사했다.

하지만 당시 선비들은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곤궁하고 위험해도 직설적인 표현보다 은유적인 표현을 즐겼다.

본인의 처지를 은유적인 시로 표현을 못 하면 선비로서 실격이었다.

이들 선비가 쓴 저항적인 시를 야시(野詩)라 통칭했다.

7현은 홀씨처럼 흩날리는 외롭고 고달픈 산중생활의 절절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읊었다.

고려 왕조에 대한 흠모와 두고 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로 녹아냈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명사십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 피며

모춘 3월이 아니라면 두견새는 왜 우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선아리랑은 지난날 고려 왕조를 섬기고 벼슬하던 충신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짐하던 비통한 한시가 그 출발점이다

한편으로는 망국가다

7현이 지은 한시를 지역 주민이 쉽게 이해를 못 하자 풀이하여 지은 것이 오늘날의 정선아리랑이다

정선아리랑은 산비탈을 일구며 고달프게 살아가는 백성들 사이에 수백년을 이어 구전되며 강원도를 대표하는 토속 민요가 됐다.

 

전오륜 선조의 고향 정선으로 7현을 이끌다

 

7현이 정선 땅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전오륜과의 인연 때문으로 여겨진다.

정선은 전오륜 선조의 고향 땅이다.

전오륜은 고려 말에 우상시(右常侍)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는 본향을 달리하는 18파 모든 전()씨의 시조인 백제 개국 공신 전섭()의 후손이다.

신라 내물왕 때 백제 대광공주를 배행하고 신라에 들어가 정선군(旌善君)으로 봉해진 전선()의 후손으로, 정선전씨의 파시조가 됐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 전오륜 때문에 정선전씨 후손들은 조선시대 600년 동안 크게 출세를 못 했다.

선조 때 횡성 현감을 지낸 전방경(全方慶)이 가장 큰 인물일 정도였다.

전오륜은 거칠현동에서 30년가량 머물다가 말년에 경남 합천의 아들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합천은 그가 군수를 지냈고, 아들 전맹겸(全孟謙) 또한 군수를 지냈던 고을이다.

전오륜은 합천에 묻혔다.

그러나 묘지가 합천댐 수몰지가 되면서 1986년 거칠현동 서운산 자락으로 다시 옮겨졌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정선전씨 가운데서도 역사를 수놓은 인물이 있다.

녹두장군으로 이름이 높았던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정선전씨에서 분관된 천안 전씨(시조 전락) 사람이다.

그는 조선 말(철종) 전라북도 태인(泰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역시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되었다

30여세에 동학에 입교해 고부 접주가 되었다가,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학정에 대항해 관아를 습격, 강탈당했던 세곡을 털어 농민에게 배분했다.

 

그 후 조정에서 파견된 안핵사 이용태 등이 또다시 동학교도들을 체포 살해하자,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걸고 봉기하고 정읍, 고창, 무장을 장악한 뒤 전주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우수한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다,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대패했다.

이후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에 교수형을 당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나오는 민요는 녹두장군인 전봉준을 기린 노래로 알려졌다.

 

630년 만에 귀향한 칠현의 후손들

 

칠현 후손 정선 귀향 프로젝트 칠현사 제례.jpg<고려 유신 칠현이 2022년 6월 27일 630년 만에 정선 땅에 다시 모였다.>

 

정선아리랑문화재단은 지난 2022년 6월 27~28 정선아리랑 근원 설화에 나오는 고려 유신 칠현(七賢)의 후손을 630년 만에 초청해 정선 방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행사는 전국 각지로 흩어져 있는 칠현의 후손들을 찾아 다시 정선을 방문하는 ‘630년 만의 귀향 프로젝트였다.

정선아리랑문화재단은 이 행사를 위해 2년간 전국적으로 칠현의 문중을 수소문해 후손을 찾았다

그 결과 김위를 제외한 여섯 문중의 후손을 찾아내 뜻깊은 자리를 만들었다.

이 당시 정선을 다시 찾은 칠현 후손 40명은 칠현사를 방문, 조상에 대한 제례를 지내고 정선아리랑과 관련된 유적지를 탐방하는 등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전주열 전 정선군의원은 “7현은 고려말 불사이군의 정신으로 조선 건국에 대항해 평생 충절을 지킨 고려의 마지막 남은 애국 충신들이라며 잃어버린 고려 왕조를 회상하며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한시로, 율창(律唱)으로 읊던 가사가 정선아리랑의 기원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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