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수리부터 단풍이 내려오더니만 이제는 산 아래까지 홈빡 물들어 하루가 다르게 짙어만 가고 있습니다.
1년 열두 달, 6개월이 겨울이고 6개월이 사계절인 이곳 함백산은 단풍이 드는구나 하면, 이미 하나 둘 낙엽으로 털고 가는 짧은 가을의 모습이랍니다.
인적 드문 숲길에서 코트 깃을 세우고 바람 없이도 마구 떨어져 내리는 단풍 비를 맞아가며 아주 천천히 거닐면서 땅 위에서 바스락 거리는 잎 새들 영혼의 소리도 들어보고,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을 읊조리기도 하면서 숲 속에 푹 빠져 봄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엊그제 아가들 젖니 같은 새순으로 태어나 잎 새되고 꽃을 피우고 봄여름 가을 따가운 햇살을 몸으로 받아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초록의 산색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을 맑게 헹구어 주더니, 이제 그 따가운 햇살로 화상 입었던 상처들을 오색의 단풍으로 보여주면서, 가지에 달려 있다 보면 나무도 함께 죽는다는 것을 아는 잎 새들은, 서둘러 떨어져서 추운겨울 나무들의 발목을 덮어 주고, 자신의 마른 영혼을 쥐여 짜서 나무들의 젖줄이 되어주는, 저 헌신적의 사랑의 아름다움, 그래 그 아름다운 사랑의 힘으로 나무들은 다음 해 낙엽 진 빈자리에 잎 새를 달고 꽃을 피우게 되나 봅니다.
저는 여름만 되면 이번 가을에도 단풍 비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서 클레식기타를 뜯으며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을 읊조릴 수 있겠다 하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렌답니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옛날은 남는 것/여름날의 호수가 가을에 공원/ 그 벤 취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명동 선술집에서 이 시를 쓰고는 며칠 후 31살로 세상을 떠난 박인환 시인, 그는 아마도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가로 따라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글을 남기는 사람들이지요.
입동절(立冬節)
머리털이 쏘-옥 빠질 것 같던 불볕더위도
절기를 따라 슬그머니 물러가시고
아침저녁 쌀쌀한 늦가을로 접어드니
잎 새라는 잎 새들은
형형색색 단풍으로 오색찬연 하더니만
누가 떠나라 했는지
입동 절에 단풍비로 쏟아져 내리고
내리는 만큼씩 나무는 야위고
야위는 만큼씩 겨울은 다가선다.
가지에서 땅, 이승과 저승의 거리를
잎 새들은
바람 한 점 없이도 서둘러 떨어져
어디론간 훌훌 떠나버림이
가지와 잎 새에겐
아픔일까 평화일까
살붙이 잎 새들을 모두 보내고 나면
나무들은 겨울나기에 더욱 수척해지겠지
단풍으로 일어서서
낙엽으로 털고 가는
짧은 계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