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에 입추가 지나니 시골집 담장이나 처마 밑에 봉숭아 빨간 꽃들이 절반은 져서 바닥에 떨어지고 절반을 꽃대에 달려서 혼자 있기도 하고 몇 몇이 옹기종기 모여 있기도 합니다. 팔월 한 달 정도 꽃을 피우고 지는 봉선화,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가사와 가락이 일제치하 식민지 시대 우리 민족의 한을 노래했으니 구슬프고 처량하지요. 그래 지금도 봉숭아 꽃을 볼 때면 왠지 처량하고 쓸쓸하게 느껴진답니다. 그리고 정태춘·박은옥 부부가 부른 ‘봉숭아’ 역시 애절하지요. -손톱 끝에 봉숭아 빨개도 몇 밤만 지나면 질 터인데 손가락마다 무명실 매어주던 곱디고운 내 님은 어딜 갔나.- 가사와 곡조, 박은옥씨 특유의 맑은 음성과 감성이 더욱 애잔함과 쓸쓸함을 느끼게 하지요.
우리 내자(집사람)는 손톱에 매니큐어는 안 바르면서 봉숭아꽃이 필 때면 봉숭아 물 들여 달라고 손을 내민답니다. 그래 봉숭아꽃이 필 때면 손톱에 물들여 주는 게 연중행사가 되었지요.
활짝 폈다가 땅에 막 떨어진 꽃잎 새들을 백반을 넣고 빻아서 저녁에 열 손가락 하나하나에 올리고 랩으로 싸서 무명실로 묶어주었다 다음날 풀고는 다시 한 번 더 들여, 두 번을 들여 주면 손톱 위 예쁜 봉숭아물이 한 겨울이 되도록 지워지지 않는답니다. 내자가 그러는데 “첫 눈이 올 때까지 지워지지 않으면 첫사랑을 이루게 된다고들 하드라면서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가 먼저 떠나고 나면 남은 사람은 봉선화 꽃 필 때면 더 욱 생각이 나겠네요.”하는데 가슴이 짠해지면서, 아 저 사람이 봉선화에 대한 추억을 더욱 각인시키려 해마다 물들여 달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해 살 이 풀로 여름 한 달 꽃을 피웠다가 지고 마는 여리고 여린 꽃 잎 새인데 사랑이 얼마나 깊고 너르기에 돌 같이 단단한 우리네 손톱에 자신의 색깔을 몽땅 물들여 주고 는 가는 것일까요?
봉숭아꽃 물들인 그 사람의 손톱을 볼 때마다 육십 생을 살아 온 저도 어느 누군가에게 내 생의 색깔을 몽땅 물들여 주고 떠나고 싶은 그런 생각이 문득 문득 든답니다.
닮고 싶은 꿈을 간절히 갈구하며 오래 간직하다 보면 언젠가 그 꿈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하니 행여나 하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봉숭아꽃 물들이다
깊어진 한여름
활짝 핀 봉숭아 꽃 잎 새로 집사람 손톱에
봉숭아 물 들여 주다.
백반과 함께 빻은 꽃 잎 새를 손톱 위에 올리고
랩으로 싸서 무명실로 묶어준다.
해마다 봉숭아 꽃 필 때면 물들여 달라며
어린아이처럼 손을 내민다.
메니큐어가 많은데도
봉숭아 만 한 색깔이 없어서일까
해마다 물들여 주는 서방님의
애뜻한 마음씨를 확인하고 싶어서 일까
아님
저승에 가서도 봉숭아 물들여 주던 서방님을
지우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일까
봉숭 물 들여 주다 보니 내 손끝에도 붉게 물들었다.
지우지 말고 그냥 두어야지
물들은 손을 보며 집사람 마음씨라도
기억하고 싶어서다.
오늘 저녁 또 한 번 물 들여 줘야하니
내 손에도 홈 빡 하니 물들여 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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