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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던 마을의 어둠 위로, 다시 사람들의 불빛이 켜졌다"

  • 김광희 기자
  • 입력 2026.03.25 07:14
  • 댓글 0
  • 글자크기설정

  • "농어촌 기본소득 한 달, 정선의 삶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선군에 농어촌 기본소득이 지급된지 한 달이 넘었. 달라진 정선주민 삶의 풍경과 이주민의 모습을 짧은 단편소설로 기록해 본다.

 

  산이 조금씩 움직였다

 

 정선의 겨울은 길고 깊었다.

 봄은 늘 늦었다.

 산은 도시보다 한 계절쯤 뒤에야 겨우 숨을 고르듯 깨어났다.

 사람의 발길은 드물었고, 집들은 온기를 잃은 채 비어 있었다.

 해가 지면 마을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멀리서 보이는 몇 개의 불빛마저, 바람에 흔들리듯 위태로웠다.

 

 “이 집도나갔네.”

 

 노인의 말은 늘 같았다.

 사람은 떠나고, 집은 비고, 결국 산만 남았다.

 이 마을의 시간은 언제나 비어가는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였다.

 낯선 차들이 하나둘 마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가용, 버스, 그리고 낯선 얼굴들.

 작은 가방 하나 들고, 길을 확인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여기맞아요?”

 

 그들이 묻고, 노인은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정선이야.”

 

 처음엔 이상했다.

 

 “왜 여기로 오지

 

 사람들은 낮게 수군거렸다그러다 어느 순간, 이유를 알게 됐다.

 

 “그거 때문이래.”

 

 “?”

 

 “기본소득.”

 

 그 말이 퍼지자, 마을의 공기가 아주 조금, 하지만 분명하게 달라졌다.

 가장 먼저 변한 건 우편함이었다텅 비어 있던 우편함마다 편지와 고지서, 이름이 적힌 봉투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다시 들어온 삶의 흔적이었다.

 그다음은 장바구니였다마트 안에서 사람들은 예전보다 오래 머물렀다.

 

 “이거넣어도 되나

 

 망설이던 손끝이 조금씩 용기를 냈다. 삼겹살 한 팩, 달걀 한 판, 두부 한 모그리고 가끔은 사과 몇 개까지.

 그리고 아이들의 소리가 돌아왔다.

 

 “! 기다려!”

 

 “같이 가!”

 

 한동안 사라졌던 발소리가 산골길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학교 앞에는 지나가는 자전거가 늘었고, 골목에는 웃음이 흘렀다.

 하지만 가장 늦게 변한 건 사람들의 밝은 표정이었다.

 노인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그러다 어느 날, 지나가던 이웃에게 말했다.

 

 “요즘은 좀 낫네.”

 

 “뭐가요?”

 

 “사람 사는 것 같아.”

 

 그 말은 작았지만정선 전체를 설명하기엔 충분했다물론 모든 것이 좋아진 건 아니었다.

 

 “이거 계속 주는 거 맞아?”

 

 “나중에 끊기면 어떡해

 

 불안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낯섦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외지 사람이 2천 명 넘게 왔다는데

 

 “정선이, 정선이 아닌 게 되는 거 아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에 하나의 감각이 생겨났다.

 ‘그래도 버틸 수 있다는 느낌.

 어느 저녁, 마을회관에 불이 켜졌다전에는 장례식이 아니면 모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거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도 목소리를 내야죠.”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다그때,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울에서 왔는데요.”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여기서계속 살고 싶습니다.”

 

 노인이 그녀를 한참 바라봤다그리고 말했다.

 

 “그럼 같이 살아야지.”

 

 그 말은 짧았지만, 이 마을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 같았다그날 이후, 마을은 조금씩, 아주 천천히, 변해갔다.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고, 길은 여전히 좁았고,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졌다

 아침에 문을 열 때오늘은 조금 낫겠지”. 밤에 불을 끌 때내일은 더 괜찮을 수 있겠지”.

 그 작은 생각들이 쌓이며 삶은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노인은 산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산은 그대로인데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덧붙였다.

 

 “사람이 움직였네.”

 

 맞는 말이었다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삶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변화는 크지도, 빠르지도 않았지만분명히 시작되고 있었다.

 

  할머니의 만 원짜리 웃음

 

 아침 해가 산등성이를 넘어올 때쯤, 할머니는 이미 깨어 있었다

 정선의 아침은 느렸다. 그리고 조용했다.

 

 “오늘이 그날인가

 

 할머니는 중얼거리며 장롱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며칠째 소중히 간직한 명함 크기의 카드가 있었다

 은행에서 받은 농어촌 기본소득 카드였다. 손바닥으로 몇 번을 쓸었다.

 할머니는 천천히 마을로 내려갔다. 버스는 하루 몇 번 안 다녔다

 그래서 놓치면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 이 와와버스도 무료였잖아!”

 

 버스를 타면서 생각해 보니 그동안 정선에 살면서 당연시 되어왔던 것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나이가 들어도 멋지고 깔끔하게 살 권리가 있다며 목욕비와 머리를 자르는 것도 지원해 주잖아.”

 

 할머니에게 오늘 산골 공기는 어느때보다 달고 맑았다.

 

 “어르신, 읍내 가세요?”

 

 운전기사가 물었다.

 

 “, 오늘 좀 볼 게 있고 살게 있어.”

 

 버스에 앉아 창밖을 보는데, 마음이 괜히 들떠 있었다

 읍내 은행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동안, 할머니는 통장을 계속 들여다봤다.

 

 “정말 들어 있을까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었다.

 

 “42번 손님.”

 

  할머니는 천천히 일어났다창구 앞에 앉아 통장을 내밀었다.

 

 “이거돈이 들어왔는지 좀 봐줘요.”

 

 직원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짧은 시간. 그리고

 

 “, 어르신. 15만 원 들어왔습니다.”

 

할머니의 눈이 커졌다.

 

 “얼마요?”

 

 “15만 원입니다. 앞으로 매달 들어올거예요. ”

 

 그 순간, 할머니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

 

 “진짜네.”

 

1면 톱사진-정선메일전병축제5.jpg

 <할머니에게 농어촌 기본소득이 지급된 후 정선아리랑시장은 더욱 친근한 곳이 됐다.>

 

 그녀는 작게 웃었다

 은행을 나오자, 햇볕이 더 따뜻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곧장 정선아리랑시장으로 향했다.

 

 “아이고, 어르신 오셨어요!”

 

 가게 주인이 반겼다.

 

 “오늘은 뭐 사세요?”

 

 할머니는 잠시 망설였다그리고 말했다.

 

 “달걀 한 판 줘.”

 

 주인은 웃었다.

 

 “오랜만이네.”

 

 할머니도 웃었다.

 

 “, 오늘은 좀된다.”

 

 그녀는 달걀을 사고, 두부도 사고 그리고, 잠깐 멈췄다

 과일 가게 앞이었다. 사과가 빨갛게 쌓여 있었다.

 

 “이건비싸겠지

 

 손이 갔다가 멈췄다. 그러다 다시 말한다.

 

 “만 원어치만 줘.”

 

 봉지를 들고나오는 길. 할머니는 계속 중얼거렸다.

 

 “달걀도 사고사과도 사고

 

 그 말이 반복됐다. 집에 돌아와서,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건을 내려놨다

 그리고 사과 하나를 꺼냈다

 칼로 천천히 깎았다

 껍질이 지금의 행복처럼 길게 이어졌다.

 

 “이거얼마 만이냐

 

 작게 자른 사과를 입에 넣었다. 달았다. 그녀의 눈이 살짝 젖었다. 문이 열렸다.

 

 “할머니!”

 

 옆집 아이가 뛰어 들어왔다.

 

 “?”

 

 “엄마가 김치 줬어!”

 

 아이 손에는 작은 통이 들려 있었다. 할머니는 웃었다.

 

 “그래? 잘 왔다.”

 

 그녀는 사과를 접시에 담았다.

 

 “이거 먹어라.”

 

 아이가 눈을 반짝였다.

 

 “!”

 

 둘이 마루에 앉아 사과를 먹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할머니는 그걸 가만히 바라봤다그리고 생각했다.

 

 “이 돈이사람을 살게 하는구나

 

 해가 지고 있었다. 할머니는 카드와 통장을 다시 꺼냈다

 통장의 숫자를 한 번 더 봤다15만 원. 그녀는 손으로 그 숫자를 짚었다.

 

 “고맙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몰랐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돈이 단순한 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밖에서는 바람이 불었다

 정선의 밤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그 집 안에는 작은 웃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만 원짜리 몇 장이 만든, 조용한 행복이 있었다.

 

 장바구니의 무게

 

 아침 6.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이 떠졌다

 정선의 아침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가끔은 불안할 정도였다.

 

 “오늘 뭐 먹이지

 

 미영은 천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옆에서는 아이 둘이 아직 자고 있었다. 남편은 이미 나갔다.

 

 “일거리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쌀통을 열었다. 손을 넣어보니, 바닥이 가까웠다.

 

 “며칠 안 남았네.”

 

 냉장고를 열었다. 김치, 달걀 세 개, 먹다 남은 두부 반 모. 그게 전부였다.

 

 “오늘은계란국이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계산하고 있었다

 남편의 월급은 쥐꼬리만 하고, 아이들 학용품은 계속 필요하고, 각종 공과금은 밀려 있었다

 그때 탁자 위에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가족 수대로 받은 농어촌 기본소득 카드 4개였다. 미영은 그걸 가만히 바라봤다.

 

 “오늘 들어오지

 

 그녀는 핸드폰을 들었다

 은행 앱. 로딩이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가족들의 통장 잔액이 바뀌었다+600,000. 

 

 “됐다.”

 

 그녀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갑자기 한숨이 나왔다. 

 버틸 수 있다는 안도의 숨이었다

 그날, 점심 무렵 그녀는 장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의 생각은 계속 돌아갔다.

 

 “쌀은 꼭 사야 하고

 

 “달걀도 사고

 

 “아이들 우유도

 

 하지만 다 살 수는 없다.” 그게 늘 문제였다마트 안. 바구니에 하나씩 담았다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삼겹살, 상추, 마늘, 10kg, 달걀 한 판, 두부, 우유 두 개

 그리고 멈췄다. 과자 판매대. 아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초콜릿 과자가 보였다.

 

 “이건 나중에

 

 손이 갔다가 다시 멈췄다

 그때 그녀는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통장 잔액을 다시 확인했다잠시 생각. 그리고 과자 두 개를 바구니에 넣었다.

 

 “오늘은 괜찮아.”

 

 그녀는 작게 웃었다. 계산대.

 

 “86,400원입니다.”

 

 카드를 내밀면서도, 손이 약간 떨렸다. 하지만 결제는 빨랐다

 오류 메시지도, 부족하다는 표시도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 햇볕이 따뜻했다

 그녀는 장바구니를 들고 한참 서 있었다.

 

 “다 샀네

 

 그 말이 입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자, 아이들이 뛰어나왔다.

 

 “엄마!”

 

 “과자 샀어?”

 

 그녀는 웃었다.

 

 “, 하나씩만.”

 

 아이들이 환호했다. 그 소리가 집 안을 채웠다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 계란국, 두부, 김치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삼겹살과 소주. 남편이 말했다.

 

 “오늘 뭐 좋은 일 있어?”

 

 미영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은 그냥, 좀 괜찮았어.”

 

 남편은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더 묻지 않았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밤. 아이들이 자고 난 뒤. 미영은 혼자 앉아 있었다

 가계부를 펼쳤다숫자를 적었다. 수입, 지출 남은 돈, 그리고 마지막에 다음 달”. 

 그녀는 펜을 멈췄다예전에는 이 칸이 항상 비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은 수입과 지출을 예상할 수 있는 삶그게 생겼다.

 그녀는 창밖을 봤다

 산은 어둡고, 마을은 조용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예전보다 덜 흔들렸다.

 

 “버틸 수 있겠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기본소득은 기대한 만큼의 삶을 바꾸지 않았다

 부자가 되게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게 하는 버팀목이 돼줬다

 그리고 그건, 이 집에 사는 네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었다.

 

  두 번째 삶, 그리고 한 표

 

 버스는 산길을 천천히 휘돌아 올라갔다

 굽이마다 창밖 풍경이 달라졌다

 낮게 깔린 구름, 아직 녹지 않은 눈 자국, 그리고 군데군데 드러난 검붉은 흙

 영수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손에 쥔 건 낡은 가방 하나

 그 안에는 옷 몇 벌과 서류, 그리고 서울에서의 마지막 흔적들이 들어 있었다.

 

 “다음 정류장

 

 스피커에서 기계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창밖을 다시 봤다

 

 여기가 정선군.

 

 생각을 이어갈 사이도 없이 버스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3월인데도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서울의 공기와는 달랐다. 더 맑고, 어딘가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다시 시작하는 거야.”

 

 영수는 작게 중얼거렸다

 서울에서 삶은 단순했다

 아침 6시 기상, 지하철 1시간, 회사 8시간, 퇴근 후 술. 그리고 반복. 

 서울의 공기는 늘 숨이 가쁠만큼 꽉차 있었다. 

 그는 그렇게 20년을 살았다. 남들처럼 결혼도 못 했고, 집도 없었고, 남은 건 한숨뿐이었다

 어느 날, 뉴스에서 봤다.

 

 “농어촌 기본소득

 

 월 15만 원. 사람들은 웃었다.

 

 “그걸로 뭐 하냐.”

 

 하지만 영수는 달랐다

 시골에서 주는 그 돈은 단순한 금액이 아니었다.

 

 “적어도… 정선에서는 숨은 쉴 수 있겠지.”

 

 그렇게 그는 정선에 내려왔다

 처음 며칠은 어색했다

 여량면의 아침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서울에서는 소음이 곧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여기서는 아무 소리도 안 나네”. 

 그는 햇빛을 쬐기 위해 집 앞 평상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며칠 뒤, 옆집 노인이 말을 걸었다.

 

 “서울서 왔다고?”

 

 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노인은 한참 그를 보더니 웃었다.

 

 “요즘 여기 아우라지에도 그런 사람이 많아.”

 

 “많아요?”

 

 “그래. 요즘 여긴정선에서도 깊은 산골인데 사람이 늘어. 마을 초등학교에는 올해 신입생만 6명이나 들어왔다고 해.”

 

 그 말은 점점 현실이 되었다

 마트에 가면 낯선 얼굴들이 보였다.

 

 “어디서 오셨어요?”

 

 “수원요.”

 

 “인천요.”

 

 사람들은 비슷한 이유로 왔다.

 

 “여긴 좀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영수는 점점 깨달았다

 이곳은 사라지는 마을이 아니라 다시 채워지는 곳이었다

 한 번은 고한읍으로 놀러 갔다. 사람이 많았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이 지역에서는 분명 북적이는 수준이었다.

마트 점원이 말했다.

 

 “요즘 여기 고한에도 사람이 늘었어요.”

 

 “왜요?”

 

 “강원랜드 쪽도 있고, 기본소득 때문에 오는 사람도 있고

 

 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저녁, 여량면 작은 술집.

 

 “형님도 이주했어요?”

 

 옆자리의 젋은 남자가 말을 걸었다.

 

 “.”

 

 “나도요. 수도권에서.”

 

 그는 웃으며 소주를 따랐다.

 

 “여긴 요즘 선거철이라 정치 얘기 많아요.”

 

 영수는 웃었다.

 

 “서울보다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여긴한 표가 더 무겁거든요.”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며칠 뒤, 마을 사람들과 한잔했다.

 

 “기본소득 유지해야지!”

 

 “아니, 일자리도 있어야지!”

 

 “주택부터 해결해야 한다니까!”

 

 사람들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술이 술술 들어가자,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풀어냈다. 

 영수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듣기만 했다

 여기서는 마을 사람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나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는 깨달았다

 여긴 이념이 아니라 먹고사는 문제로 이야기를 하고 소리를 높이는 곳이라는 걸

 누군가 말했다.

 

 “이번엔 이주민 표가 많다며?”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2천 명 넘는다던데?”

 

 “!”

 

 영수의 손이 멈췄다.

 

 ‘내 한 표가이곳에서는 그렇게 소중한 것인가?’

 

 서울에서는 그의 한 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형님, 누굴 찍을 거예요?”  

 그 질문이 날아왔다

 영수는 대답하지 못했다그날 밤. 집 앞 야외 평상. 산은 어둡고, 하늘은 깊었다.

 

 “나는왜 여기 왔지.”

 

 평상에 앉아 있다 보니 문득 근본적인 생각이 들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도시의 삶이 그를 너무 지치게 했다. 그의 생각은 늘 무거웠다. 그래서 살려고. 도망치듯 내려왔다. 

 그래서 이곳에서 더 살고 싶었다

 그러면 선택도 간단해야 했다.

 

 63일 투표 날. 사람들이 투표소에 줄을 섰다

 노인도, 젊은 사람도, 그리고 자신처럼 이주민들도. 그 대열에 섰다. 

 영수는 투표용지를 받아 들었다.

 손이 잠시 멈췄다

 서울의 기억이 스쳤다

 지하철, 소음,

 그리고 지금

 조용한 산, 맑은 공기, 그리고 다시 시작된 삶

 그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표를 찍었다

 밖으로 나오자, 초여름 더위를 품은 바람이 훅 들어왔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기서죽을 때까지 잘 살아보자.”

 

 계절은 여름으로 가고 있지만 정선의 봄은, 그에게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었다

 투표를 했고, 결과에 영향을 줬고,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는 평상에 앉아 있었다

 옆집 노인이 다가왔다.

 

 “어때, 살 만해?”

 

 영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좀, 사는 것 같아요.”

 

 노인이 웃었다.

 

 “그럼 된 거지.”

 

아우라지.jpg

 <정선 여량면 아우라지 풍경>

 

 바람이 불었다. 멀리서 공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새 건물, 새 사람들, 새 이야기들. 영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긴아직도 바뀌고 있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한 표가 그 변화 속에 있었다는 걸

 정선의 봄은 끝난 게 아니었다.

 

 천 원짜리 약속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창문을 본다

 정선의 하늘은 전에 살던 서울이랑 다르게 더 크게 보인다

 엄마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부엌에서 달그락 소리가 난다.

  

 “일어났어?”

 

 “

 

 나는 이불에서 나와서 부엌으로 갔다.

 

 “오늘 뭐 먹어?”

 

 “계란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실요즘은 메뉴가 거의 똑같다계란국김치그래도 괜찮다.

 엄마가 웃으니까.

 학교 가는 길친구들이랑 같이 걸어간다.

 

 “너 어제 그거 받았어?”

 

 민수가 물었다.

 

 “?”

 

 “그거 있잖아, 기본소득.”

 

 나는 잠깐 생각했다.

 

 “… 기본소득?”

 

 “우리 엄마 어제 통장 봤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들어왔다고 했어.”

 

민수가 웃었다.

 

나 이번에 치킨 먹을 거야!”

 

 나는 웃으면서도 아무 말도 안 했다나는 치킨 생각보다 엄마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집에 돌아왔을 때엄마는 장바구니를 정리하고 있었다.

 

왔어?”

 

.”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물었다.

 

엄마오늘 돈 들어왔어?”

 

 엄마가 잠깐 멈췄다그리고 웃었다.

 

 “.”

 

 그 웃음은 평소보다 조금 더 컸다나는 냉장고를 열어봤다우유가 여러 개 있었다.

 

?”

 

나는 웃었다.

 

엄마우유 6개다!”

 

오늘은 많이 샀어.”

 

 우유를 물먹듯 하는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저녁엄마가 말했다.

 

 “오늘은 좀 특별하게 먹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라면 끓일까?”

 

 나는 소리 질렀다.

 

 “진짜?!”

 

  냄비에서 김이 올라왔다나는 그걸 계속 보고 있었다라면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그 냄새는 이상하게 괜찮다는 느낌이 났다밥을 먹다가나는 물었다.

 

 “엄마.”

 

 “?”

 

 “그 돈… 계속 나와?”

 

 엄마는 잠깐 생각했다.

 

 “아마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 정선에서 계속 살 수 있어?”

 

 엄마의 손이 멈췄다조용해졌다나는 괜히 젓가락을 만지작거렸다엄마가 말했다.

 

 “.”

 

 나는 그 말을 굳게 믿었다나는 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밖은 조용했다.

 서울에서는 항상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는데여긴 아무 소리도 없다

 그래서 생각이 잘 들린다.

 나는 오늘을 떠올렸다우유라면엄마 웃음그리고 생각했다.

 

 “오늘은 엄마 웃음을 보니 너무 좋았어.”

 

 다음 날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

 

 “나 용돈 조금만 줘.”

 

 엄마가 웃었다.

 

 “?”

 

 나는 잠깐 고민했다그리고 말했다.

 

 “천 원만.”

 

 엄마는 천 원을 줬다나는 그걸 꼭 쥐고 학교에 갔다

 학교 앞 편의점나는 잠깐 서 있었다

 과자도 있고장난감도 있었다하지만 나는 바나나우유 하나를 샀다그리고 집에 돌아왔다.

 

 “엄마.”

 

 “?”

 

 나는 바나나우유를 내밀었다.

 

 “이거같이 먹자.”

 

 엄마가 나를 봤다그리고 웃었다이번에는 조금 다르게나는 그 웃음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건 우리 거다.”

 

 정선의 하늘은 여전히 컸고우리 집은 여전히 작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살 수 있다는 걸그리고 그건 천 원짜리보다 조금 더 큰 약속 같았다.

 

 같은 돈다른 삶

 

 아침 공기가 아직 차가웠다

 정선의 봄은 늦게 왔다

 산은 여전히 갈색과 회색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지갑에서 농어촌 기본소득 카드를 꺼냈다.

 월 15만 원누군가에겐 커피 몇 잔 값일지 몰라도그에게는 살아도 된다는 신호 같은 돈이었다.

 

 “이번 달도들어왔겠지.”

 

 그날 오후마을 앞 큰 평상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분위기가 예전과 달랐다.

 

 “2년 후엔 없어질 수도 있다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전국으로 확대하면 했지.”

 

 “근데 왜 그런 얘기가 나와

 

 목소리는 낮았지만걱정의 깊이는 더 깊었다영수가 앉자옆 사람이 속삭였다.

 

 “기본소득 줄이면… 우리같이 이곳 정선에 살려고 내려온 사람들은 어떻게 되죠?”

 

 뒤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

 

 “도시에 사는 내 사촌은 도시민과 농촌주민의 형평성 때문에 기본소득이 없어질 것이라는데그렇게 생각하던데.”

 

 사람들이 돌아봤다그는 이곳 토박이였다.

 

 “무슨 뜻이에요?”

 

 그가 말했다.

 

 “우린 원래 이렇게 살았어.” 

 

 모인 사람들의 침묵이 이어졌다.

 

 “기본소득 없을 때도그냥 농사짓고그냥 버티고

 

 그의 말은 느렸지만단단했다.

 

 “근데 요즘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돈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아.”

 

 그 말이 공기를 갈랐다이주민 쪽에서 누군가 말했다.

 

 “그럼… 우리가 잘못 왔다는 거예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건 아니지.”

 

 “그럼요?”

 

 “그냥… 사는 방식이 다른 거지.”

 

 그날 밤영수는 집 앞에 앉아 있었다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는 생각했다.

 정선 사람들에게 기본소득은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동안 없어도 살아왔다 고 말한 것이 머릿속을 떠나지 안핬다.

 며칠 뒤면 지역 한 마트영수는 일부러 갔다.

 

 “서울서 왔다고?”

 

 같은마을 한 노인이 물었다.

 

 “.”

 

 “여긴 왜 왔어?”

 

 영수는 잠시 망설였다.

 

 “살려고요.”

 

 노인이 웃었다.

 

 “근데 말이야

 

 “.”

 

 “2년 후에 농어촌 기본소득 그 돈 없어지면 힘들겠지?”

 

 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요.”

 

 노인은 한참 그를 봤다그리고 말했다.

 

 “그럼 지켜야지.”

 

 “?”

 

 “지켜야지그거.”

 

영수는 놀랐다.

 

 “반대하시는 줄 알았는데

 

 노인이 웃었다.

 

 “우리도 돈이 싫은 게 아니야.”

 

 목소리가 부드럽게 느껴졌다그는 숨을 들이켰다.

 

이걸 같이 지키는 방법을 찾고 싶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그게 맞지이곳은 같이 살려고 남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니까.”

 

 그날 밤영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긴… 사람들이 다 착하네.”

 

그리고 작게 웃었다

바람이 불었다

정선의 봄은 여전히 흐르고그 안의 사람들은 조금씩같이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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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어느덧 서른 신동읍민의 날 행사> 

 

여섯 사람의 봄

  

 버스가 덜컹이며 멈춰 섰을 때가장 먼저 땅을 밟은 건 작은 운동화를 신은 아이였다.

 

 “여기가 정선이야?”

 

 아이는 아직 상황을 다 이해하지 못한 채, 한겨울의 낯선 공기와 조용한 풍경 속에서 본능적으로 아버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남자는 그 작은 손의 온기를 느끼며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이곳이 정말 도착한 곳인지아니면 또 하나의 버텨야 할 시작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잠시 뒤, 그는 아이의 손을 더 꼭 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야.”

 

 그 짧은 대답 속에는 포기하지 않으려는 다짐과,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된 지난 시간그리고 이제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정선군그들의 새로운 집이었다.

 짐은 많지 않았다며칠 전, 이삿짐 트럭을 타고 먼저 내려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거의 다 정리해버렸기 때문이다.

 버리고 또 버리면서그는 스스로에게 계속 물었다이게 정말 끝인가, 아니면 시작인가.’

 하지만 끝내 버리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얇은 서류봉투 하나.

 그 안에는 서울에서의 마지막이 담겨 있었다경매 통지서.’

 그 종이 한 장이 그가 살아온 시간과, 지켜내지 못한 것들을 모두 증명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다시 꺼내보지 않으려고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아빠, 여기 너무 추워

 

 둘째가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아이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놓치면 안 되는 것처럼.

 

 “조금만 참자.”

 

 그의 말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스스로를 향한 주문도 함께 들어 있었다.

 여섯 식구였다. 남자와 아내, 그리고 네 아이열두 살, 아홉 살, 여섯 살, 세 살. 서울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월세는 계속 올랐고, 일은 점점 줄어들었고, 빚은 쌓여만 갔다.

 결국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떠나는 것.

 

 “여기 가면기본소득 나온대. 일자리도찾아보면 있다고 하더라.”

 

 그는 그 말 하나를 붙잡고 내려왔다.

 

 희망이라기보다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든 마지막 끈에 가까웠다신동읍의 집을 처음 봤을 때, 아내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벽지는 군데군데 찢겨 있었고, 바닥은 발끝으로도 차가움이 느껴질 만큼 식어 있었다.

 삶의 흔적은 있었지만, 온기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서계속 살아야 해?”

 

 아내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분명히 떨리고 있었다남자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청소하고, 도배 조금 하면괜찮아질 거야.”

 

 그 말은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에 더 가까웠다.

 그날 밤, 아이들은 금세 잠들었다낯선 곳에서도 아이들은 금방 적응했다하지만 어른 둘은 쉽게 눈을 붙이지 못했다.

 

 “여기서진짜 잘 살 수 있을까?”

 

 아내가 조용히 물었다.

 

 “시골은텃세 심하다고 하던데

 

 남자는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가능성과 불안을 지나보낸 뒤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긴외지인도 많이 이사 오는 곳이라더라. 그래서괜찮을 거야.”

 

 잠시 숨을 고르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기본소득도 나오고아이들이 농촌으로 전학 오면 교육부 지원도 있고한 달에그래도 버틸 만큼은 돼.”

 

 그리고 숫자를 꺼냈다.

 

 “여섯 명이면한 달에 90만 원.”

 

 아내의 눈이 흔들렸다. 그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삶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상태가 더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여섯 명이니까

 

 “.”

 

 그 숫자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처음으로 생긴 ‘0이 아닌 미래였다밖에서는 바람이 불었다.

 시골의 겨울 밤은 여전히 차가웠고, 세상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집 안에는 여섯 사람이 있었다그리고, 버티고 싶은 이유도 함께 있었다.

 남자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번엔진짜 잘 살아보자.”

 

 그 말은 누구에게 들려주기 위한 말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에게 건네는 약속이었다

 정선의 봄은 아직 멀었다. 하지만, 이들 여섯 사람에게는 아주 작고 느리지만, 분명한 계절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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