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는 사람들 (정선총쇄록(旌善叢瑣錄) 7편)

제16부― 오횡묵, 감영의 경고를 받다
조만식은 억울했다.
군수의 손가락은 광부들의 빚이 적힌 줄에서만 멎었다.
자신이 곡식 상인에게 진 빚, 연장을 들여오며 맡긴 돈, 금을 팔기도 전에 치러야 하는 이자는 묻지 않았다.
금이 나온다고 골짜기에 곡식까지 나는 것은 아니었다.
쌀 한 섬을 들이려면 곡식값에 산길을 넘는 품삯을 얹고, 비에 젖어 못 먹게 된 몫까지 떠안아야 했다.
갱목과 쇠붙이에도 돈이 들었다. 굴에서는 돌만 쏟아지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런데 군수 앞에 앉고 보니 자신이 받아야 할 돈은 모두 광부들의 피를 짠 값처럼 보였다.
조만식은 무릎 위의 손을 움켜쥐었다.
“나리께서 제 장부만 파헤치지 마시고, 다른 불법부당한 곳도 보시지요.”
말이 너무 빨리 나갔다.
그는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군수에게 대든 말이 고여구(高汝九)의 귀에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방의 말이 어느 길로 새는지 알지 못했다.
펼쳐진 장부에는 광부들의 품삯에서 뺀 곡식값과 연장값이 적혀 있었다. 오횡묵의 손가락은 다쳐 쉬는 동안 먹은 것까지 빚으로 올린 줄에 놓여 있었다.
“다른 곳의 잘못이 네 장부를 바로잡아주지는 않는다.”
“제 셈을 보지 마시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선의 금점을 다 보시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댄 돈도, 광부가 일한 몫도 살필 것이다.”
조만식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의 빚에는 약조한 날부터 이자가 붙었다. 광부들의 품삯은 금을 팔 때까지 미뤄두었다. 두 장부를 나란히 놓으면 그 사이에 자신이 기대어 살아온 틈이 드러날 터였다.
호방이 몸을 세웠으나 오횡묵이 손을 들어 막았다.
며칠째 이어진 봄비가 처마를 두드렸다. 조만식이 벗어놓은 짚신에서는 흙탕물이 빠져나왔다. 마당의 사령은 괭이로 막힌 물길을 터주었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담 밑을 파고들어 대청 아래까지 번졌다.
“어디를 말하느냐?”
조만식은 괭이질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
“싸내 좌사(坐沙)와 화표(華表)입니다. 고여구가 금을 캐는 곳 말입니다.”
호방의 손이 장부 위에서 멎었다.
그 작은 멈춤에 조만식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름을 입 밖에 내기 전까지는 되돌릴 수 있었다.
“고여구가 누구냐?”
“금이 난다는 곳에 돈을 대고 사람을 모아 금점을 여는 자입니다. 평양에서 왔다고도 하고 청국에서 건너왔다고도 합니다. 제 입으로는 고구려의 후손이라 하더군요.”
“이 고을에 들어온 지는?”
“제가 금점을 열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만 압니다.”
오횡묵은 호방을 돌아보았다.
그도 고여구가 묵는 집과 금을 거두는 사람은 알았으나, 언제 어디서 들어왔는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조만식은 품에서 작은 보자기를 꺼냈다. 몇 번이나 접었다 편 종이가 들어 있었다. 곡식을 대던 상인이 보낸 것이었다. 밀린 돈을 갚기 전에는 더 내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약조한 날이 지났느냐?”
“아직 아닙니다. 금을 거두면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왜 끊었느냐?”
조만식은 종이의 접힌 자리를 눌렀다.
“제 금점 사람이 좌사로 갔습니다. 빌려준 곡식값을 셈하고 가라 했더니 고여구의 사람이 찾아와 그만두라 하더군요. 제 돈이니 제가 받겠다 했습니다.”
“그 뒤에는?”
“이튿날부터 곡식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종이에는 빚진 액수와 상인의 이름만 있었다.
“그가 시켰다는 증거가 있느냐?”
“없습니다. 상인도 밀린 돈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군수가 종이를 돌려주고 나가라 하면, 그는 내일 다시 그 상인의 문 앞에 서야 했다.
“다른 곳에서 구하지 못했느냐?”
“다른 장에서 사왔습니다. 곡식값에 나르는 품삯까지 얹혔습니다. 비가 오면 지게꾼도 더 달라 했고요.”
“그 돈을 광부들의 곡식값에 더했느냐?”
조만식은 입술을 다물었다.
빗물이 처마 끝에서 줄을 이루어 떨어졌다.
“죽도 묽어졌겠구나.”
“곡식을 아껴야 했습니다.”
그는 무릎 위에서 손을 비볐다.
“사람들이 그릇을 비우고도 일어나지 않더군요.”
바닥까지 훑은 그릇들이 떠올랐다. 광부들은 더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조만식도 더 줄 것이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솥뚜껑을 덮자 그제야 하나둘 일어났다.
오횡묵은 장부와 상인이 보낸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고여구가 두려우냐?”
조만식은 대청 밖을 보았다.
“나리께서는 그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저는 내일도 그 사람에게 곡식을 대는 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오횡묵은 호방에게 좌사와 화표의 문서를 가져오게 했다.
보고에는 고여구가 관아에서 채광 허락을 확인받지 않은 채 금광을 열었다고 적혀 있었다. 단속하는 사람이 가면 붉은 도장이 찍힌 종이를 꺼내며 감영에서 허락한 일이라고 했다.
“그 종이를 읽어본 자가 있느냐?”
호방이 고개를 숙였다.
조만식이 말했다.
“읽으라고 펼치는 종이가 아닙니다. 꺼내 보이면 사람들이 물러섰습니다.”
오횡묵은 보고서의 관문(關文)이라는 글자를 짚었다.
“금을 캐도 좋다는 허락인지, 다른 일로 받은 공문인지 내용을 보아야 한다.”
“전에 계시던 나리께서도 감영에 물으셨습니다.”
“답은?”
“기다리는 동안 체임(遞任)되셨습니다.”
뒤의 보고도 다르지 않았다. 감영에 물어야 한다며 처분을 늦추었고, 군수가 바뀌면 문서는 다시 묶였다.
종이를 묶은 끈에는 먼지가 앉아 있었다. 그동안 좌사와 화표에서는 모래를 씻고 돌을 부쉈다. 금을 담는 주머니는 채워졌다가 비워졌으나, 관아에는 같은 물음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자들은 누구냐?”
“정선 사람들입니다. 농사로 겨울을 못 난 사람들이 모래를 씻고 흙을 나릅니다.”
“품삯은?”
“곡식이나 돈으로 받습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조만식이 몸을 조금 숙였다.
“고여구는 그 사람들 앞에서도 말합니다. 금을 누가 쓰는 줄 아느냐고요.”
“누가 쓴다더냐?”
“그것까지 묻지는 못했습니다.”
오횡묵은 그 말을 따로 적고 상인의 종이를 당겼다.
“이것은 두고 가라.”
조만식의 손이 따라 움직였다가 멎었다.
고여구의 사람이 자신을 부르면 무엇이라 답해야 할까. 군수에게 보였다고 하면 곡식만 끊기고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네가 가져왔다고 먼저 밝히지는 않겠다. 다만 내가 묻기 시작하면 짐작할 수도 있다.”
조만식은 종이를 오래 바라보다가 손을 거두었다.
대청을 내려설 때 짚신 끈이 좀처럼 매이지 않았다. 젖은 끈이 손가락 사이에서 미끄러졌다. 두 번 풀린 매듭을 다시 묶고서야 일어섰다.
그날 밤 오횡묵은 고여구를 부르는 문서를 쓰게 했다.
채광을 시작한 때와 허락받은 경위를 밝히고, 감영의 공문을 가져오라는 내용이었다. 감영에도 허락 여부를 물었다.
문서를 다 쓰기 전에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사령이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고여구가 보냈다 합니다.”
보자기 속 편지에는 새 군수의 노고를 위로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좌사와 화표의 일로 심려가 크시다 들었습니다.
소환 문서는 아직 책상 위에 있었다. 마르지 않은 먹 곁에서 등잔불이 흔들렸다.
오횡묵이 눈을 들자 호방의 손이 종이에서 내려갔다.
“가져온 자를 들여보내라.”
사내가 젖은 옷자락을 끌며 들어와 엎드렸다. 누구에게 이 방의 말을 들었느냐고 물어도 전하라는 것만 가져왔다고 했다.
오횡묵은 작은 꾸러미를 열지 않았다.
“그대로 가져가라. 심려를 덜어주려거든 사람 대신 공문을 보내라 전해라.”
사내가 물러난 뒤 문틈 아래에 젖은 발자국이 남았다.
“문서를 마저 써라.”
이튿날 소환 문서가 싸내로 떠났지만 고여구는 오지 않았다. 몸이 불편하다며 일을 맡아보는 자를 보냈다. 공문은 고여구가 가지고 있어 가져오지 못했다고 했다.
“금을 거두는 장부는 네가 맡느냐?”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그 장부를 가져오너라. 고여구의 몸이 낫기를 기다릴 일은 아니다.”
오횡묵은 별도로 사람을 보내 광부들을 만나게 했다.
물가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모래를 씻고 있었다. 산그늘에서 내려온 물은 아직 겨울의 찬기를 품고 있었다. 걷어 올린 팔이 물속을 드나들 때마다 붉어졌다. 손가락이 굽지 않아 바가지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는 사람도 있었다.
모래 사이에 남은 작은 금 알갱이는 다른 자가 거두어갔다.
광부들은 하루가 끝나면 곡식이나 돈을 받았다. 곡식은 집으로, 돈은 곡식 가게로 가져갔다. 금을 얼마나 거두었으며 어디로 보내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관아에서 나간 사람이 이름을 적자 몇은 바가지를 건져 자리를 떴다.
“누구를 벌하려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온 자가 말했다.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내일부터 일을 못 하게 되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오횡묵은 이름들을 보았다.
호적에서 읽었던 이름도 있었다. 논밭이 적고 식구가 많았던 집이었다. 품삯이 끊긴 뒤 저녁에 비게 될 그릇들이 떠올랐다.
“관아로 부르지 마라. 내가 가서 듣겠다.”
“고여구의 사람들이 먼저 알게 될 것입니다.”
“한꺼번에 세워놓고 묻지는 않겠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도 알아두어라.”
며칠 뒤 원주감영(原州監營)에서 사람이 왔다.
도포 아래쪽은 빗물과 진흙에 젖어 있었다. 사내는 문서를 건네고 호방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좌사와 화표의 일은 감영에서 별도로 살피고 있으니 고을에서 거듭 조사하지 말라는 답이었다.
채광을 허락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허락받았다면 공문을 보여주면 될 일인데, 어째서 묻지 말라는 답만 보내오?”
사내가 문 쪽을 살피고 목소리를 낮췄다.
“금광 하나의 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른 체하시는 편이 낫습니다.”
오횡묵은 문서를 사내 앞으로 돌려놓았다.
“이 고을 사람들이 이 고을 물에서 금을 캐고 있소. 허락한 일이면 그 내용을 보내시오.”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종친 댁의 이름까지 고을 장부에 올리시면 일이 커집니다.”
“나는 아직 누구의 이름도 올리지 않았소. 그대가 먼저 종친을 말했소.”
사내는 젖은 소매를 접었다. 손끝이 옷감을 몇 번 눌렀다.
“금광에 들어간 돈이 한 사람의 돈이겠습니까. 장부 한 권을 거두시면,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고을 안에만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말은 잠시 끊은 뒤 뒷말을 이었다.
“감영의 지시를 거슬렀다는 말이 올라가면 다른 일까지 들춰질 수 있습니다.”
오횡묵은 문서 끝의 인장을 내려다보았다.
“내 벼슬을 말하는 것이오?”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전하께서는 금광 개발에 실효를 거두라 당부하셨소. 누가 얼마를 캐며 어디로 보내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아뢰겠소.”
“이대로 따르시는 것이 나리께도 좋습니다.”
오횡묵은 종이를 제 앞으로 가져왔다.
벼슬을 잃으면 이 방을 떠나야 했다. 대청 아래 엎드렸던 사람들은 남을 것이었다. 고여구의 사람들도 남아 곡식 상인을 만나고 광부들의 품삯을 셈할 터였다.
그는 벼루에 붓끝을 눌렀다.
“감영의 뜻은 받았소. 내 답도 가져가시오.”
채광을 허락한 공문의 내용을 보내달라고 적었다. 고여구에게 장부를 내도록 했으며, 채광 실태를 직접 살피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내는 붓이 움직이는 동안 말이 없었다. 종이를 밀어놓자 읽지 않고 두 손으로 받았다.
“후회하지 않으셔야 할 것입니다.”
오횡묵은 붓을 내려놓았다.
“지금 그 말도 감영의 뜻이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돌아간 뒤 오횡묵은 호방에게 감영의 문서와 자신이 보낸 답을 함께 베껴 남기게 했다.
호방은 먹을 갈다가 멈췄다.
“나리, 이렇게 하시면…….”

오횡묵은 기다렸다.
호방은 끝내 붓을 들었다. 털끝이 종이에 닿자 가느다란 마찰음이 났다.
창밖에서는 봄비가 가늘어지고 있었다. 산허리의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담 밖에서 누군가 짚신의 진흙을 돌에 문질렀다. 몇 번 긁는 소리가 나다가 멎었다.
오횡묵은 광부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따로 밀어놓았다.
“이름은 따로 보관해라.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채광소에 알리지 마라. 장부를 내라는 명을 핑계로 품삯부터 붙들지 못하게 하고.”
그는 조만식이 가져온 종이를 당겼다.
“이 상인도 불러라. 약조한 날 전에 곡식을 끊은 까닭을 직접 듣겠다.”
저녁상이 들어왔을 때도 문서는 펼쳐져 있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가 국그릇을 놓다가 손가락을 움츠렸다. 뜨거운 국물이 갈라진 손등에 닿은 모양이었다. 여자는 소매로 손을 감추고 물러갔다.
국에서 오른 김이 광부들의 이름 곁으로 흘렀다.
오횡묵은 종이를 옆으로 옮겼다.
상을 물리자 호방이 들어왔다.
“여러 날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관기 하나를 들여 수청을 맡기시면 어떻겠사옵니까.”
“내가 부르라 했느냐?”
호방이 고개를 숙였다.
“이미 마루 끝에 와 있습니다.”
문을 열자 여자가 기둥 곁에 서 있었다. 젖은 치마가 종아리에 감겼고, 기운 버선 아래 마루가 둥글게 젖어 있었다. 여자는 발을 바꾸어 디디다가 멈췄다.
“언제부터 기다렸느냐?”
“상을 들이기 전부터였습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수청은 들지 않아도 된다. 비가 그칠 때까지 안에서 쉬었다 가거라.”
여자가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허리를 굽혔다.
오횡묵은 호방을 돌아보았다.
“앞으로 내 말 없이 부르지 마라.”
여자가 물러난 뒤 오횡묵은 감영에서 온 문서를 다시 펼쳤다.
거듭 조사하지 말라는 글 아래 붉은 인장이 찍혀 있었다. 원주에서 온 사내는 다른 일까지 들춰질 수 있다고 했다. 굶는 집에 곡식을 풀어준 일도, 거두지 못한 세금도 따져 물으면 그가 답해야 했다. 벼슬을 내놓으라는 말이 뒤따를 수도 있었다.
오횡묵은 문서를 내려놓고 마루로 나갔다.
봄비가 처마를 두드렸다. 낮에는 가늘던 빗줄기가 어둠이 내리자 굵어졌다. 지붕의 기왓골마다 물이 쏟아졌고, 마당에 고인 물 위로 빗방울이 희게 튀었다. 사령이 파놓은 도랑에서는 흙탕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담 밑으로 빠져나갔다.
산에서 내려온 바람은 아직 찼다. 젖은 도포 자락이 정강이에 달라붙었다.
그는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빗물이 손등의 주름을 따라 흘러 손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잠깐 내놓았는데도 손끝이 시렸다. 광부들은 이런 물에 아침부터 손을 담그고 있었다. 손가락이 굽지 않아 바가지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던 사람의 이름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뒤에서 호방이 불렀다.
“나리, 밤바람이 찹니다.”
오횡묵은 손을 거두었다.
“장부를 가져오라는 명은 그대로 두어라.”
호방은 곧 대답하지 않았다. 처마 끝에서 쏟아진 물이 마루 아래 돌을 때렸다.
“감영에서 다시 사람이 오면 어찌합니까?”
“내가 만나겠다.”
호방이 물러난 뒤에도 그는 잠시 서 있었다. 바람이 빗줄기를 처마 안으로 밀어 넣었다. 뺨에 찬물이 닿고 등 뒤의 방문이 덜컹거렸다.
오횡묵은 문이 더 흔들리지 않도록 손으로 붙들고 방에 들어섰다.
등잔불이 길게 누웠다가 바로 섰다. 그는 젖은 손을 마른 수건에 닦고 감영에 보낼 문서를 당겼다.
채광 실태를 직접 살피겠다는 마지막 줄은 그대로였다.
그 아래에 자기 이름을 썼다.
먹이 마르는 동안, 처마에서는 빗물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BEST 뉴스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①] 그릇 하나가 깨지고 아내가 무너졌다
※ 이 작품은 현실의 여러 사회적 문제에서 모티프를 얻어 창작한 소설입니다. 등장인물과 지명, 단체, 구체적인 사건 및 전개는 허구이며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재현한 것이 아닙니다. 아내에게 아침 약을 먹이던 중,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⑦] 당신도 살아
그날 저녁 딸에게 전화했다. “엄마가 기계로 말했어. 요양원에 보내달라고.” 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상태가 더 안 좋아졌어요?” “안 좋아진 건 오래됐지.” “아빠가 힘들어서 그러는 거예요?” 나는 그 말에 화가 났다. 딸이 나를 탓한 것도 아닌데 찔린 사람이 먼저 상처...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⑥] 기다리던 자리가 두려웠다
재활병원 언어치료사가 의사소통기기를 한번 써보라며 빌려준 것은 그 무렵이었다. 아내는 말을 알아듣고 글자도 읽을 수 있었다. 다만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입 밖으로 온전히 밀어내지 못했다. 언어치료사는 작은 태블릿을 거치대에 고정하...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⑧] 돌아오는 차에는 아내가 없었다
입소를 사흘 앞둔 날 아이들을 불렀다. 사위도 며느리도 손주들도 데려오지 말고, 이번에는 우리 네 식구만 밥을 먹자고 했다. 딸은 생크림 케이크와 어머니가 좋아하던 포도를 사왔다. 아들은 닭고기와 숯, 식당에서 쓰던 것과 닮은 낡은 석쇠를 가져왔다. 딸은 평상 ...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⑤] 아내를 씻기고 나는 늙어갔다
병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내가 침대에서 일어나 변기까지 가는 데 처음에는 십 분이 걸렸고, 나중에는 삼십 분이 걸렸다. 어느 겨울 새벽, 아내를 화장실로 옮기다 둘이 함께 넘어졌다. 아내의 몸이 내 가슴 위로 무너졌고, 허리를 찌르는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 -
[연재소설|사십팔 킬로그램의 이별 ③] 아내가 제 몸 안에 갇혔다
아내가 쓰러진 것은 오월의 점심 장사가 끝날 무렵이었다. 아내가 쉰네 살 되던 해였다. 마지막 손님이 나간 뒤 나는 계산대에 앉아 잔돈을 세고 있었다. 주방에서는 물 흐르는 소리와 접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날마다 듣던 소리였다. 그릇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