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기록에 남지 않은 사람들 (정선총쇄록(旌善叢瑣錄) 6편)

제15부 ― 일곱 해 전 장부의 진실
오횡묵은 갱도 입구에 섰다.
햇빛은 그의 등에서 끝났다. 굴 안에서는 젖은 갱목을 타고 물이 떨어졌다. 어둠 깊은 곳에서 망치가 울렸고, 쇠가 멎는 사이마다 돌을 끄는 소리와 사람의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소년티를 갓 벗은 청년 하나가 광석을 지고 나왔다.
낮은 굴을 빠져나오느라 허리를 꺾은 그는 햇빛 아래서도 곧장 몸을 펴지 못했다.
흰 석영 덩어리가 지게 위에 쌓여 있었다. 돌 모서리가 걸음마다 맞부딪혔고, 어깨를 파고든 끈 아래로 저고리가 검붉게 젖어 있었다.
광군들이 관복을 보고 짐을 내려놓았다. 젖은 땅에 돌이 쏟아지며 물방울이 튀었다. 사람들이 엎드리는 동안 청년은 지게를 벗고 한쪽 무릎을 짚었다. 어깨에 붙은 천을 떼어내자 입술이 굳었다.
오횡묵은 그가 고개를 숙이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이름이 무엇이냐?”
“변무진입니다.”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볼은 움푹 팼다. 눈썹에 내려앉은 돌가루가 얼굴을 늙혀놓았으나, 관복을 바라보는 눈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 오기 전에는 무슨 일을 했느냐?”
“아우라지에서 배를 저었습니다. 뗏목이 내려오는 철에는 나무를 묶어 한강까지 탔습니다.”
오횡묵의 눈길이 그의 손으로 내려갔다. 굳은살 사이에 밧줄이 훑고 간 자국이 길었다. 갈라진 살에는 돌가루가 박혀 있었다.
“돌아올 때도 배를 탔느냐?”
“걸었습니다. 먹고 자는 값을 치르면 남는 것이 적어도, 집에 가져갈 몫은 알았습니다.”
무진은 발치의 지게 끈을 보았다.
“지난해 장마에 배가 깨졌습니다. 떠내려온 통나무에 부딪혔습니다. 빌린 곡식값부터 갚으려고 들어왔습니다. 사흘만 일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밥값과 연장값을 제하니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흘째 발목을 다쳤고, 쉬는 동안 먹은 것도 빚에 올랐습니다.”
“나가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갚고 나가라 했습니다.”
굴 안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뒤따라 나오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갱목 틈으로 흙이 흘렀다.
“살아서 나오면 내일 또 들어갑니다. 죽으면 집에서 갚아야 한다고 합니다.”
오횡묵은 젖은 갱목을 보았다. 조금 전 칠복의 손에 남아 있던 찬기가 아직 손바닥에 있었다.
“캐낸 금의 몫은 받았느냐?”
“죽은 먹었습니다. 빚도 늘었습니다.”
“금이 나오지 않았느냐?”
“나왔습니다. 저희 손에 오지 않았을 뿐입니다.”
광석을 고르던 사내가 손을 멈췄다. 자루를 꿰매던 노인도 바늘을 천에 꽂은 채 고개를 들었다.
조만식이 앞으로 나섰다.
“나리, 저놈이 셈을 몰라 하는 소리입니다. 곡식과 연장, 등잔 기름과 잠자리 값을 제하면 남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셈은 압니다.”
무진의 목소리는 낮았다.
“제가 쉰 날의 밥값은 빠짐없이 적혔습니다. 제가 나른 돌에서 나온 금이 얼마나 제 몫이 되었는지는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금을 팔아야 값을 알 것 아니냐.”
“지난달 금도 아직 못 팔았습니까?”
조만식의 턱이 굳었다.
“흥정하는 동안 너희 먹일 곡식은 내 돈으로 들인다.”
“그 곡식값은 날마다 제 빚에 오릅니다.”
무진이 갈라진 손을 펼쳤다.
“제 품삯만 날짜가 없습니다.”
바람이 골짜기를 훑었다. 돌가루가 일어나 옷자락에 붙었다. 무진의 어깨에서는 피가 저고리의 마른 자리를 천천히 적셨다.
“글과 셈은 누구에게 배웠느냐?”
“글은 할아버지께 배웠습니다. 나무를 몇 묶음 띄웠는지, 얼마를 받고 얼마를 썼는지는 강에서 배웠습니다.”
“집안에서 글을 가르쳤구나.”
“거칠현에 드신 일곱 분 가운데 변귀수(邊貴壽) 어른이 저희 선조입니다. 할아버지는 종이가 귀해도 제 글공부에 쓸 몫은 남겨두셨습니다.”
무진은 손가락에 박힌 돌가루를 문질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제가 할아버지께 장부를 읽어드렸습니다.”
그의 눈길이 오횡묵의 흉배에 머물렀다.
“장부가 사람에게 무엇을 하는지는 아버지가 매를 맞아 죽을 때 알았습니다.”
늙은 아전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누구냐?”
“변석주(邊碩柱)입니다. 변방 변(邊), 클 석(碩), 기둥 주(柱)입니다.”
그의 눈길이 오횡묵의 흉배에 머물렀다.
“장부가 사람에게 무엇을 하는지는 아버지가 매를 맞아 죽을 때 알았습니다.”
늙은 아전 하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가 누구냐?”
“변석주(邊碩柱)입니다. 변방 변(邊), 클 석(碩), 기둥 주(柱)입니다.”
늙은 아전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기억하시는군요.”
“수령 앞에서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다른 아전이 소리쳤다. 오횡묵이 손을 들어 막았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일곱 해 전, 아버지가 고발을 당해 잡혀갔습니다. 곤장을 맞고 돌아와 사흘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무슨 죄로?”
“도지를 내지 않고 작인들을 부추겼다고 했습니다. 지주의 장부를 빼앗아 훼손하려 했다고도 했습니다.”
“네 아버지는 무엇을 하려 했느냐?”
무진은 마른 입술을 적셨다.
“큰물에 밭이 망했습니다. 밭둑이 터지고 흙이 쓸려가 자갈만 남았습니다. 다른 작인들과 도지를 줄여달라고 찾아갔습니다. 거둔 곡식과 물에 잃은 것을 장부에 함께 적어달라고 했습니다.”
그의 눈길이 늙은 아전에게 돌아갔다.
“낼 곡식이 없다는 말이 내기를 거부했다는 말이 되었습니다. 장부를 보여달라는 말은 빼앗으려 했다는 말이 되었고요.”
아전이 옷깃을 여몄다.
“그때 일은 기록을 보아야…….”
“그 기록에 아버지는 죄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진이 잠시 말을 멈췄다. 돌짐을 진 사내의 지게 밑으로 흙가루가 흘렀다.
“자갈에 묻힌 밭은 적히지 않았습니다.”

오횡묵은 늙은 아전을 보았다.
자신이 부임하기 전의 일이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석주를 잡아들인 관아는 그대로였고,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곁에 있었다.
“당시 기록을 살피겠다. 함께 갔던 작인들의 말도 듣겠다.”
“그 사람들은 제 말을 했다가 아버지처럼 될까 두려워합니다.”
오횡묵은 대답을 늦췄다. 관아로 부르겠다는 명이 그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헤아려졌다.
금점 서기가 장부를 덮었다. 종이 사이에서 마른 흙이 떨어졌다. 무진의 눈길이 그 손을 따라갔다.
“아버지에게는 내야 할 것만 알려주었습니다.”
그가 조만식을 보았다.
“저에게는 갚을 것만 알려줍니다.”
아전 둘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한 사람이 무릎 뒤로 발을 들이밀었다. 몸이 기울며 상처에 붙었던 천이 당겨졌다.
“놓아라.”
“나리, 이놈이 감히—”
“내가 묻고 있다.”
팔이 풀렸다. 무진은 발을 고쳐 디뎠다. 새로 번진 피가 저고리의 솔기를 따라 내려갔다.
“억울한 일을 글로 적어 올릴 수 있겠느냐?”
“언문은 읽고 제 이름도 씁니다. 천자문도 배웠습니다. 소지를 쓰는 법은 모릅니다.”
“아는 대로 적으면 된다.”
“아버지 일도 그렇게 적어 갔습니다. 아전은 관아에 올리는 글이 아니라며 다시 써오라고 했습니다.”
“어디를 고치라 하더냐?”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오횡묵이 아전들을 둘러보았다. 늙은 아전은 땅을 보았고, 무진의 팔을 잡았던 자는 빈손을 소매 속에 넣었다.
“대신 써줄 사람은?”
“금점 서기는 물주의 사람입니다. 마을에서 글을 아는 분들은 그 집에 빚이 있었습니다. 장터에서 써주는 사람은 먼저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무진은 손가락에 박힌 돌가루를 문질렀다.
“글 한 장 값을 모으는 동안에도 빚은 늘었습니다.”
오횡묵은 호방을 불렀다.
“종이와 붓을 꺼내라. 여기서 들은 말부터 적어라.”
호방이 평평한 돌의 물기를 훔치고 종이를 펼쳤다. 바람에 들리는 모서리는 작은 돌로 눌렀다. 벼루에 물을 붓자 검은 먹빛 위로 하늘 한 조각이 떠올랐다.
“전에 쓴 글도 가져와라. 격식은 고치되 뜻은 바꾸지 않겠다.”
무진의 시선이 늙은 아전에게 머물렀다.
“빠뜨리지 않고 적겠습니까?”
“내가 직접 읽겠다. 네 말과 다른 곳은 바로잡아라.”
“읽은 뒤에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호방의 붓끝이 멈췄다.
이곳에는 석주의 고발장도 형벌 기록도 없었다. 들은 말만으로 죄를 벗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돌아가서 살피겠다는 말만 남기고 떠날 수도 없었다.
“다음 군수가 와도 아버지는 죄인이고, 저는 죄인의 아들입니다.”
무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제 말만 적지 마시고, 아버지 이름 옆에 적힌 죄도 살펴주십시오.”
오횡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갔던 사람들은 내가 찾아가 말을 듣겠다.”
그는 조만식을 돌아보았다.
“금을 판 내역과 품삯, 빚 문서를 내놓아라. 무엇을 제했는지 맞춰보겠다.”
“댄 돈을 받는 것까지 잘못이라 하시면 누가 금점을 열겠습니까?”
“일한 사람이 제 몫을 알 수 있게 하라는 것이다.”
오횡묵은 무진의 어깨를 가리켰다.
“상처가 아물 때까지 짐을 지우지 마라. 쉬는 동안의 밥값도 빚에 얹지 마라.”
서기가 조만식을 보았다. 그러고는 붓을 들었으나, 빈칸 위에서 한동안 머뭇거렸다. 종이 끝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번졌다.
조만식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리께서 이러시면 감영에서도 좋게 보지 않을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금점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어디 세금뿐이겠습니까.”
골짜기의 바람은 찼다. 그러나 관복 안으로 땀이 흘렀다. 오횡묵은 소매 끝을 쥐었다가 놓았다.
“그 말도 적어라.”
조만식이 호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붓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갱도에서 망치 소리가 몇 번 울리다 멎었다. 광석을 고르던 사내도, 돌을 빻던 아낙도 손을 놓고 있었다.
호방이 진술을 다 적었다.
오횡묵은 종이를 받아 무진 앞에서 읽었다. 도지를 거부하고 작인들을 선동했다는 혐의, 큰물에 망한 밭, 도지를 줄여달라던 사정이 이어졌다.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무진이 말했다.
“아버지가 장부에 적어달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호방이 붓을 고쳐 잡았다.
“무엇을 적어달라고 했느냐?”
“도지를 떼어먹은 것이 아니라, 낼 곡식이 없었다는 것을요.”
오횡묵이 종이를 돌 위에 펼쳤다.
“그 말을 넣어라.”
호방이 줄 사이에 글자를 보탰다. 여백이 좁아 글씨가 작아졌다. 무진은 몸을 숙였다. 상처가 당겼으나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고친 대목을 다시 듣고서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래에는 날짜와 군수가 현장에서 진술을 들었다는 말이 붙었다.
먹이 마르는 동안 무진은 지게를 들지 않았다. 등 뒤의 굴에서는 물이 떨어졌고, 발치에는 돌짐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버지의 죄도 아직 벗겨지지 않았다.
무진은 종이 위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변석주(邊碩柱).
이번에는 그 이름 곁에, 큰물이 지나가 자갈만 남은 밭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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