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정선총쇄록(旌善叢瑣錄) 2편)
제11부 ― 소나무 껍질로 봄을 넘기는 백성들
산비탈에는 불을 놓아 일군 밭이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며칠 전 내린 봄눈이 응달에 남아 있었고, 볕 드는 곳에서는 눈 녹은 물이 검은 재를 적시며 흘렀다. 산등성이를 넘어온 바람에는 아직 겨울의 찬 기운이 묻어 있었다.
여자가 괭이를 내리찍을 때마다 쇳날이 돌에 부딪혔다.
손목이 튕기고 젖은 재가 치맛자락에 달라붙었으나, 여자는 괭이 끝을 옮겨 다시 찍었다.
곁의 아이는 드러난 돌을 바구니에 담고, 큰 것은 두 손으로 안아 밭 밖으로 옮겼다. 일행이 다음 굽이에 이를 때까지 뒤집힌 흙은 몇 줌 되지 않았는데, 아이의 바구니에는 돌이 반쯤 찼다.
굽이 너머에는 노인 하나가 지게를 진 채 주저앉아 있었다.
오른발에는 짚신이 없었고, 왼발의 짚신도 밑창이 닳아 발가락이 드러났다. 맨발의 뒤꿈치에는 피와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지게에 묶인 소나무 뿌리와 길게 벗긴 속껍질에서는 송진 냄새가 났다.
오횡묵이 다가가자 노인은 일어서려 했으나, 지게가 등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땅을 짚고 다시 주저앉았다.
“그 속껍질은 어디에 쓰는 것이오?”
“말려서 빻아 보릿겨에 섞습니다. 죽을 쑤려고요.”
오횡묵은 껍질 가장자리에 남은 붉은 얼룩을 보았다.
노인은 갈라진 손가락을 오므려 지게 끈을 잡으며, 집이 길 아래 비탈에 있다고 했다.
관아에서 사람들이 기다린다는 아전의 말에도 오횡묵은 노인을 따라 내려갔다.
좁은 길로 눈 녹은 물이 흘렀다. 진흙에 찍힌 맨발 자국은 뒤따라온 물에 가장자리부터 허물어졌다.
초가 처마에는 젖은 짚이 늘어져 있었고, 떨어지는 물이 문턱 앞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노인은 지게를 벽에 기대고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한쪽 다리를 돌로 괸 밥상과 이가 빠진 사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아궁이의 솔가지는 타다 만 채 식었고, 솥에는 눌어붙은 자국만 남아 있었다. 곡식독 바닥에는 마른 겨 몇 조각이 붙어 있었다.
“지난가을 거둔 곡식은 어찌했소?”
“도지 내고 환곡 갚았습니다.”
“봄이 되면 다시 빌려야 하고?”
“거두기 전부터 모자라니까요.”
노인은 사발을 밥상 위로 옮기다가 다리를 괸 돌이 밀리자 손으로 받쳤다. 오횡묵은 아전을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노인이 문 쪽을 살피고 입을 열었다.
관아에서는 쭉정이가 섞인 곡식도 한 말로 적어 내주고, 가을에는 좋은 곡식을 말 위로 수북이 채워 받는다고 했다.
“지난봄에는 그것도 못 받았습니다. 남은 곡식이 없다 해서 빈손으로 돌아왔지요. 그런데 가을에 갚으러 가니 제 이름에 두 말이 더 올라 있었습니다.”
“누가 받아 갔다고 하던가?”
“장부에 있으니 내라 했습니다.”
“받지 않았다는 말은 해 보았소?”
노인은 곧 대답하지 않고 독 안으로 손을 넣었다. 바닥에 붙은 겨를 손톱으로 긁어 손바닥에 모은 뒤에야 오횡묵을 보았다.
“나리께서는 장부와 제 말 중 어느 쪽을 믿으시겠습니까?”
문틈으로 바람이 들자 노인은 겨가 날리지 않도록 손을 오므렸다.
“갚아도 글자가 남아 있으면 또 갚습니다. 글자를 지울 사람은 관아에 있고, 곡식을 지고 가는 사람은 저희뿐입니다.”
오횡묵은 일기책에 노인의 이름과 마을, 곡식을 받으러 갔던 때를 적었다.
노인은 날짜를 기억하지 못했으나 그날 함께 관아에서 돌아온 이웃의 이름은 댈 수 있었다.
“장부를 찾아보고, 그분의 말도 듣겠소.”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오횡묵은 붓을 거두고 그가 손바닥의 겨를 사발에 털어 넣는 것을 지켜보았다. 손금에 남은 가루까지 손가락으로 훑고 나서야 노인은 손을 내려놓았다.
한양을 떠난 지 이레 만에, 마지막 고개 너머로 정선읍이 나타났다.
낮에 지나간 비가 산등성이에 구름을 남겨 놓았다. 골짜기에서는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고, 높은 산그늘에는 눈이 희끗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에 맺힌 물방울이 뒤늦은 비처럼 떨어졌다.
산 아래 모인 집들에서 저녁 연기가 가늘게 올랐고, 그 곁으로 조양강이 굽어 흘렀다.
강 한가운데 녹도에 닿은 물살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섬의 높은 곳에는 소나무들이 서 있었으며, 그 아래 젖은 모래와 자갈밭으로 불어난 물이 밀려왔다가 물러났다.
오횡묵은 노인의 빈 곡식독을 떠올렸다. 고개 위에서는 집들이 한데 모여 보였으나, 어느 집 솥에서 곡식이 끓고 어느 집에서 나무껍질을 빻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쪽 구름이 갈라지자 저녁빛이 녹도의 소나무 끝에 닿았다.
강물에도 붉은 빛이 번졌다가 산이 해를 가리자 함께 어두워졌다. 오횡묵은 읍내로 내려갔고, 빈 가마를 멘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관아 앞에는 새 군수의 부임을 보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길 양쪽에 늘어선 관속들의 인사를 받으며 지나던 오횡묵은 담장 밑에 쪼그려 앉은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흙 묻은 감자를 손톱으로 긁어 먹고 있었다. 단단한 생감자가 앞니에 걸리고 입안에 흙이 들어갔는지 얼굴을 찡그렸으나, 씹던 것을 뱉지는 않았다. 오횡묵이 다가가자 감자를 품 쪽으로 당겼다.
“이름이 무엇이냐?”
“만석이요.”
“아버지는 무엇을 하느냐?”
“금 캐러 갔어요.”
“어느 산으로?”
“어머니도 모른대요.”
아이의 걷어 올린 소매가 젖은 손목에 붙어 있었다.
“오늘 밥은 먹었느냐?”
만석이 감자를 들어 보였다.
“감자가 밥인데요.”
“쌀밥 말이다.”
아이는 감자를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쌀은 무슨 맛이오?”
마중 나온 아전이 아이의 어깨를 밀었다.
“나리 앞에서 무슨 버릇이냐. 어서 가거라.”
만석은 감자를 감싼 채 골목으로 달아났다. 돌에 걸려 휘청하면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 오횡묵이 그 골목을 바라보는 동안, 뒤에서는 관속들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날 밤, 부임 인사와 살림 보고가 끝난 뒤에도 관아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오횡묵은 환곡 장부에서 노인의 이름을 찾았다.
지난해 봄 두 말을 내주고 가을에 거두었다는 기록이 있었고, 이웃의 이름에도 같은 날 한 말을 내준 것으로 적혀 있었다. 종이 위에서는 두 사람 모두 곡식을 받아 돌아갔다.
그는 그 장을 펼쳐 둔 채 창고의 출납을 적은 책을 가져오게 했다. 담당 아전은 묵은 장부를 찾아야 한다며 아침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다.
밤이 깊자 빗소리가 다시 들렸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뜰을 건너왔고, 등잔 심지 끝에는 검은 덩이가 맺혔다. 오횡묵은 심지를 돋우고 노인의 이름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
이튿날 창고 장부가 오자 같은 날 내준 곡식의 양을 두 책에서 각각 더했다. 환곡 장부의 합계가 창고에서 내보낸 양보다 두 말이 많았다.
“그날 창고를 맡았던 사람을 부르게.”
불려 온 아전은 봄의 일이라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장부에는 두 말을 내준 것으로 되어 있사옵니다.”
“창고에서 내보낸 양과 맞지 않네.”
아전의 눈이 다른 책으로 옮겨 갔다.
“창고를 열었던 사람과 이 줄을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게. 곡식을 받으러 온 사람들의 말도 듣겠네.”
그다음 날, 노인이 말한 이웃이 관아로 왔다.
“저만 한 말을 받았습니다. 그 어른은 남은 곡식이 없다 해서 빈손이었고요. 돌아오는 길에 제가 쉬느라 내려놓은 짐을 받쳐 주셨습니다.”
그는 나루에서 두 사람을 만났던 이의 이름도 댔다. 오횡묵이 붓을 움직이자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움켜쥐었다.
“제가 이렇게 말한 것도 적힙니까?”
“적겠네.”
오횡묵이 적은 말을 읽어 주자, 고개를 숙이고 듣던 이웃은 노인이 빈손이었다는 대목에서 얼굴을 들었다.
“예. 그랬습니다.”
며칠 동안 관아 뜰에는 불려 온 사람들의 짚신 자국이 겹쳐 찍혔다.
창고 기록과 나루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는 이의 말까지 확인한 끝에, 노인이 받지도 않은 곡식 두 말을 가을에 갚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누가 그 빚을 올렸는지는 더 살펴야 했다.
오횡묵은 노인을 관아로 불렀다. 노인은 방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도 마당 끝에서 머뭇거렸다. 양쪽 발에 짚신을 신었으나 뒤꿈치에 감은 헝겊 사이로 상처가 보였다.
오횡묵은 두 장부를 앞에 펼쳤다.
“지난봄에 곡식을 받지 못하셨다는 말을 확인했습니다. 잘못 매긴 두 말은 장부에서 바로잡고, 가을에 거두어 간 곡식도 돌려드리겠소.”
노인은 종이 위의 글자를 바라보다가 손으로 입가를 문질렀다.
“오늘 가져갈 수 있습니까?”
오횡묵은 아전을 불러 곡식을 마련하게 하고, 고친 장부와 창고의 출납을 맞추라고 명했다.
잠시 뒤 마루 아래에서 곡식 재는 소리가 났다. 말에 곡식을 붓고 윗면을 고르는 동안 노인은 문턱 안에 앉아 고개를 길게 빼고 보았다. 오횡묵은 고친 기록을 읽어 주었으나, 노인의 눈은 자루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루가 앞에 놓이자 노인은 매듭을 눌러 보고 양손으로 밑을 받쳤다. 들어 올린 곡식의 무게에 팔이 처졌다. 그는 자루를 무릎에 내려놓고 한동안 손을 떼지 않았다.
“이제 가을에 이것을 또 갚으라 하지는 않겠지요?”
“댁이 잘못 낸 곡식을 돌려드리는 것이오. 다시 갚을 몫이 아니오.”
노인은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아전이 어깨에 올려 준 자루를 한 손으로 붙들고, 아픈 발을 늦게 디디며 마당을 건넜다.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는 자루가 미끄러지지 않도록 매듭을 다시 당겼다.
오횡묵은 같은 날의 다른 이름들을 살피고, 앞뒤 날짜의 기록도 대조했다.
창고의 출납과 맞지 않는 대목이 더 나왔다.
뜰에 볕이 들면서 처마 끝의 물방울이 뜸해졌다. 마루 아래 젖은 짚신에도 볕이 들었다.
노인의 이름 아래로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이 이어져 있었다. 오횡묵은 다음 장을 넘기려던 손을 멈추고, 그중 한 이름 곁에도 작은 점을 찍었다.
관아에는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뚜껑을 덮은 흰 쌀밥과 시래깃국, 묵은 무김치가 놓였고, 작은 접시에는 취나물과 묵혀 두었던 곤드레, 데친 고사리가 담겨 있었다. 상 가운데에는 삶은 닭 한 마리가 다리를 접은 채 놓였다. 잔치는 마련하지 않았으나 새 군수의 첫 끼니라며 부엌에서 닭을 잡은 것이었다.
오횡묵이 밥그릇의 뚜껑을 열자 흰 김이 손등을 스쳤다.
닭 삶은 냄새 사이로 된장과 나물 향이 올라왔다.
그는 시래깃국을 한 숟가락 떴다. 국물은 보기보다 칼칼했고, 푹 삶은 시래기는 씹을수록 구수했다. 목으로 넘긴 뒤에는 짠맛이 오래 남지 않았다.
갓 무친 취나물에서는 쌉싸래한 향이 났다.
말렸다 불린 곤드레는 된장과 들기름에 무쳐 잎이 부드러웠다. 오횡묵은 밥 한 숟가락에 곤드레를 곁들여 먹고, 다시 취나물에 젓가락을 뻗었다.
고사리는 줄기의 탄력이 조금 남아 있었다.
오횡묵은 밥 위에 곤드레를 얹어 먹고, 다시 취나물에 젓가락을 뻗었다. 한 달 동안 길에서 찬 밥을 먹던 입이었다. 시래깃국도 한 숟가락 더 떴다.
그때 산길에서 본 노인의 곡식독이 떠올랐다.
바닥에 겨 몇 조각만 붙어 있던 독이었다. 관아 문 앞에서 만난 만석은 날감자를 품에 숨겼다.
오횡묵은 상 가운데 놓인 닭을 바라보다 상을 들여온 아전에게 물었다.
“저 닭은 어디서 났는가?”
“읍내에서 가져왔사옵니다.”
“누가 값을 냈는가?”
아전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새 수령을 맞는 날이니 내어 달라고 하였사옵니다.”
“어느 집인가?”
아전이 집을 말하자 오횡묵은 그 이름을 적었다.
“내일 그 집에 가서 값을 묻게. 받은 만큼 치러야 하네.”
아전이 절하고 물러났다.
오횡묵은 닭의 살을 조금 떼어 밥 위에 놓았다. 씹는 동안 따뜻한 국물이 아직 입안에 남아 있었다. 그는 닭고기를 삼키고 다시 수저를 들었다. 이미 잡은 닭을 물린다고 그 집 마당에 살아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빈 접시가 돌아갈 때 값을 함께 보내야 했다.
상 위의 김이 차츰 잦아들었다. 오횡묵은 취나물을 한 번 더 집어 먹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닭고기는 접시에 많이 남아 있었다.
마중 나온 관속들의 이름을 듣고 수행원들의 잠자리를 살피는 사이 밤이 깊었다.
그는 일기책을 펴서 상여 뒤를 따르던 아이, 소나무 속껍질을 진 노인, 관아 담장 밑에 앉아 있던 만석을 적었다.
노인에게는 이름을 물었으나 죽은 사내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오횡묵은 길을 안내했던 아전을 불러 이튿날 사내의 이름을 알아오게 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전날 만난 노인의 이름부터 환곡 장부에서 찾았다.
노인은 지난가을 곡식을 갚았다고 했지만, 장부에는 그 일부가 빚으로 남아 있었다.
“곡식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아전이 관속 한 사람의 이름을 가리켰다.
“불러오게. 노인이 가져온 곡식을 어디에 적었는지 물어야겠네.”
오횡묵은 호적과 군적도 넘겼다. 재작년 봄에 죽은 사람에게 군포가 매겨져 있었고, 다른 고을로 떠난 사람의 환곡은 이웃들이 나누어 갚고 있었다.
그는 죽은 사람의 이름 옆에 종이를 끼웠다. 누가 살아 있고 누가 떠났는지 확인하기 전에는
장부의 글자 하나도 믿을 수 없었다.
창고는 장부보다 더 적은 것을 보여주었다. 가마니 수가 맞지 않았고, 묶인 입을 풀자 축축한 곡식 사이로 겨와 돌이 만져졌다. 썩은 곡식과 쥐 오줌 냄새 속에서 오횡묵이 물었다.
“없는 곡식은 어디로 갔느냐?”
“봄에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내준 기록을 가져오게. 남은 것은 직접 세고.”
다음 날 아침, 오횡묵은 부임길에 만난 노인의 이름부터 환곡 장부에서 찾았다.
지난봄 곡식 두 말을 내어주었다고 적혀 있었다.
노인은 관아에 곡식이 없다 하여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가을에는 그 두 말까지 갚았는데, 장부에는 빚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횡묵은 곡식을 거두었다는 관속을 불렀다. 노인이 찾아온 날을 묻자 관속이 댄 날짜는 장부의 날짜와 달랐다.
“네가 이 줄을 적었느냐?”
“그러하옵니다.”
“그럼 곡식을 받은 날은 왜 기억하지 못하느냐?”
“사람이 많았습니다. 오래전 일이기도 하옵고…….”
노인은 관아에 곡식을 지고 온 날을 기억했다.
돌아와 독을 열었을 때 바닥이 얼마나 드러나 있었는지도 말했다. 관속은 날짜를 바로잡지 못한 채 장부에 적혀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오횡묵은 노인의 이름이 있는 장에 종이를 끼웠다.
“이 일을 확인할 때까지 그 집에 빚 독촉을 보내지 말게.”
아전이 대답하는 동안 그는 다음 장부를 펼쳤다.
재작년 봄에 죽은 사내가 군적에 남아 있었다. 죽은 뒤에도 그 이름에는 해마다 군포(軍布)가 매겨졌고, 올해 낼 몫까지 적혀 있었다.
“이 사람은 죽었다면서 누가 군포를 냈느냐?”
“그 집에서 냈사옵니다.”
“집에 누가 남았는가?”
아전이 다른 장을 넘겼다. 아내와 열세 살 난 아들이었다.
오횡묵은 죽은 사내의 이름 아래 적힌 수량을 다시 보았다.
베를 마련한 것은 살아 있는 두 사람이었을 터였다. 그러나 장부에는 그들의 손이 보이지 않았다. 죽은 사내가 해마다 군포를 낸 것으로만 남아 있었다.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름을 지우지 않았느냐?”
“군적을 고치려면 확인할 것이 많사옵니다.”
“거둘 때는 무엇을 확인했느냐?”
아전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고을로 떠난 사람의 환곡에는 이웃 네 집의 이름이 달려 있었다.
빚을 진 사람은 떠났으나 빚은 마을에 남았다. 한 집이 제 몫을 내지 못하면 다른 집의 몫이 늘었다. 오횡묵은 책장을 넘기다 말고 그 네 집의 이름을 다시 읽었다.
떠난 사람의 행방은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곡식을 거두러 갈 집은 빠짐없이 적혀 있었다.
그는 죽은 사내의 이름을 그 자리에서 지우지 않았다.
사망한 날과 그 뒤 군포를 거두어 간 사람, 떠난 이의 빚을 대신 낸 집들을 확인하게 했다. 잘못 매긴 몫을 돌려주려면 누구에게서 얼마나 거두었는지까지 알아야 했다.
아전들은 시간이 걸릴 일이라고 했다.
오횡묵은 죽은 사내의 이름 옆에 적힌 해들을 보았다. 그들이 확인할 시간을 얻는 동안에도, 사내의 아내와 아들은 해마다 베를 마련했다.
창고 문을 열자 눅눅한 곡식 냄새가 밀려 나왔다.
장부대로라면 가마니가 안쪽 벽까지 쌓여 있어야 했다. 빈자리에는 먼지가 내려앉았고 벽 밑에는 쥐가 드나든 흔적이 있었다.
관속이 가마니 하나의 입을 풀었다. 오횡묵이 손을 넣어 곡식을 쥐자 겨와 작은 돌이 손가락 사이로 떨어졌다. 바닥 가까이의 곡식은 습기를 먹어 덩어리져 있었다.
“이것을 백성에게 내주었느냐?”
“봄에 내준 곡식도 있사옵니다.”
“누구에게 얼마나 내주었는가?”
창고를 맡은 아전은 장부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오횡묵은 그를 기다리는 동안 남은 가마니부터 세게 했다. 관속들은 창고와 책상 사이를 오가며 수량을 맞췄다. 다시 세고 합계를 다시 냈으나 해가 기울도록 숫자는 맞지 않았다.
오횡묵은 오전에 종이를 끼워 둔 장을 다시 폈다.
노인의 두 말이 있었다. 죽은 뒤에도 군포를 내는 사내의 이름과 떠난 이의 빚을 떠안은 네 집의 이름도 그대로였다. 하루 동안 사람을 불러 묻고 곡식을 세었으나 장부의 숫자는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관아에 들어오기 전에는 장부를 열어 보면 알 수 있으리라 여겼다.
막상 책들을 펼쳐 놓으니 어느 기록이 먼저 잘못됐는지부터 가려야 했다. 거두어 간 곡식의 행방을 물으면 장부를 더 찾아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오횡묵은 책상 앞에 앉아 노인의 빈 독을 떠올렸다.
관아에서는 찾을 시간을 청할 수 있었지만, 그 집에서는 겨를 긁어 사발에 모아야 했다.
창고에는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는 끼니가 떨어진 집을 확인하고, 남은 곡식에서 상한 것을 골라 내라고 일렀다.
관속 하나가 창고의 수량이 장부와 달라 곡식을 내주기 어렵다고 했다. 감영에 올릴 보고도 필요했다.
“오늘 센 수를 적게. 모자라는 곡식은 모자란 대로.”
“그렇게 쓰면 창고를 맡은 자가 문책을 받을 것입니다.”
오횡묵은 벌어진 가마니를 보았다. 젖은 곡식에서 시큼한 냄새가 났다.
“그동안은 맞는다고 써 왔는가?”
관속은 대답하지 못했다.
“보고는 내가 하겠네. 먼저 먹을 수 있는 것부터 가리게.”
관속들이 멍석 위에 곡식을 쏟았다.
겨와 작은 돌이 곡식 사이로 굴러 나왔다.
창고가 어두워지자 등불을 더 들여왔고, 사람들은 그 아래 앉아 손으로 돌을 골랐다.
오횡묵은 한동안 그 곁을 떠나지 못했다. 백성에게 내줄 곡식을 가리는 손놀림이, 장부에서 이름 하나를 바로잡는 일보다 빨랐다.
노인의 두 말을 확인하는 데에는 며칠이 더 걸렸다.
오횡묵은 먼저 그날 창고에서 곡식을 내보낸 기록을 찾았다.
환곡 장부에 적힌 사람들의 몫을 더하면 창고에서 나갔다고 적힌 양보다 두 말이 많았다. 그것만으로 노인의 말이 옳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다른 집의 몫을 잘못 적었거나, 창고 쪽 기록이 빠졌을 수도 있었다.
그는 노인과 함께 관아에 왔던 이웃을 불렀다. 이웃은 자신은 한 말을 지고 돌아왔지만 노인은 곡식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돌아가는 길에 그 어른이 제 짐을 잠깐 받쳐 주셨습니다. 그날 그 어른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횡묵은 곡식을 내주던 관속에게 그날의 일을 다시 물었다.
관속은 노인이 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내어주었다는 두 말의 기록 외에는, 누가 노인에게 곡식을 건넸는지 확인할 만한 기록도 내놓지 못했다.
오횡묵은 창고 출납의 차이, 노인과 이웃의 말을 나란히 적었다.
아직 두 말이 왜 장부에 올랐는지 밝혀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노인이 그것을 받아 갔다고 볼 근거는 장부의 한 줄뿐이었다.
가을에 갚았다는 곡식은 다른 기록에서 찾았다.
노인의 이름과 두 말이 창고에 들어온 곡식의 내역에 적혀 있었다. 곡식을 받은 관속도 그때 노인이 지게를 지고 왔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 두 말은 노인의 빚을 줄이는 장부로 옮겨지지 않았다. 곡식은 거두고도 빚은 남긴 셈이었다.
오횡묵은 두 기록을 앞에 놓고 관속들을 차례로 불렀다.
누가 봄에 받지 않은 곡식을 노인의 빚으로 올렸는지, 가을에 거둔 곡식은 왜 갚은 것으로 적지 않았는지 물었다.
한 사람은 앞사람이 넘긴 장부를 그대로 베꼈다고 했고, 다른 사람은 자신이 맡기 전부터 있던 줄이라고 했다.
그들의 책임은 더 가려야 했다. 그러나 노인에게 두 말을 다시 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노인이 관아에 온 날, 오횡묵은 장부를 그의 앞에 펼쳐 놓았다.
“지난봄 그대에게 내주었다는 두 말은 창고에서 나간 기록이 없소. 함께 갔던 사람도 그대가 빈손으로 돌아왔다고 했소. 가을에 낸 곡식은 창고에 들어온 것을 확인했소.”
노인은 장부 대신 오횡묵의 얼굴을 보았다. 글자를 읽을 수 없었다.
“그럼 이제 더 갚지 않아도 됩니까?”
“그 빚은 바로잡겠소. 가을에 잘못 거두어 간 곡식도 돌려주겠소.”
노인은 두 손을 무릎에 얹었다. 오횡묵은 그가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지난가을에 그렇게 되었더라면…….”
노인이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겨울 내내 소나무를 벗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횡묵은 노인의 맨발 뒤꿈치를 보았다. 길에서 본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다.
장부의 글자를 고쳐도 그가 굶으며 보낸 겨울은 지울 수 없었다.
오횡묵은 돌려줄 곡식의 양과 날짜를 적게 하고, 노인 앞에서 그 내용을 소리 내어 읽었다. 노인이 곡식을 받아 갈 때에도 다시 읽어 주라고 일렀다. 노인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듣고서야 장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돌아간 뒤 오횡묵은 같은 날 곡식을 받았다고 적힌 이름들을 다시 펼쳤다. 창고의 출납과 맞지 않는 줄이 더 있었다. 노인의 이름 아래로,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이 이어져 있었다.
관속들이 키를 흔들자 마른 겨가 허공에 일어났다. 저녁빛이 창고의 문틈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떠다니는 가루를 비췄다. 돌은 멍석 위에 남고 곡식은 다시 자루에 담겼다. 오횡묵은 먹을 수 있는 것으로 가려 낸 한 자루를 들게 하고 노인의 집으로 갔다.
노인은 문밖에서 발소리가 나자 부뚜막 옆에 세워 둔 지게부터 집어 들었다. 다시 관아로 오라는 줄 알았던 것이다. 흙바닥에는 낮에 벗겨 온 소나무 속껍질이 펼쳐져 있었다. 마른 것은 안으로 말렸고, 아직 젖은 것은 손으로 펴 놓아도 자꾸 오그라들었다.
관속이 자루를 내려놓았다. 노인은 그것을 보고도 지게를 놓지 않았다.
“지난번 빚도 남았다는데, 이것까지 더하면 못 갚습니다.”
“빌려주는 곡식이 아니오. 먹으라고 내주는 것이오.”
노인의 시선은 자루에서 관속의 품에 낀 장부로 옮겨 갔다. 창고에서 가져온 곡식의 양과 노인의 이름을 적게 하자, 노인은 붓끝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서 있는 곳까지 저녁볕이 닿았으나 발치의 흙은 낮에 녹은 눈 때문에 축축했다. 다친 뒤꿈치에 붙은 흙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떨어졌다.
오횡묵은 장부를 노인 앞에 펼치고 적힌 내용을 읽었다.
“곡식 한 자루를 내주었다고 적었소. 빌려준 것이 아니니 갚을 몫도 없소.”
노인이 물었다.
“나리께서 가신 뒤에도 그렇게 적혀 있겠습니까?”
오횡묵은 곧바로 답하지 못했다.
노인이 지난가을 갚았다는 곡식은 아침에 본 환곡 장부에서 빚을 줄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 앞에서는 적겠다는 말보다, 적힌 글자가 오래 남을 것이라는 말이 더 어려웠다.
마당 건너편에서 이웃 여인이 물을 긷고 있었다. 오횡묵이 부르자 여인은 물이 반쯤 찬 바가지를 우물가에 내려놓고 왔다. 손등은 물에 젖어 붉었다.
“어르신이 오늘 곡식 한 자루를 받으셨소. 빌린 것이 아니니 돌려달라는 사람이 오면, 지금 들은 말을 그대로 해 주시겠소?”
여인은 노인을 보고, 펼쳐진 장부를 보았다.
“제가 들었습니다.”
노인은 그제야 지게를 벽에 기대고 자루를 받아 들었다. 무게가 다친 발로 쏠리자 잠시 문설주를 짚었다. 그는 자루를 고쳐 안은 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솥은 있소?”
오횡묵이 물었다.
“아직은 있습니다.”
노인은 부뚜막 곁에 자루를 내려놓았다. 솥에는 뚜껑이 덮여 있었으나 불 땐 흔적은 식어 있었다. 아궁이 앞에 쪼갠 장작 몇 토막이 놓여 있었다. 비를 맞았는지 겉이 짙은 색이었다. 노인은 자루의 매듭을 풀지 않고 한동안 손만 얹어 두었다.
이웃 여인은 우물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열린 문 너머로 노인이 마른 가지를 찾아 아궁이 앞에 놓는 것을 보고서야 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오횡묵이 비탈길을 올라설 때 집에서는 아직 밥 짓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장작을 서로 부딪쳐 보는 소리만 났다.
관아로 돌아오자 산길을 안내했던 아전이 낮에 알아낸 이름을 전했다. 고개에서 마주친 상여에 실렸던 사내였다. 오횡묵은 그 이름을 일기책에 적고, 아이에게 마지막 씨감자를 먹인 뒤 봄을 넘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아전이 산길에서 했던 말도 그대로 옮겼다.
이 고을에서는 굶어 죽는 것도 병이옵니다.
그 아래에는 관아 담장 밑에서 만난 만석의 이름을 적었다.
금을 캐러 간 아버지가 어느 산에 있는지 아이도 몰랐다. 오횡묵은 다음 날 그 집에 가 보기로 하고, 만석이 흙 묻은 감자를 쥔 채 되물었던 말을 적었다.
쌀은 무슨 맛이오.
밤이 깊어 관속이 노인에게 곡식을 내준 장부를 가져왔다. 오횡묵은 등잔을 가까이 당겼다. 낮에 적게 한 노인의 이름과 곡식의 양이 그 자리에 있었다. 손등에 묻은 창고의 먼지를 털자 작은 가루가 책상 위로 떨어졌다.
나리께서 가신 뒤에도 그렇게 적혀 있겠습니까?
오횡묵은 장부의 여백에 곡식을 내준 날짜를 다시 쓰고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등잔불 아래서 마르지 않은 먹이 잠깐 빛났다. 그는 글자가 번지지 않도록 장부를 펼쳐 둔 채, 노인에게서 받아 적은 다른 이름들이 있는 일기책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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