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 동학항쟁사
제4부 ― 장부에 남지 못한 사정
무진이 열두 살 되던 해,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던 초여름에 큰물이 났다.
비가 오기 전 며칠은 볕이 따가웠다.
석주는 밭 가장자리에서 보리 이삭을 비벼 낟알이 여문 정도를 살폈고, 순덕은 감자 포기 밑으로 흙을 끌어올렸다.
마른 흙이 호미 끝에서 부스러졌다. 조와 콩의 어린잎은 한낮이면 축 늘어졌다가 해가 기울어야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산마루에 구름이 걸리자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한바탕 내려주면 좋겠네.”
첫날의 비는 흙을 적셨다.
처마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밭고랑의 먼지가 가라앉았다.
석주는 저녁을 먹은 뒤에도 문밖에 서 있었다. 어둠이 내린 밭에서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그는 처마 밖으로 손을 내밀어 빗물을 받아보았다.
이튿날에는 산이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산허리까지 내려앉고 골짜기 건너 집들이 빗속에 지워졌다.
처마에서 쏟아지는 물이 마당을 파고들었다.
흙벽 밑이 검게 젖자 순덕은 장작을 부엌 안쪽에 쌓고 종자 자루를 시렁으로 올렸다.
석주는 삽을 들고 집 둘레의 물길을 팠다. 물은 파낸 흙을 허물며 흘렀다.
한쪽을 깊게 파고 돌아오면 다른 쪽이 메워져 있었다.
사흘째 새벽, 무진은 냇물 소리에 잠을 깼다.
평소 돌 사이로 졸졸 흐르던 물이 낮고 굵게 울었다. 골짜기마다 흙탕물이 쏟아져 내려 냇물에 합쳐졌다.
뿌리째 뽑힌 풀과 나뭇가지가 뒤엉켜 떠내려갔다. 디딤돌은 사라졌고, 나무다리는 한쪽 끝만 물 밖에 걸려 있었다.
석주는 밭 아래 둑으로 내려갔다.
이미 물이 고랑으로 들고 있었다. 삽날을 밀어 넣자 젖은 흙이 덩어리째 떨어져 나갔다.
그는 낡은 자루에 흙을 담아 터진 곳에 눕히고 돌을 얹었다. 무진도 돌을 안고 따라왔다.
“집으로 들어가라.”
무진이 돌을 내려놓자 아버지가 저고리 뒷덜미를 잡아 둑 위로 끌어올렸다.
“여기서 미끄러지면 못 잡는다.”
아버지의 짚신은 진흙에 잠겨 발등의 끈만 보였다.
해가 져도 비는 줄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는 물이 어디까지 차올랐는지 알 수 없었다.
석주가 등잔을 들고 문밖으로 나갔으나 불빛은 처마 앞 빗줄기만 비췄다. 그는 문턱에 서서 소리를 들었다.
물속에서 돌이 구르는 소리가 났다.
밤중에 둔탁한 소리가 몇 차례 이어졌다.
뒤이어 물소리가 갑자기 가까워졌다. 석주가 문을 여니 마당 아래로 흙탕물이 밀려들고 있었다.
장작 한 토막이 빙글 돌다가 담 밑으로 빠져나갔다.
그는 따라 나온 무진을 안으로 밀었다.
“순임이 데리고 윗목으로 가라.”
순덕은 곡식독을 붙들고 있었다.
둘이 함께 들어 문턱 안으로 옮기는 동안 발밑에서 흙물이 튀었다. 마당의 닭들이 날개를 치며 흩어졌다.
두 마리는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으나 한 마리는 물에 밀려 담 쪽으로 갔다. 순덕이 손을 뻗었을 때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지붕에서도 물이 샜다.
무진은 사발을, 순임은 작은 바가지를 가져다 놓았다. 그릇 하나가 차기도 전에 다른 곳에서 방울이 떨어졌다.
순덕은 이불을 접어 무릎 위에 올리고 아이들을 곁에 앉혔다.
그 밤에는 누구도 눕지 못했다.
날이 밝자 석주는 밭으로 내려갔다.
보리가 서 있던 곳으로 물이 흘렀다.
꺾인 이삭들이 물살을 따라 엎드려 있었고, 줄기에는 풀뿌리와 진흙이 엉겨 붙었다.
감자 두둑은 옆구리가 뜯겨 나갔다. 흙 속에서 자라던 작은 감자들이 드러나 있었고, 줄기째 뽑힌 포기는 아래쪽 돌 틈에 걸렸다.
조와 콩을 심은 자리에는 고랑이 없었다.
물이 할퀴고 간 홈 양쪽으로 모래와 자갈이 쌓였다. 흙이 씻긴 곳에서는 가느다란 뿌리가 드러나 물살에 흔들렸다.
석주는 삽으로 물길을 돌리려 했다.
흙을 떠낸 자리마다 물이 차올랐다. 돌 하나가 굴러와 발목을 때렸다. 그는 무릎을 꺾었다가 삽자루를 짚고 일어섰다.
밭둑에서 순덕이 불렀다.
“그만 올라와요.”
석주는 조금 전까지 밭이었던 곳을 바라보았다. 삽날이 물속에 잠겨 있었다. 한참 뒤에야 그것을 뽑았다.
비는 닷새째에 잦아들었다.
구름 사이로 볕이 났으나 냇물은 여전히 누렇게 흘렀다.
산에 스며든 물이 골짜기를 따라 내려왔다. 마당에는 떠밀려온 풀과 나뭇가지가 걸렸고, 젖은 흙벽에서는 흙이 조금씩 떨어졌다.
석주는 물이 빠진 밭부터 들어갔다.
보리 한 줌을 건져 손바닥에서 비볐다. 껍질에 진흙이 박혀 있었다. 겉이 온전한 것을 골라 까보아도 속이 물러진 낟알이 나왔다. 그는 남은 이삭을 광주리에 담았다.
무진도 곁에 쪼그려 앉았다.
진흙에 묻힌 이삭을 잡아당기면 줄기만 끊어졌다. 손가락으로 흙을 헤쳐 낟알을 주웠다. 손톱 밑으로 모래가 파고들었다. 물에 불은 손끝이 따끔거렸지만 광주리 바닥은 좀처럼 가려지지 않았다.
순덕은 무너진 두둑에서 감자를 모았다.
아직 흙에 묻혀 있는 포기는 두고, 드러난 것만 거두었다. 잘린 감자는 따로 담았다. 썩은 것은 버리려다가 손바닥에서 한 번 더 굴려보았다. 손가락으로 무른 데를 도려내고 남은 쪽을 살폈다.
밭 두 뙈기 가운데 낮은 쪽은 자갈밭이 되었다.
석주는 돌을 걷어내고 삽날을 밀어 넣었다.
그 아래에서도 돌이 걸렸다. 더 파자 물이 배어 나왔다. 그는 삽자루에 두 손을 얹은 채 서 있었다.
물이 빠지고 며칠 뒤 마름이 찾아왔다.
그는 무너진 둑을 따라 걷다가 짚신에 묻은 진흙을 털었다. 자갈에 덮인 밭을 둘러보고는 품에서 장부를 꺼냈다.
“밭 두 뙈기에 한 섬이다.”
석주가 광주리의 보리를 가리켰다.
“건진 것이 이렇습니다. 말려봐야 먹을 수 있는지 알겠습니다.”
“큰물 난 것은 나도 안다.”
“그런데 무엇으로 한 섬을 냅니까?”
마름은 장부의 한 줄을 짚었다.
“물이 가져간 것이지 주인어른이 가져간 것은 아니지 않으냐.”
석주는 발치의 이삭 하나를 주웠다. 진흙을 털자 빈 껍질이 손바닥에 붙었다.
“식구 먹을 것과 다음 농사에 쓸 종자라도 남겨야 합니다.”
“주인어른께 직접 말해보든가.”
마름은 장부를 접었다.
석주의 손안에서 젖은 이삭이 뭉개졌다. 집에서는 순덕이 젖은 멍석을 걷어내고 있었다. 멍석 밑으로 갇혔던 흙물이 흘러나왔다.
이튿날 석주는 지주의 집으로 갔다.
밤새 눅눅한 이불을 덮고 뒤척인 몸이었다. 마르지 않은 저고리가 등에 달라붙었다.
길가에는 떠내려온 나뭇가지가 쌓였고, 물 빠진 고랑에는 보리 줄기가 진흙에 반쯤 묻혀 있었다. 그는 이삭 하나를 집어 들었다.
지주의 대문 안에는 볕이 들었다.
하인이 지난해 거둔 곡식 가마니를 옮겨 바닥에 밴 습기를 살피고 있었다.
석주는 돌계단 아래 짚신을 벗었다. 젖은 버선 앞코에서 흙물이 배어 나왔다.
지주는 대청에서 장부를 보고 있었다. 절을 올렸으나 앉으라는 말은 없었다.
“큰물 난 것은 들었네.”
“올해 도지(賭地)를 면해주십시오.”
지주가 눈을 들었다.
“한 섬을 모두 말인가?”
“보리는 진흙에 묻혔습니다. 감자 두둑도 쓸려갔고, 조와 콩을 심은 자리에는 자갈이 덮였습니다.”
“그렇다고 약조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네.”
석주는 손안의 이삭을 내려다보았다.
“거두지 못한 곡식을 무엇으로 냅니까?”
지주는 장부를 덮었다.
“자네 품과 종자가 망가진 것은 알겠네. 하지만 나도 그 밭에서 받기로 한 곡식을 잃는 것이야. 내 몫을 모두 없애달라면 손해를 나 혼자 지라는 말 아닌가?”
석주가 고개를 들었다.
“주인어른께서는 곡식을 덜 받으십니다. 저는 아이들 먹을 것까지 내놓아야 합니다.”
지주의 시선이 석주의 젖은 버선과 진흙 묻은 무릎에 머물렀다. 곁에 선 마름도 입을 다물었다.
“나도 그 땅에 매긴 세금을 관아에 내야 하네. 큰물이 났다고 저절로 덜어주는 것은 아니야.”
그는 손끝으로 장부 모서리를 밀었다.
“올해 수확을 마치면 절반만 내게. 보리가 모자라면 가을에 거둔 콩이나 조로 채워도 좋네. 그 이상은 어렵네.”
석주는 남은 밭을 떠올렸다.
물이 빠져도 뿌리가 썩은 포기는 살릴 수 없었다. 다시 심으려면 자갈을 걷고 흙을 메워야 했다. 종자도 구해야 했다.
“그 절반을 내면 겨울은 무엇으로 납니까?”
“내게도 먹여 살릴 입이 있네.”
마당에서 하인이 가마니 하나를 들어 옮겼다.
젖었던 바닥에 네모난 자국이 남았다. 석주는 그 자국을 보다가 눈을 내렸다.
“봄에 뿌릴 것까지 먹으면 다음 농사를 못 짓습니다. 종자를 남기면 겨울에 아이들 그릇이 빕니다.”
지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석주는 손안의 이삭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이걸 건지려고 식구들이 며칠을 흙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온전한 낟알이 얼마나 나올지도 모릅니다.”
마름이 대청에서 내려왔다.
“절반을 덜어주신다는데 어디서 자꾸 말대꾸냐.”
그가 석주의 팔을 잡았다. 돌을 걷다가 긁힌 살 위로 손가락이 박혔다. 석주는 팔을 빼냈다.
“올해는 도지를 낼 수 없습니다.”
그는 지주를 바라보았다.
“안 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놓으면 식구가 굶습니다.”
지주는 붙잡으라고 하지 않았다.
석주는 무릎 곁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품에 넣었다.
돌계단 아래에서 몸을 굽혀 짚신 끈을 맸다. 대문이 닫힌 뒤에도 가마니 내려놓는 소리가 담 너머로 들렸다.
집으로 돌아온 석주는 젖은 보리를 멍석에 펼쳤다.
볕이 나자 쉰 냄새가 올라왔다.
이삭을 얇게 펴놓았다가 구름이 몰려오면 걷어 들였다. 순덕은 낟알을 골라 검게 변한 것을 따로 담았다.
저녁이면 아이들이 그 곁에 앉았다. 먹을 것과 버릴 것을 나누는 어머니의 손을 말없이 보았다.
밭에서는 쓰러진 줄기를 세우고 뿌리 둘레의 모래를 걷었다.
물러진 줄기는 손이 닿기만 해도 꺾였다.
같은 골짜기의 작인들도 지주의 집을 다녀왔다.
돌아온 사람들은 밭둑에서 만났다. 누구는 말없이 돌을 걷었고, 누구는 마름에게 들은 말을 옮겼다.
도지는 절반을 내야 했다. 남은 곡식으로 겨울을 넘기고 종자까지 마련할 수 있는 집은 없었다.
닷새 뒤, 석주는 작인 다섯 명과 다시 지주의 집을 찾았다.
여섯 사람이 대문을 들어서자 안채 문이 닫혔다. 마름이 앞을 막았으나 석주는 대청 아래로 걸어갔다.
며칠째 물 빠진 밭에서 일한 짚신에는 진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저희 밭을 한번 살펴주십시오. 실제로 거둘 수 있는 만큼을 보고 도지를 정해주십시오.”
지주는 마루 끝에 섰다.
“사정이 있으면 각자 올 일이지, 어째 무리를 지어 왔느냐?”
“한 사람씩 와서는 말씀을 다 드리지 못했습니다.”
석주 뒤의 작인이 모자를 벗었다.
“보리를 말려 털었는데 속이 썩은 것이 태반입니다.”
다른 작인은 흙이 쓸려가 뿌리가 드러났다고 했다.
자갈을 걷느라 며칠을 들여도 씨 뿌릴 자리를 만들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말하는 동안 손에 든 모자를 구기거나 발등의 흙을 내려다보았다.
지주는 그들의 말을 듣고도 대청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도지는 절반만 받겠다. 수확 뒤에도 모자라면 내년 봄까지 기다려주마.”
석주는 장부를 보았다.
봄까지 기다린다는 것은 모자란 도지가 이듬해 빚으로 넘어간다는 뜻이었다. 그때에는 종자를 구할 일도, 새 도지를 마련할 일도 돌아올 터였다.
“그 장부에 올해 큰물이 났다는 것도 적어주십시오.”
지주의 얼굴이 굳었다.
“무엇을 적으라 마라 하는 것이냐?”
“보리를 얼마나 건졌는지, 밭이 얼마나 쓸려갔는지요. 저희가 못 낸 곡식만 남기지 말아주십시오.”
지주는 장부를 제 쪽으로 당겼다.
“약조한 것을 적는 장부다.”
“곡식을 떼어먹으려는 게 아닙니다. 낼 곡식이 없었다는 것을 남기려는 겁니다.”
마름이 하인들을 불렀다.
하인들이 작인들의 어깨를 밀었다. 뒤의 사람이 밀려나고 앞의 사람이 버티는 사이, 마름의 팔꿈치가 대청 끝에 놓인 장부를 쳤다. 장부가 마당으로 떨어져 펼쳐졌다. 끼워둔 종이 몇 장이 바람에 들려 흙바닥으로 흩어졌다.
석주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지주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관아에 고하겠다. 법대로 처리할 것이다.”
석주가 마루를 올려다보았다.
“그 법은 저희 밭도 살펴줍니까?”
하인이 그의 어깨를 대문 쪽으로 밀었다.
그날 저녁 고발장이 관아에 들어갔다.
작인들이 무리를 지어 집에 들이닥쳐 도지 납부를 거부하고, 재산 장부를 빼앗아 훼손하려 했다고 적혀 있었다.
앞장선 사람으로 석주의 이름이 올랐다.
고발장에는 여섯이라는 수가 남았다.
큰물도, 쓸려간 밭도, 그들이 함께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없었다.
이튿날 새벽 군졸들이 석주의 집에 들이닥쳤다.
무진은 문간에서 아버지의 손목에 포승이 감기는 것을 보았다. 순덕이 군졸의 다리를 붙들었다가 걷어차였다.
방 문을 열던 변 진사는 마당의 창끝 앞에서 멈췄다. 문을 잡은 손만 떨렸다.
석주는 끌려가며 가족을 돌아보았다.
“없는 곡식은 낼 수 없다. 내가 한 말은 그것뿐이다.”
관아에서도 그는 밭을 보고 판단해달라고 했다. 도지를 내고 나면 아이들 먹일 것과 가을에 심을 보리 종자가 남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전은 누가 사람들을 모았느냐고 물었다.
석주가 밭 이야기를 하면 장부에 손을 댔느냐고 물었다. 수해를 말할 때마다 물음은 여섯 사람과 흩어진 종이로 돌아왔다.
밭을 보러 나간 사람은 없었다.
석주는 곤장 스무 대를 맞았다.
관아 문 앞에서 다시 본 아버지는 두 다리로 서지 못했다.
무진이 한쪽 팔을 제 어깨에 걸었으나 몸이 함께 기울었다. 작인들이 달려와 석주를 부축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상처에 붙은 옷감에서 피와 진물이 배어 나왔다.
무진은 아버지의 손을 놓지 않았다.
며칠 전 그 손은 진흙 속에서 이삭을 건졌다. 무진이 주운 보리를 광주리에 받아주고, 물살 가까이 가면 저고리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이제 무진이 손가락을 움켜쥐어도 아버지는 마주 잡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순덕이 바지를 벗기려 하자 석주가 비명을 질렀다.
마른 피가 옷감을 터진 살에 붙들어놓고 있었다. 순덕은 손을 멈췄다.
물을 가져와 천을 적신 뒤 붙은 곳에 대고 기다렸다. 조금씩 옷감을 떼어낼 때마다 석주의 손가락이 바닥을 긁었다.
변 진사는 아들 곁에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받치려고 손을 내밀었다.
석주가 몸을 움찔하자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 노인은 아들의 어깨와 등, 바닥을 짚은 팔을 차례로 보았다.
어디를 잡아야 덜 아플지 알 수 없었다.
처마 밖에서는 다시 가는 비가 내렸다.
걷어 들이지 못한 멍석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렵게 건진 보리가 젖고 있었다. 순덕이 문밖을 보았다가 젖은 천을 다시 남편의 상처에 댔다.
변 진사는 내밀었던 손을 제 무릎으로 가져왔다. 손바닥에 아들의 피가 묻어 있었다.
석주가 신음할 때마다 노인의 입술이 벌어졌다.
끝내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들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하며 외운 글 가운데에는 아들 몸을 덜 아프게 할 한 구절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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