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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부고의 수신인 ⑥]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 김광희 기자
  • 입력 2026.09.02 0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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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아 소장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수진 앞의 찻잔을 손이 닿기 좋은 곳으로 밀어 주었다.

“여기서는 수진 씨 이야기를 하셔도 돼요. 미선 씨를 만나는 일은 그다음에 따로 생각하고요.”

 

수진은 가방에서 아버지의 휴대폰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꺼진 화면에 천장의 형광등이 길게 누웠다.

미선이 보낸 ‘무서워요’를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읽고 난 뒤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볼지 두려웠다.

엄지손가락을 전원 버튼에 댄 채 수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검은 화면 위의 불빛도 그대로였다.

 

김 소장이 조용히 말했다.

“외투부터 벗으세요. 여기서는 오래 앉아 계셔도 됩니다.”

수진은 두 번 만에 지퍼를 내렸다. 목덜미에 밴 땀이 안감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머니가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말했다. 

밤중에 거실로 나오면 불도 켜지 않은 채 앉아 울고 있다고 했다.

자기도 아버지 목소리를 자꾸 되돌려 듣는다고 말하려다가, 녹음 파일이 세 개 있다고만 했다. 

 

김 소장은 그 안에 무슨 말이 들어 있는지 묻지 않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멎었다가 멀어졌다. 수진은 저도 모르게 문 쪽을 바라보았다. 

누가 왔는지 확인하려던 자신의 시선을 깨닫고 고개를 돌렸다.

 

“지적장애가 있어도 혼자 생활할 수 있는 거지요?”

묻고 나서 수진은 곧 덧붙였다.

“미선 씨 이야기는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잘 몰라서요. 식당에서 일하는 건 봤는데.”

 

김 소장은 잠시 생각했다.

“사람마다 다르지요. 다른 지역에서 만난 분은 장날이면 혼자 버스를 타고 읍내에 나오셨어요.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 입어 보고, 화장품 가게에서는 립스틱을 손등에 발라 색을 비교했어요. 목이 마르면 카페에 들어가 음료를 주문하고,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것도 사 드셨고요.”

“그런데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를 마주치면 가까운 가게로 들어갔어요. 그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나오지 않았고요.”

“그다음에는요?”

“다시 나와서 남은 장을 보셨지요.”

김 소장은 거기까지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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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은 탁자 위에 놓인 아버지의 휴대폰을 보았다. 화면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상담실을 나설 때 김 소장은 언제든 다시 와도 된다고 했다. 

수진은 끝내 켜지 못한 휴대폰을 가방 깊숙이 넣었다. 건네받은 명함은 수첩 사이에 끼웠다.

 

계단 벽의 팻말은 여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올라올 때 수진은 자신이 그 글을 읽어도 되는지 망설였다.

내려가면서도 그 문장의 ‘당신’을 자기 자리로 데려올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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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갔다.

벗었다 다시 입은 외투의 목깃이 안으로 접혀 있었다. 수진은 상가를 나서며 손가락으로 목깃을 펴냈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건너편 신호에 걸려 있었다. 돌아보니 낡은 상가 위로 세지약국 간판이 보였다.

상담소에 올라오기 전 자신을 붙들었던 쓸모없는 생각이 다시 돌아왔다.

‘세지’는 약사의 이름일까. 딸의 이름일까.

 

수진은 이번에는 속으로 제 이름을 불러 보았다.

최수진.

아버지의 성을 떼어 내자 수진만 남았다. 전보다 가벼워져야 할 이름이 이상하게 더 외로웠다.

 

장바구니를 든 여자가 건너편 버스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몇 번이에요?”

수진은 버스 앞 유리창에 적힌 노선번호를 읽어 주었다.

여자가 고맙다고 말하며 바구니를 고쳐 들었다. 길게 삐져나온 대파 잎이 수진의 소매를 스쳤다. 버스가 신호를 건너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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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솔재리에 들어서자 식당 간판이 보였다.

유리창 안쪽에는 김이 서려 있었다.흐린 유리 너머로 사람들의 윤곽만 오갔다. 수진은 창가로 몸을 기울였다. 저 안에서 미선이 상을 닦고 그릇을 날랐을 것이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러 드나들었고, 누군가는 미선을 만나러 갔다.

식당이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도 수진은 한동안 기울인 몸을 바로 하지 못했다.

 

집에는 동욱과 현수가 와 있었다.

식탁 위에 부조금 장부가 펼쳐져 있었다.수진이 들어서자 현수가 세어 보던 봉투 하나를 내려놓았다.

 

“아직 나누지 말자.”

수진이 외투를 벗으며 말했다.

동욱이 물었다.

“언제까지?”

“외상부터 확인하고.”

 

어머니는 냉동실에서 장례 뒤 남겨 온 배추전을 꺼냈다.

비닐에 붙은 조각을 손으로 떼어 프라이팬에 얹었다. 

얼음이 녹으며 기름이 튀었다. 수진은 외투를 의자에 걸다 말고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빈소 접객실에서 맡던 냄새였다. 상복도, 버려진 종이컵도 없는 집 안에 그 냄새만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나는 이제 장 보러 나가는 것도 겁난다.”

어머니가 불을 바라보며 말했다.식탁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누가 위로하려고 말을 거는지, 뭘 더 캐보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전화가 와도 그래. 받자니 무섭고, 안 받으면 또 무슨 말을 할까 무섭고.”

현수가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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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전 한 장을 뒤집으려 했다. 

덜 녹은 밑장이 함께 딸려 올라왔다. 

주걱 끝을 두 장 사이로 밀어 넣자 엉겨 있던 전이 천천히 갈라졌다.

 

주걱을 옮기던 어머니의 다른 손이 은반지를 스쳤다.

환갑 때 아버지와 몰래 맞춘 반지였다. 함께 늙어가자며 끼운 것이었다. 

은빛은 오래전부터 흐려져 있었다.

어머니는 장례를 치르고도 반지를 빼지 않았다.

 

“밤에는 너희 생각이 나고.동욱이 너도 그렇고, 현수는 결혼도 해야 할 텐데.”

주걱을 쥔 손이 불 위에서 멈췄다.

“성폭행범의 아들이라고 소문난 집에 누가 딸을 주려고 하겠어.”

“엄마.”

현수가 낮게 불렀다.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다.

전을 뒤집자 기름이 손등으로 튀었다. 어머니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잖아. 사람들은 방송에 나온 말만 기억할 거야. 그 여자 이름은 잊어도,너희 아버지가 무슨 짓을 했다는 말은 안 잊을 거라고.”

 

전의 얇은 가장자리가 먼저 익어 갈색으로 말려 올라갔다. 어머니는 그 자리를 주걱 끝으로 건드렸다.

“네 아버지는 이렇게 바삭해진 것부터 집어 먹었는데.”

주걱을 든 손이 그대로 멎었다.

“남의 집 사정은 그렇게 잘 알던 사람이…….”

기름 끓는 소리가 남은 말을 삼켰다.

“어느 집 보일러가 고장 났는지, 누가 겨울을 날 돈이 없는지는 다 알면서.”

 

어머니가 처음으로 식탁 쪽을 돌아보았다.

“나하고 너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는 생각도 안 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전을 접시에 옮기지 않은 채 불부터 줄였다.

“미워서 얼굴도 보기 싫어. 정말 싫은데…….”

그다음 말은 오래 나오지 않았다.

“밤에 대문 여는 소리만 나면 또 네 아버지인가 싶어.”

 

어머니의 얼굴이 프라이팬 위로 기울었다. 

낮아진 불 위에서 전 한 장이 둥글게 부풀었다.

“나는 아직도 믿고 싶다.”

누구에게도 들려주려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네 아버지가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고.억울해서, 그저 억울해서 그렇게 간 거라고.”

어머니는 세 자녀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누구도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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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가라앉았다. 

한쪽 가장자리가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그것을 접시에 옮기지 않았다.

수진은 그 믿음 앞에서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아버지가 인정한 일과 부인한 일, 자신이 읽은 문자와 들은 통화가 어머니의 등 뒤에서 한꺼번에 떠올랐다.

어느 것부터 입 밖에 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타겠다.접시 좀 줘.”

수진이 찬장 문을 열었다. 

현수는 수저를 놓았고 동욱은 장부를 의자 위로 옮겼다. 어머니가 전을 접시에 담았다.

손목에 남은 수술 자국이 불빛에 잠깐 밝아졌다.

밥을 먹는 동안 전화는 울리지 않았다.

수진은 상담소에 다녀왔다는 말을 하려다 다른 질문을 꺼냈다.

 

“엄마, 미선 씨하고 같이 일한 적 있어?”

“기사 나기 전에 몇 번. 저 식당에서 잔치 받을 때 같이 일했지.”

어머니가 턱으로 식당 쪽을 가리켰다. 벽이 가로막고 있어도 방향은 틀리지 않았다.

현수가 전을 반으로 자르며 물었다.

“미선 씨는 왜 계속 거기서 일한 거야?”

 

아버지가 죽은 첫날에는 그냥 미선이라 부르더니, 오늘은 그 이름 뒤에‘씨’를 붙였다.

어머니의 젓가락이 멈췄다.

“안 나가면 그날 일당은 누가 주니.”

“그런 일을 당했으면 다른 데로 가든가.”

“너도 가게 옮기라는 말 쉽게 하면 싫어하잖아.”

 

현수는 입 안의 밥을 삼켰다.

수진은 동생이 다 넘길 때까지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어머니는 미선과 함께 버스를 기다린 날을 떠올렸다.

잔칫일을 마치고 나온 미선이 다른 사람의 차는 타기 싫다며 정류장까지 함께 가달라고 했다고 했다.

누구의 차를 말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게 언제였어?”

“기사 나기 몇 달 전이었을 거다.”

“그때 다른 말은 안 했어?”

 

수진이 묻자 어머니는 빈 접시를 들고 일어났다. 

개수대 앞에 서서 수도꼭지에 손을 얹었지만 곧바로 틀지는 않았다.

“나도 하루 종일 서 있었으니까. 버스에 앉을 생각만 했지.”

 

잠시 뒤 물소리가 났다.

수진은 어머니의 말을 다른 뜻으로 돌려 읽지 않으려 했다. 

그날 어머니의 다리는 오래 서 있어 부어 있었을 것이다.

그날은 그것이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지나간 말마다 그 뒤에 숨은 것이 있었는지 들춰보게 되었다.

상담소 이야기는 끝내 하지 못했다.

 

현수가 가게 매출을 확인하려고 휴대전화를 켰다. 동욱은 장부를 다시 식탁에 올렸다.

수진은 밥그릇에 남은 밥알을 숟가락 끝으로 모았다.

식사가 끝난 뒤에도 장부는 식탁 위에 남아 있었다.

수진은 장부를 덮어 아버지의 물건을 모아 둔 상자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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