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 현수막·읍면 순회 인사 사실상 차기 선거 행보
“선거 끝나도 얼굴 비추는 정치인 기억 오래 남아”
6·3 지방선거가 끝난 뒤 정선지역 곳곳에는 낙선 후보들의 감사 현수막이 잇따라 내걸렸다.
국민의힘 김진태 강원도지사를 비롯해 최철규 정선군수 후보, 더불어민주당 나일주 강원도의원 후보 등은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게시하며 주민들에게 인사를 전했다. 최철규·나일주 후보 등은 선거 이후 정선 9개 읍면을 돌며 주민들을 직접 만나 감사 인사를 이어가기도 했다.
지역 정치권에서는 이를 단순한 예의 차원을 넘어 사실상 차기 지방선거를 향한 첫 정치 행보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 지방정치에서 낙선 인사는 매우 강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특히 강원도처럼 인맥과 조직, 지역 정서의 영향력이 큰 지역에서는 그 효과가 더욱 크다고 분석한다.
우선 낙선 직후 감사 인사는 패배 이미지를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선거에서 졌더라도 끝까지 주민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은 유권자들에게 “책임지는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남기게 된다. 특히 농촌과 탄광지역에서는 선거 이후 자취를 감추는 후보보다 꾸준히 얼굴을 비추는 정치인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경향이 강하다.
감사 현수막은 정치조직 유지의 신호이기도 하다. 선거운동원과 지지층, 지역 유지들에게 “정치적으로 아직 살아 있다”, “다음 선거를 준비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지방정치권에서는 낙선 이후 존재감이 급격히 사라질 경우 차기 공천 경쟁에서도 밀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공개적으로 “4년 뒤 다시 출마하겠다”고 선언하기보다 감사 현수막과 지역 행사 참석, 경조사 방문, 명절 인사 등을 통해 정치적 존재감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처럼 선거 직후 곧바로 현수막이 등장한 것 역시 지역 정치권에서는 사실상 재도전 의사 표명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특히 지방선거에서는 “졌지만, 가능성은 있었다”는 기억이 중요하다. 표차가 크지 않았거나 특정 지역에서 강세를 보인 후보들은 선거 이후에도 꾸준히 얼굴을 비추면 차기 유력 주자로 다시 부상하는 사례가 많다.
실제 나일주 후보는 이번 강원특별자치도의원 정선군 선거구 선거에서 국민의힘 김기철 후보에게 544표 차로 패했다. 최종 득표는 김기철 후보 1만1,679표(51.2%), 나일주 후보 1만1,135표(48.8%)였다.
나 후보는 선거 패배 직후 한때 정치를 접는 방안도 고민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가족과 주변 인사들이 “표 차이가 크지 않았고, 정선 북부권에서도 고르게 표가 나왔다”며 재도전을 권유했고, 이후 차기 지방선거 출마 의지를 일찌감치 굳힌 것으로 알려졌다.
정선지역은 생활권에 따라 정치 지형도 뚜렷하게 나뉜다는 분석이 많다. 정선읍을 비롯해 북평면·여량면·임계면·화암면 등은 이른바 ‘정선 북부권’, 폐광지역인 사북읍·고한읍·남면·신동읍 등은 ‘정선 남부권’으로 분류된다. 인구 규모는 북부권이 상대적으로 많지만, 남부권 역시 폐광지역 특유의 조직력과 결집력이 강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생활권과 지역 정서가 다르다 보니 정선군수와 도의원 선거에서는 “우리 지역 후보를 밀어야 한다”는 견제 심리가 비교적 강하게 작용하는 편이라는 것이 지역 정치권의 분석이다. 실제 선거 때마다 북부권과 남부권의 득표 흐름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치학적으로 보면 이런 낙선 인사 문화는 해외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오래된 정치 전통 가운데 하나다. 미국에서는 패배 후보가 공개적으로 승복 연설(concession speech)을 하며 지지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 단순한 패배 인정이 아니라 지지층 결속과 정치적 재기의 의미까지 함께 담고 있다는 평가다.
국내에서도 지방자치제가 본격화된 1995년 이후 낙선 감사 현수막 문화가 점차 자리 잡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단순한 감사 표시를 넘어 차기 선거 출마를 염두에 둔 정치적 메시지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지역 정가 관계자는 “지방정치는 선거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얼마나 지역에 얼굴을 비추느냐가 중요하다”며 “낙선 인사는 단순한 감사 표시가 아니라 정치적 체력과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김광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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