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님이 슈퍼 하던 옛집에서 어린이 낭송방 시작…“사람과 지식 잇는 공부마을로”
부모가 살던 집을 지키는 일에서 시작된 공부가 사람들을 함백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신동읍 조동삼거리의 ‘함백산장’은 고미숙 고전평론가의 부모가 직접 집을 짓고 슈퍼를 운영하며 생활했던 곳이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가족들은 손때가 밴 집을 팔지 않았다. 대신 어린이들이 시와 고전을 소리 내 읽는 낭송방으로 문을 열었다.
어린이 겨울·여름 공부방으로 이어지던 공간에는 어느 순간 어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감이당 내 삼경스쿨팀이 지역주민들과 주역을 공부했고, 소문을 들은 외지인들이 찾아오면서 수업도 다양해졌다.
그렇게 부모의 옛집은 사람과 지식을 연결하는 ‘산장아카데미’로 자라났다.
고 평론가는 지난 8월 7일 신동생활문화센터에서 열린 산장아카데미 함백여름캠프에서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보다 함백에 공부의 장이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의 핵심은 어려운 고전을 많이 아는 데 있지 않다. 배운 것을 생활과 연결하고, 스스로 삶을 이끌어갈 힘을 얻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설명이다.
고 평론가는 “예전에는 대학이나 대학원에 가고 훌륭한 교수를 만나야 지식을 얻는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스마트폰만 있어도 누구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며 “이는 디지털이 우리에게 준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어 “서울의 최고 엘리트나 지역에서 농사짓는 사람이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며 “어디에 사느냐보다 자기 삶에서 어떻게 주도권을 갖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고 평론가는 건물을 짓고 일회성 행사를 여는 데 치우친 지역 활성화 방식에도 질문을 던졌다. 주민을 행사의 관객이나 즐거움을 제공받는 대상으로만 바라봐서는 지역이 스스로 살아갈 힘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지역주민을 화려한 행사로 즐겁게 해줘야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주민들을 어린이처럼 취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며 “주민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자기 삶의 주도권을 갖도록 공부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이 아닌 함백에서 첫 여름캠프를 연 것도 수도권과 지역을 가르는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다. 서울의 지식을 지역으로 전달하는 일방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배우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공부의 길을 내겠다는 뜻이다.
고 평론가는 “서울이 더 살기 좋은가, 지역이 더 좋은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공부하고 서로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며 “한 명도 좋고 세 명이면 더 좋고 다섯 명이면 충분하다.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보다 이곳에 공부의 장이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역에서 공부를 오래 이어가기 위한 조건으로는 ‘공부 근육’을 꼽았다.
그는 “호기심으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지만 지속하려면 근육이 필요하다”며 “공부가 자신의 생활과 결합하고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느끼려면 꾸준히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사람을 잇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학연이나 지연, 혈연으로 이미 맺어진 관계를 넘어 공부라는 새로운 관심으로 친구를 만나야 진정한 공부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고 평론가는 “기존 관계를 넘어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하고 새로운 친구를 계속 만날 때 진정한 공부 네트워크가 만들어진다”며 “인문학과 고전은 특정한 사람만 누리는 고급 지식이 아니라 물과 공기처럼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함백과 인근지역 주민의 참여가 아직 많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처음부터 성과를 서두르기보다 공부를 안내할 사람과 함께 걸을 친구를 연결하며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다른 지역 사람들이 먼저 찾아오고 함백이 공부의 플랫폼으로 자리 잡으면 지역주민도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될 것”이라며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인식을 갖고 온 세상과 연결된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함백 출신인 고 평론가는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해 국어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문학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를 거쳐 현재 감이당과 남산강학원을 중심으로 고전과 몸, 삶을 잇는 공부와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대표 저서로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등이 있다.
부모가 운영하던 작은 슈퍼는 어린이 낭송방을 거쳐 어른들의 인문학 교실이 됐다.
이제 함백산장은 지식을 배우는 공간을 넘어, 사람들이 자기 삶의 주도권을 되찾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는 공부의 플랫폼으로 문을 넓히고 있다. 이광호 기자 egh717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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