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리
읍소재지인 예미리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 평창군 동면 지역으로 고종32년(1895년)에 정선군에 편입되었고 1941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동읍에 편입되었다.
‘가사리’(佳士里)라는 지명은 골짜기의 산세가 선비가 은거하며 살만큼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지만 가장자리를 뜻하는 ‘갓’[邊]이 ‘가사’로 전음 되어 ‘가사’(佳士)라는 한자가 취해졌음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옛날부터 경상도 영주에서 꼬치재를 넘어 정선으로 가는 길이 나있어 많은 사람들이 오갔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일본 사람들이 몰려들어 골짜기마다 철과 구리, 아연 등의 광물을 캐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 근래에는 많은 석회광이 들어서 보기에도 흉할 정도로 삼림이 훼손되어 골짜기마다 이름만큼 그대로 남아 있거나 보존 된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38번 국도가 통과하고 있으며 지대가 높은 까닭에 읍소재지와는 다른 기온 차이를 보이고 가사리에는 마차(磨襁), 피실, 황정골, 머드레이(遠坪), 원가사(元佳士), 남애(南崖), 두리골 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현재는 44가호 98명(2006년 12월 말 기준)의 주민들이 옥수수 감자 고추와 고랭지 채소 등을 재배하며 살고 있다.
마차(磨差)
마차재 꼭대기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북쪽 벽암산(霹巖山)에서 뻗어 온 산세가 옥녀가 앉아 머리를 빗는 형국인 옥녀산발형(玉女散髮形)이어서 ‘마차’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옥녀산발형국은 명당자리라고 하는데, 마차재에는 지금의 주유소 아래 어딘가 ‘구늪지지 팔판대지’라는 명당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오랜 옛날 이곳에는 연안 김(金)씨들이 처음 정착해 살았다. 이들 가운데 가장 촌수가 높은 어른이 죽자 정암사(淨巖寺) 주지스님이 와 묏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 주지스님이 묏자리를 잡아 주고 돌아가면서 연안 김씨 네 명의 아들에게 땅을 파되 넓은 돌이 나오면 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은 묏자리를 파내려 가다가 돌을 들어 버리자 학(鶴) 한마리가 날아올라 갔다고 한다. 묏자리에서 학이 나온 것을 학국산수형 이라고 하는데, 장례를 치르고 나서 묏자리를 잡아 주었던 정암사의 주지스님이 그 얘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연안 김씨들은 기운이 쇄해 이곳을 모두 떠날 것이고, 아마도 수백 년이 지나 밤나무가 산을 이루게 되면 돌아올 것이요……”
그 스님의 말처럼 그때부터 김씨들이 하나둘씩 이곳을 떠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 후 지금의 마차재 휴게소 맞은편 산에는 산밤나무가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산밤나무가 숲을 이루면 학이 찾아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직 연안 김씨는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몇 해전부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 가운데 ‘구늪지지 팔판대지’가 어디쯤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밤나무가 숲을 이룰 때 연안 김씨들이 돌아온다는 그 스님의 예언이 과연 사실로 나타날지 자못 궁금한 일이다.
진용선 정선아리랑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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