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리(佳水里)
정선읍 소재지 남쪽에 있는 강변마을이다. 본래 조선시대에는 정선군 서상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0년(융희 4) 서상면과 서하면을 합쳐 서면으로 개편한 후 1914년 3월 1일 시행한 조선총독부 행정구역 개편령 제111호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탄리, 하미리, 수미리, 일부를 병합하여 가탄과 수미의 이름에서 한자씩 따서 가수리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930년 4월 1일에 서면은 정선면으로 편입되었다.
가수리는 수미마을 강 건너편 뒷대벌 마을 강변 퇴적지형에서 지난 1997년 초기 철기시대의 민무늬토기 등 수십여 점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미 초기 철기시대 또는 그 이전에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가수분교 입구에 있는 높이 30m 둘레 7m에 달하는 느티나무는 가수리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으로 강릉 유(劉)씨가 약 500년전 이 마을에 들어와서 심은 나무라고 전해진다.
1983년 굴암리, 신동으로 통하는 길이 뚫려 버스가 들어오기 전 까지 가수리 주민들은 너툰이재나 틀이재를 넘어 정선읍내, 영월 등지로 오가곤 했다.
가수리는 수미, 북대, 해매, 갈매, 가탄, 유지 등 6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성씨는 강릉 유(劉씨), 정선 전(全)씨, 강릉 최(崔)씨, 평창 이(李)씨, 김해 김(金)씨 등이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수미와 북대에서는 논농사를 짓기도 했으나 지금은 대부분이 콩, 고추, 감자 등의 밭농사와 특용작물을 재배한다.
현재 가수리는 79가호 215명(2012년 5월 31일 기준)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뱅뱅이재
귤암리에서 병방산(丙方山)북쪽 아래로 해서 멀구치 쪽으로 난 고개다.
고개가 험준해 귤암리쪽에서 올라갈 때 병방산 아래로 고래를 오른다고 해서 ‘뱅뱅이재’라고 한다. 옛날에는 귤암리 사람들이 옥수수와 콩 등을 한 말식 지고 나는 새도 쉬어간다고 할 정도로 험한 이 고개를 넘어 북실리로 내려가 정선 읍내 시장에서 소금 등의 생필품과 비료를 지고 넘어오기도 했다. 고개를 넘기가 힘들 때에는 광하리에서 배를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정선 읍내에서 귤암리로 시집을 오는 신부들이 가마를 타고 넘어오던 고갯길이기도 했다.
1971년 강변으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고 이어서 경운기와 트럭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뱅뱅이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길이 되었다. 최근에는 뱅뱅이재 옛길을 복원해 명소가 되기도 했다.
BEST 뉴스
-
차 한 잔의 행복- 멋진 노인
대학에서 심리학을 강의한 교수로서 지금은 6년 째 노인 복지 관을 순회하며 강의하는데, 반응이 좋다고 합니다. 추한 노인의 3가지 1)냄새가 나는 노인입니다. 입을 열면 구취(口臭), 몸에서 나는 체취(體臭), 옷에서 나는 의취(衣臭)입니다. 이는 나이 들수록 ... -
[기고] 반려동물 열풍을 바라보며
예로부터 개는 사람이 사는 울타리 안에 깃들어 사는 한 식솔이자 삶의 일부였다. 필자의 어린 시절 기억 속 개는 요즘 말하는 ‘반려’나 ‘애완’ 같은 거창한 수식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잔밥을 치워주고 마당에 드나드는 낯선 발자국을 경계하는 든든한 파수꾼이었으며, 꼬리를 치며 부리는 재... -
차 한 잔의 행복 -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
1569년, 조선 선조 때 퇴계 이황은 69세의 나이가 되자 우찬성(右贊成)의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때 선조는 이황을 끝까지 옆에 두려고 이조 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이황이 끝내 벼슬을 사양하며 낙향을 고집하자 젊은 관료인 율곡 이이가 찾아갔다. “어린 임금께서 즉위하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