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의 반세기] 전국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주택난
2017/08/29 09:42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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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음회 50주년 백서 中


1973년 논이었던 마름터에 대규모 목조 슬레이트 건물을 지어 상인들에게 불하하면서 지금의 사북시장이 형성됐다. 


사북의 주거시설은 산간지역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두꺼운 나무껍질을 겹겹이 이어 지붕으로 얹은 너와집과 굴피집, 굵은 통나무를 우물 정자(井)로 쌓아 올려 벽을 세운 귀틀집(투방집), 대마 속대인 겨릅대를 갈대나 짚으로 엮어 지붕을 올린 겨릅집, 갈대나 볏짚을 엮어 지붕을 만든 갈대집과 초가집, 땅을 파서 둘레에 나무 기둥을 세우고 갈대나 볏짚을 덮어 만든 움집 등이 주류를 이뤘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광산 개발과 함께 인구가 급격히 늘자 나무로 얼기설기 지은 판잣집과 기름 먹인 두꺼운 종이를 지붕으로 얹은 루핑집들이 비탈진 언덕까지 빼곡하게 들어서기 시작했다. 1965년 화절령 꼭대기 9구에 있던 탄광에서 총무로 일했던 최진섭(80세, 1938년생)씨는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60년 전후로 화절령 꼭대기부터 탄광이 계속 개발됐어요. 그러면서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살 곳이 마땅치 않은 거예요. 그래서 판잣집도 짓고 루핑집도 짓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 당시 구마다 오두막이 20~30채씩 있었는데, 겨울에는 탄광 주변에서 떨어진 괴탄을 주워서 난방을 하고 그랬어요. 골말에도 처음에는 집이 없었는데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한 집 한 집 짓다가 골말까지 들어간 거예요. 전부 무허가죠. 그때는 정식으로 등기는 낸 집이 하나도 없었어요. 법으로 따지면 문제가 되겠지만 살 곳이 없으니까 다들 묵인해줬던 거죠.”


사람들은 계속 들어오는데 주거시설이 부족했다. 1964년 사북 최초의 숙박시설인 대창여관이 생겼지만 외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사람들을 수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동원탄좌는 직원들의 안정된 주거환경을 위해 사택 건설에 나섰다. 1966년 백운광원사택 4동 건립에 이어, 1967년 북부광원사택 27동을 건립했다. 이후 1970년 대부분 새마을사택, 중앙사택, 지장산사택 등이 차례로 들어섰다. 이때부터 광부들의 주거공간이 마련됨과 동시에 사북 탄광촌의 상징인 사택단지가 자리를 잡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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