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사북의 반세기
2017/08/17 09:48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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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사북– 탄광개발로 인구증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북 곳곳에 탄광이 개발되고 외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광산 노동자들은 관행상 임금을 쌀로 지급받았기 때문에 쌀과 생필품의 교환이 성행했다. 쌀과 화폐를 교환하는 일도 빈번했다.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공산품은 다른 지역보다 월등히 비쌌는데, 1966년 태백선이 개통한 이후에도 가격이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석탄 산지였음에도 연탄 가격이 비쌌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장날 거래가 이뤄지는 품목에 땔감이 빠지지 않았다.


1963년 남편을 따랄 사북으로 이주한 김신자(79세, 1939년생)씨는 당시 장날 풍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60년대에는 지금 같은 상가 시장은 없었고, 도랑 옆에 자갈하고 모래가 있는 곳을 시장이라고 했어요. 그때는 생선 구경이 어려웠는데, 그래도 66년에 기차가 다니고부터는 잘 먹은 편이에요. 제천에서 다라이(고무대야) 장사 아줌마들이 머리에 이고 와서 장날에도 팔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팔기도 했어요. 작고 맛이 없어도 그때는 그것밖에 없으니까 사서 먹었죠. 광산에서 쌀 타는 사람들은 쌀하고 바꿔서 먹고 그랬어요. 고등어 한 손에 쌀 얼마, 이런 식으로 물물교환을 한 거죠. 63년 사북에 처음 왔을 때 쌀 한 가마니가 3천700원이었어요.”


이후 탄광 개발이 본격화되고 인구가 급격히 늘고 소비량이 증가하자 장날에 맞춰 사북을 찾던 상인들이 하나둘씩 시장 주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노점 수준을 갓 벗어난 정도의 가판을 차려서 담배나 채소 등을 팔았는데, 장사가 잘 되자 더 많은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이후 1969년 김기대 씨가 처음으로 대규모 소매상을 운영하면서 점차 시장의 꼴을 갖춰나갔다.


사북 유일의 노천시장은 탄광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점차 규모를 키워나갔다. 다른 지역보다 가격이 20~30퍼센트 가량 비쌌지만 지나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노점이라도 차리고 앉아있으면 월급쟁이보다 벌이가 더 좋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활기를 띠었다.

 

                                                                                                                                       [사음회 50주년 백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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